[서평] 방영민 목사의 '책숲 산책' 하나님의 내주하심 / 제임스 해밀턴 지음, 김태형 옮김
서론
개신교는 성령에 대한 이해가 명확해야 한다. 그래야 성령께서 어떻게 일하시고 역사하시는지 분간하고 분별할 수 있다. 성령의 존재와 속성과 사역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비신학적이고 비성경적인 교회와 성도가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한국교회 안에 건강한 성령론이 정립되어야 바른 구원론을 세울 수 있고 온전한 교회를 이루어갈 수 있다.
많은 성도들이 성령을 받았거나 성령충만하다고 하면 어떤 큰 능력과 에너지가 생기고 비이성적이고 반이성적인 일을 행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어떤 특별한 계시를 받아 미래를 예언할 수도 있고 반사회적이고 반공동체적인 일을 하는 것처럼 여긴다. 다른 일반인들과는 다르게 자신만 특별한 지식을 부여받아 신비한 체험을 하여 신령한 사람이 된 것처럼 착각한다.
물론 성령의 역사에 있어서 그러한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성령의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사역은 아니다. 성령의 본질과 속성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더욱 인간다운 삶을 살게 되고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삶을 따르게 된다. 과시하는 성령이 아니라 박영돈 교수의 말처럼 수줍어하시는 성령이시다. 성령은 지극히 구원과 생명과 관련하여 일하시고 예수의 사역을 이어가는 것에 분명한 푯대를 향하고 있다.
본론
중생
본 책은 성령의 중생과 내주하심에 대하여 구약과 요한복음을 근거로 저자가 치밀하게 분석하고 논증하고 있다. 저자는 처음에는 구약의 성도들도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었다 생각했고 성령의 중생과 내주하심에 대한 큰 차이가 없다고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구약과 요한복음과 성령에 대한 다른 구절을 연구하며 이 둘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결론을 짓는다.
중생은 어떤 신비한 체험과 비상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고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이다.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주님을 믿을 수 있는 힘을 공급받아 주님께 손을 펼칠 수 있는 사역이다. 이 중생이 없다면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고 예수님을 필요로 할 수도 없다. 중생이 있어야 예수님을 간절히 원하게 되고 예수님 앞에 엎드릴 수 있다.
중생은 오직 성령께서만 하시는 놀라운 사역이다. 성령의 역사하심만 자연인을 중생인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중생이 없이는 회심이 없는데, 회개가 일어날 수 없고 믿음이 부어질 수 없다. 중생은 인간적인 것으로 이루어낼 수 없고 오직 신적인 것으로만 이룰 수 있다. 인위적인 것으로 얻어낼 수 없고 신적인 역사로만 얻어낼 수 있다.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현상이다. 땅의 자원이 아니라 하늘의 자원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구약의 백성들도 중생의 경험이 있는가? 물론 구약의 백성들도 신약에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요한은 아브라함이 예수를 보고 즐거워하였다고 기록한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했다는 것은 중생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이니 구약의 성도들도 중생의 경험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성령의 내주하심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저자도 요한복음 7:39(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16:7(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절을 근거로 하여 세밀하게 내주하심이 없었다고 결론짓는다.
그렇다면 구약의 성도들에게 성령의 중생은 있었지만, 특별한 능력과 구원과 기적과 성전과 관련하여 일시적으로 역사는 나타났다. 이와 관련하여 왕과 제사장과 사사와 선지자들에게 특별한 임무와 구원과 예언과 관련하여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일을 위한 일시적으로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역사하신 것이다. 신약에 오신 성령처럼 지속적인 내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을 이루기 위하여 특별한 사역이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구약에 성령의 내주하심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성막과 성전을 통해 그리고 공동체 가운데 내주하셔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가르치시고 인도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 있는 중생의 사역이 이 내주하심을 통해 강력하게 일어났고 성도들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다. 온 회중 가운데 주의 영이 거룩하게 임재하여 예수를 바라보고 하나님을 소망할 수 있게 하였다.
구약에서 이런 내주하심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신약과 비교해볼 때 임재의 능력이 비교적 약해보인다. 그러나 신약에 성령이 새로이 오셔서 교회와 성도를 종말론적인 삶을 살게 하기 전이라는 시기만 다를 뿐 성령의 본질과 핵심과 사역의 방향은 동일하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와 백성을 여전히 사랑하시고 돌보신다는 배려이고 증표이다. 이것을 통해 성도는 정결함을 입고 힘을 얻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능력을 소유하게 된다.
내주하심
신약에 와서 요엘 선지자의 예언처럼 하나님의 영이 모든 민족에게 부어진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신이 하늘로 떠나가야 또 다른 보혜사를 우리에게 보내주실 수 있고 이것은 우리를 위한 일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지기 전 제자들에게 아직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지 않았다고 한다. 성령으로 중생되었기에 예수님을 주로 고백했을텐데, 이들에게는 아직 구원사적이고 종말론적으로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 보혜사의 사역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성령의 내주하심의 은혜는 구약의 성막과 성전에 임하셨던 내주하심보다 더 구체적이고 강력다. 구약은 공동체적이고 회중적으로 임하였지만 신약은 성도 개개인 안에 내주하셔서 운행하시고 인도하신다. 성도 한 사람을 주의 성전 삼아 성령께서 직접 붙잡아 주신다. 중생으로 말씀을 깨닫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능력이 더욱 뜨겁고 역동적으로 펼쳐진다. 중생과 내주하심은 구별되지만 내주하심은 중생을 더욱 극대화시킨다.
내주하심이라고 해서 성령께서 성도에게 비이성적이고 반이성적인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반사회적이고 반공동체적인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은 특별하고 신비한 존재가 되어서 자신만 직통계시를 받는 사람처럼 교만해지는 것도 아니다.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일을 해도 용서되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일반상식과 사회법을 초월해도 되는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은 성도가 보혜사의 역할로 인해 지극히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이어가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고 예수님을 더 입체적으로 보여주어서 더 성도다운 존재가 되게 한다. 이성적으로 더 뛰어나게 하고 감수성이 풍성해지고 역경과 고난도 이겨낼 수 있도록 의지를 강하게 하신다. 성도의 지정의를 무시하는게 아니라 적극 활용하여서 성령의 사람이 되게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의 내주라고 하면 본래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수퍼맨 같은 존재가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성령의 내주는 우리를 더욱 자신의 것을 활용하여 주님께 속한 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내주하심 가운데 능력과 은사와 기술과 재능과 지혜와 지식과 믿음과 방언과 언변과 분별과 자비와 양선과 인내와 용기를 주시는 이유는 모두 주님께 속한 자가 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을 위한 것이다.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보혜사로 내주하신다. 진리의 영으로 예수의 영으로 하나님의 영으로 거하신다. 성도에게 자유와 승리와 평안을 주셔서 그들이 가는 곳마다 자유와 승리와 평안이 나타나게 하신다. 내주하신다는 것은 다스린다는 것인데 주님께서 우리를 다스리는 것이다. 악령의 다스림을 받으면 오해와 시기와 모함과 험담이 넘쳐난다. 반대로 성령의 다스림을 받으면 이해와 용납과 존중과 칭찬이 넘쳐난다.
결론
성령의 내주하심이 우리 안에 그리고 교회 안에 있는가?
10월 27일 한국교회대형집회가 열린다고 한다. 차별과 저주와 혐오와 배제와 폭력이 넘쳐나는 곳에 주의 영이 거하시겠는가? 집회에 참여하지 않으면 산발랏과 도비야가 되고 마귀와 바퀴벨레까지 된다고 한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고 진짜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면 잡혀가는가? 정말 그렇다면 주님의 이름으로 핍박을 받는 것이니 더 큰 위로와 상급이 있을 것이기 하늘의 복으로 여기면 되는 것 아닌가.
중생의 사람은 세상의 방식과 기준과 가치관과 다르게 살아간다. 중생은 평안이 있게 하고 내주하심은 평안을 이어가게 한다. 교회 안에 오해가 있고 불안만 있고 분열이 있고 분쟁이 있고 분탕만 있는 것은 악령이 다스리는 것이다. 반대로 교회 안에 이해와 하나와 연합과 일치와 연대가 있다면 성령이 다스리는 것이다. 중생은 새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고 내주하심은 새새람으로 살게 하는 것이다. 성령은 종말론적인 영으로 성도를 신실하게 살게하신다.
책을 통해 성령의 본질과 사역에 대해 다시금 공부하고 생각하게 한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도 점검하게 한다. 성령은 인격적이신데 너무 우리는 비인격적으로 다루는 것 같다. 성령은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데 우리는 너무 반사회적이고 반공동체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성령은 도덕적이고 자연적이고 역사적인데 우리는 비도덕적이고 초자연적이며 반역사적이여야 특별하게 여기는 것 같다. 성령은 우리를 평안케 하시고 흔들리지 않게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