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명민 목사의 서평 [공동서신의 복음과 메시지 / 채영삼 지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사도행전 다음에 로마서를 포함한 바울서신이 등장한다. 그러나 신약의 여러 사본들과 초기 교회에서 사용한 사본의 순서를 보면 사도행전 다음에 야고보서를 비롯한 공동서신이 나온다. 이렇게 초기 교회는 사도행전 다음에 공동서신들이 이어지는 성경을 가졌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왜 사도행전 이후에 바울서신들이 이어지는 정경을 가지게 된 것일까?
신약성경은 우연히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다. 주후 4-5세기 경에 교회에 의해 신약성경이 확립되기 전까지는 초기 교회와 신약의 사본들 대부분에 일반서신이 나오는 순서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제롬에 의해 라틴어로 신약성경이 번역이 되면서 바울서신이 먼저 오는 순서를 갖게 되었고, 이것이 종교개혁을 거치며 바울서신의 주제와 중요성이 부각되면서부터 우리는 라틴적 순차(일반서신은 헬라적 순차)의 정경을 갖게 되었다.
저자는 공동서신이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 이전보다 더 많이 가르쳐지고 공부해야하고 설교되어야 한다고 한결같이 주장한다. 그렇다고 바울서신을 덜 강조하고 바울서신이 약하다고 말하는게 아니다. 바울서신이 주장하고 있지만 바울서신에서 부족하고 약한 부분을 공동서신이 채워주고 보완하고 있기 때문에 공동서신을 통해 교회가 더 온전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도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며 책을 통해 나타나는 특징을 몇 가지 살펴보고자 한다.
바울신학만 중요한가?
그동안 서구 신학과 개신교는 바울신학과 칭의를 강조해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지금도 신약학에서 연구되고 발표되는 내용들을 보면 바울과 그의 서신이 상당히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신약 27권 중에 바울서신이 거의 반이나 되니 그럴만도 하다. 그러나 그 나머지 14권도 동일하게 연구되고 가르쳐져야 하지 않을까? 신약이 바울 한 사람에 의해서만 기록된 것이 아닌데 그에 의해서만 신약이 유지되는듯한 잘못된 이해를 하게 된다.
바울이 13권을 기록했기에 중요하고, 나머지 저자는 한 두 권씩 썼으니 덜 중요한 게 아니다. 오히려 권위를 본다면 바울보다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던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이 훨씬 더 큰 권위를 갖는다. 더구나 예루살렘교회를 대표하는 총회장 격인 야고보가 보여주는 목회적 신학적 리더쉽은 사도행전 15장에서 바울이 사역을 왕성하게 할 수 있도록 포문을 여는 역할을 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확장하는 중요한 결정을 한다.
즉 바울만 중요하고 위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옆에서 보았던 사도들과 그들의 서신 또한 아주 중요하다. 바울은 예수님의 표현을 들은 것을 인용하지만 사도들은 예수님의 표현을 녹여서 풀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바울이 쓴 편지만 우리는 읽고 연구하고 설교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도들이 쓴 편지 또한 동일하게 중요하게 여기며 읽고 연구하고 설교하고 가르쳐야 한다.
개신교는 그동안 바울신학에 치중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종교개혁의 시대적 상황과 개신교의 토양이 구원과 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풍토였기 때문이다. 또한 바울의 상황은 유대교와 성전과 율법과 직접적으로 부딪혀야 했기 때문에 칭의가 중요하게 드러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바울신학과 바울서신만 깊이 보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공동서신이 로마라는 배경 하에 쓰여진 것처럼, 오늘날은 세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공동서신을 더 보아야 한다.
공동서신의 중요성
그렇다고 공동서신이 바울신학과 칭의를 무시하고 짓밟는 것이 아니다. 바울신학이 탄생하고 바울이 칭의를 강조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바울은 유대교와 싸워야 했으며 유대주의자들과 논쟁을 피할 수 없었다. 유대교에서 말하는 행위 구원의 표본인 할례와 율법과 성전중심사상과 정면으로 부딪혀야 했다. 그러니 바울의 글에서는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이 나타날 수 밖에 없다.
또한 개신교 역사에서 중세의 암흑기를 지나 종교개혁시대에 루터를 통해 행위 구원이 아닌 이신칭의에 구원이 드러날 수 밖에 없었다. 모두 교회의 높은 탑처럼 여러 행위를 통해 구원에 이르려고 노력할 때 루터가 바울서신을 통해 구원의 놀라운 빛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즉 바울서신이 중요하고 부각될 수 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바울서신만 중요한게 아니라 각 서신이 시대마다 가지게 되는 중요성이 있다. 한 책만 필요한 게 아니라 시대마다 더 적절하게 요청되는 책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은 공동서신이 갖는 중요한 점이 있다. 그동안 바울서신을 통해 칭의 구원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렸다. 그러나 그것의 강조로 인해 반율법주의적이고 비율법주의적인 폐해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또한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살아가는 현실은 바울과 루터가 만났던 현실과는 다른다. 오히려 사도들이 로마라는 배경에서 경험했던 시험과 시련과 인내와 지킴이라는 주제가 오늘과 더욱 잘 맞아떨어진다.
그런 면에서 바울서신이 강조하고 있는 주제와 함께 공동서신을 통해 우리의 신학과 신앙을 더욱 풍성하게 해야 한다. 교회의 문제와 개인의 어려움이 있으면 바로 바울서신을 찾기보다(물론 그것도 효과가 있으나) 공동서신을 통해 접근하는 것이 더 유효해 보인다. 그동안 교회가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약점을 이 서신들을 통해 잘 보완한다면 교회가 더욱 건강해지리라 예상한다.
일관성이 있는가
바울서신은 바울 한 사람이 작성하였기에 하나의 주제와 일관된 흐름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요한일서, 이서, 삼서, 유다서는 한 명의 저자가 아니다. 주의 형제 야고보, 베드로, 요한, 유다 각 권의 저자가 다르다. 그래서 각 권의 저자가 나름의 목적으로 글을 썼기에 하나의 주제와 일관된 흐름을 찾기가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공동서신에는 정경의 순서와 원리에 입각하여 일관된 주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저자는 7개의 공동서신이 전체적으로 “세상을 맞닥뜨린 교회”라는 큰 주제 아래 한 덩어리로 묶어질 수 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증명해 간다. 초기 교회에도 공동서신을 하나의 덩어리로 보았기에 저자의 주장은 신빙성이 있고 교회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예루살렘 사도들은 유대교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로마라는 배경에서 교회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했다. 그래서 공동서신은 야고보서가 서론의 형식을 갖고 유다서가 결론이 되는 구조를 취한다. 각 권은 세상관 관련된 주제로 서술된다. 야고보서는 세상과 갈등하는 교회, 베드로전서는 세상속의 교회, 베드로후서는 교회속의 세상, 요한일서는 세상을 이기는 교회, 요한이서와 삼서와 유다서는 세상에서 진리로 지키심을 받는 교회의 주제로 종합할 수 있다.
또한 세상에서 교회는 시험을 만나게 되고 이 시험은 고난을 동반하며 이 가운데 교회는 인내를 해야하고 주님의 말씀으로 생명을 지켜가야 한다. 공동서신 각 권이 강조점이 있지만 이렇게 일관된 신학과 주제가 있다는 사실에 공감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처한 현실에서 어떻게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공동서신을 통해 은혜의 말씀을 듣고 승리의 비결을 발견할 수 있다.
결론
신약에서 복음서와 바울서신만 중요한 게 아니다. 다른 서신들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책이다. 사람이 편식만 하면 살 수는 있겠지만 몸이 약해지듯 우리의 영혼도 편식을 하면 영혼의 건강이 약해진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오직성경인데 이것은 바울서신으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라 전체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의미이다.
그동안 교회가 바울서신을 통해 많은 은혜를 누렸다면 이제는 그로 인해 약해진 면을 공동서신을 통해 보완할 필요가 있다. 바울이 예루살렘 사도들의 지지와 협력으로 위대한 선교사로 이방인의 사도로 존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었고 그들의 도움으로 그의 사역에 큰 구원의 문이 열렸던 것처럼, 칭의와 구원의 복음이 공동서신을 통해 교회와 성도를 더욱 성숙하고 온전케 되어야 한다.
저자는 공동서신의 중요성과 앞으로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발견하고 누릴 수 있는지 풍성하게 제시하고 있다. 또한 공동서신을 ‘새로운 영토’라고 생각하고 교회의 미래를 밝힐 수 있는 책이라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꾸준하게 공동서신을 연구하고 논문을 쓰고 강의하고 설교하는 저자인데, 그의 목소리를 들을 필요가 있다. 신약신학은 독창이 아니라 합창이라는 저자의 말에 공감하며 공동서신을 통해 새로운 생수를 맛보게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