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순 교수 저서 철학자 예수 @ [미주뉴스앤조이]
강남순 교수 저서 철학자 예수 @ [미주뉴스앤조이]

서론 

개그맨으로서 뉴진스님으로 활동하는 사람이 있다. 산속에 고립되어 홀로 고독한 종교로 살아가는 불교가 그분으로 인해 산 아래로 내려와 사람들 곁에 서게 되었다. 대중친화적인 불교가 가능한가, 전자음악과 힙합과 댄스를 불교에 입혀서 젊은이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간다. 원래 불교의 모습과 특징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런 불교의 접근성을 보며 대중친화적이고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어서 긍정적으로 보는 자들도 있다. 반대로 불교의 교리와 특징이 폄하되고 고유한 가치를 단절시킨다고 보는 부정적인 입장도 있다. 불교가 사람들에게 관심과 인기를 얻을 수 있기에 이런 변화를 찬성하는 자들도 있고. 불교가 사람들의 인기에 이끌려 가고 세상의 흐름을 따라가기에 반대하는 자들도 있다.

종교란 무엇인가?

사람들에게 흥미와 쾌락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나는 불자가 아니기에 이런 현상에 대해서 설명할 입장은 안된다. 하지만 개인적인 의견을 말해본다면, 불교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가치가 손상되는 것 같아 아직은 미지근한 입장이다. 이런 현상을 더 분석하기 원한다면 종교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고, 불교의 가르침과 교리와 목적을 심도있게 다루어 여러 각도로 조명해야 될 것이다.

철학자 예수? 

예수라는 인물은 기독교에서 유일한 창조자와 구원자와 인생의 주인으로 믿고 고백한다. 다른 종교는 헛된 우상이고 거짓이며 인간이 만든 신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기독교는 다원주의를 거부하고 다른 종교와는 대화를 할 수 없고 협력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오직 예수만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고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믿는다.

저자는 이렇게 제도화되고 교리화된 예수를 거부한다. 권위와 권력을 가진 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가르쳐진 예수의 세례를 받은 것은 버리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 것을 듣고 배운 것을 생각없이 수용하지 말고, 정말 내가 예수를 믿고 의지할 수 있고 이분을 따라갈 수 있는지 고민하고 질문하라고 한다. 누군가 가르쳐준 예수가 아니라 내가 아는 예수, 내가 믿는 예수를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제도와 교리에 갇힌 예수를 벗겨내고 철학자 예수를 소개한다. 역사 속에서 교회와 전통에 갇힌 예수를 구출하여 그분이 가르쳐준 삶과 사상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철학자 예수’라는 것은 예수가 우리에게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을 가르쳐주고 그런 영광스러운 삶으로 초대하였기에 철학자라고 저자는 이름을 붙인다.

모두가 함께 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예수가 우리에게 제시하였다는 것이다.

정말 그러한가? 

필자는 저자의 말을 동의하는 면이 있고 귀 기울여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저자가 쓴 책을 본서까지 네 권(코즈모폴리터니즘과 종교, 용서에 대하여, 정의를 위하여)을 읽었는데 정말 유익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저자의 공부가 깊이가 있고 어려운 개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소개한다. 무엇보다 저자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독자에게 강요하지 않고 평소 그의 주장처럼 한 인간-동료로서 독자를 대하며 독자가 자신을 전적으로 다 믿기보다 생각하고 고민하여 더 좋은 길을 찾기를 제안한다.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저자들은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고 문제를 제기하면 불쾌해 하고 귀를 막기 마련인데 저자는 정말 독자를 동료-인간으로 대하며 함께 더 나은 길을 고민한다. 이것만 보아도 저자는 말만 하는 자가 아니라 실천하는 자이고 행동하는 자이다. 교수이니 배울만한 자가 아니라 인간으로 충분히 배울만한 자라는 생각이 든다. 필자도 목사지만 저자처럼 내가 하는 말을 무조건 믿도록 하기보다 성도들에게 자신의 생각과 삶으로 치열하게 고민하고 기도하는 자로 안내하고 싶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예수를 과연 철학자로 규정하는 게 맞는지 의문을 가져본다. 물론 저자가 그렇게 정의한 의미와 마음과 목적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럼에도 구원자 예수보다 철학자 예수가 부각되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뒤집는 것 같다. 저자는 오히려 철학자가 예수가 말하고 가르친 본래적인 교훈에 더 적합하다고 주장하지만 필자는 예수가 말한 것은 총체적인 구원에 가깝기에 구원자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통해 세워진 교회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수많은 이단들과 사이비들을 대상으로 변론하고 변증하며 진리를 지켜왔다. 그 과정 가운데 정치적인 압력과 권력의 개입이 있었지만 교회가 세워지고 진리가 체계화되는 것을 인간의 의도보다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야 하지 않을까. 여러 가지 방해와 위협에도 교회가 제도화되고 교리가 확립된 것은 인간의 악함보다 하나님의 선함이지 않을까. 교회의 존재와 신론과 기독론과 성령론 등 이런 진리들은 하나님의 역사와 인도로 인해 세워지게 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역사적인 진리들을 인정하지 않는듯 했고, 이런 발언은 위험해 보였다. ‘예수가 과연 지금의 제도화된 교회를 알고 있었을까’라며 저자는 질문한다. 물론 교회답지 않은 모습과 예수의 말씀과 어긋나는 모습을 보며 그런 의문을 던질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구약에서부터 교회를 말하고 있고 신약은 ‘예수의 피로 세워진 교회’라고 정의하며 그분은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고 한다. 우리가 그분의 뜻과 삶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하는 것이지 제도 교회 자체를 예수는 원하지 않았다는 것은 지나친 주장 같았다.

이에 더하여 예수는 교회를 통해 당신의 사역과 구원을 이루어가길 원하셨다. 물론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제도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소원이다.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큰 일을 이루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점은 언급하지 않고 단지 더 나은 삶을 위한 철학자로 예수를 보는 것이 예수의 정신과 삶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한다.

죄의 문제는?

요즘 시대에 기독교는 혐오와 배제와 차별의 상징이 되었다. 인종과 성별과 젠더와 종교와 지역 등을 마주할 때마다 아주 공격적이다.

필자 또한 기독교와 교회의 무자비하고 공격적인 모습을 반대하고 저항한다. 사랑과 용서의 종교이며 사람을 억압하지 않고 자유를 주는 정신을 망각한 기독교를 볼 때 답답함을 금하지 못한다. 이념에 종속되어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여전히 십자군 정신과 마녀 사냥과 희생양을 찾는 기독교를 보면 아직도 갈 길이 먼 것 같다.

그래서 저자는 용서를 말하고 환대를 말하고 평등과 정의를 논한다. 예수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정신과 가치를 소개하며 우리 또한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고 촉구한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님이 다가가 만나주신 것처럼, 삭개오를 한 인격으로 대우해 주신 것처럼, 선한 이웃이 되었던 사마리아인처럼 우리도 그렇게 한 인간을 멸절성을 지닌 자가 아니라 탄생성을 지닌 자로 대하고 세상을 평화롭게 해야된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저자의 이런 정신과 가르침에 동의하고 이런 개념들을 더 배우고 익혀서 교회에 더욱 잘 전하고 싶다. 나의 가르침과 설교에도 이런 것들을 잘 녹여서 더 풍성하게 진리의 전달자로 살고 싶다. 저자의 넓고 깊은 공부를 앞으로도 더 배우며 이런 사상과 철학들을 습득하고 싶다.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 싶고, 교회에만 갇힌 진리가 아니라 교회 밖을 향해 뻗어가는 진리가 되길 원한다.

그러나 저자에게 찾아볼 수 약점은 이런 지침과 방향은 좋으나 죄의 문제를 지적하고 해결하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인간과 사회에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죄의 문제이다. 용서와 환대와 평등과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계획력과 실천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이기심과 본성의 악함과 마음의 병듦으로 인해 그런 것을 이루어갈 수 없는 것이다. 한 개인이 얼마나 죄로 물들었는지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다.

용서와 환대를 아무리 말한다고 그것이 실천되는 것이 아니다. 영향을 받을 수 있겠고 좋은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근본적인 마음의 죄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런 삶은 실천할 수 없다. 자기중심성과 자기사랑이 해결되지 않으면 이런 삶의 방향으로 수정되지 않는다. 내 안에 죄 죽이기가 있을 때 예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예수의 삶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데, 이런 죄의 해결이 우선이지 않을까.

또한 사회와 국가도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죄의 문제가 있다. 악하고 나쁜 것을 더 견고히하는 악한 세력과 악의 무리가 있다. 이런 죄를 폭로하고 해결이 될 때 묶여있던 것이 풀려지고 엉켜있던 것이 바르게 될 수 있다. 죄의 세력은 지금도 법과 기업과 시스템과 체제 등 다양하게 역사한다. 그래서 집단적으로도 사로잡고 마비시키는 죄의 세력을 향한 은혜의 선포가 먼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만 있는가?

저자는 하나님 나라를 가르친다. 이 나라는 차별과 폭력과 불평등과 억압과 혐오가 없이 모든 인간이 존재만으로 인정받고 존중받는 생명과 평화가 가득한 곳을 의미한다. 그런데 저자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이라고 한다. 물론 필자도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곳만을 말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죽어서 천당가는 것만이 아니라 오늘 여기서 그날처럼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인간의 존엄이 지켜지는 나라말이다.

이런 하나님 나라 개념은 성경적이고 바른 것이다. 예수도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여기에 임했다고 선언한다. 지금 여기가 하나님 나라, 예수와 함께 하는 곳이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이런 하나님 나라 개념이 우리로 하여금 현실에서 더욱 신실하고 진실하게 살게하고 책임감 있는 성도가 되게한다. 예수 잘 믿고 죽어서 천국 가야지가 아니라 여기서 예수 잘 믿는 성도로 예수의 뜻을 따라 살게하는 바른 방향이 된다.

그러나 저자는 죽어서 가는 하나님 나라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 과연 성경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이라고만 제한하는가,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성도가 죽은 후 가는 공간의 개념으로도 분명히 말하고, 성경은 하나님 나라는 성도가 이 땅에서 사명을 다한 후 하나님을 직접 뵙고 하나님 품에 안기는 곳으로 설명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게으른 성도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신실하고 인내하는 성도로 살게 하고, 이 땅에서도 정의와 평화를 위해 살게 한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두 강도 중 한 명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며, 죽기 일보 직전에 당신의 나라에 이르실 때에 나를 기억해 달라고 한다. 예수를 위해 단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던 자가 마지막 순간에 간절한 기도를 하고 주님의 뒤를 따라 천국에 입성한다. 여기서 강도가 죽어서 간 곳은 어디이고, 예수에게 나를 데려가 달라고 했던 곳은 어디인가? 예수님도 대답하길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고 응답하셨는데, 그 낙원은 이 땅인가?

그리고 사도행전에 보면 스데반 집사는 복음을 전함으로 돌에 맞아 죽는 순교를 한다. 그 순간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보는데, 그때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있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가 말하길 하늘이 열리고 예수가 보좌 우편에 있는 것을 본다고 한다. 여기서 스데반이 본 것은 단지 환상이고 꿈인가? 고통 중에 헛 것을 본 것인가? 그는 분명히 하나님 나라를 보았고, 그곳은 믿음의 선배들이 예수를 믿고 살다 죽어서 가는 곳임이 분명하다.

기독교의 고유성

현 시대에 나타나는 교회의 모습이 참 안타깝다. 배제와 혐오와 차별에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면 예수의 정신과 삶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집단 같다. 특히 이슬람과 동성애와 여성안수 문제만 떠오르면 헤롯과 빌라도가 원수였으나 예수를 죽이려고 하나가 되듯이 모든 보수들은 한 팀으로 결집한다. 그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고 내부적으로는 썩어서 곪을대로 곪은 문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 안건만 나오면 맹공격이 시작된다.

그 외에도

난민 문제와 인종 차별 문제, 성소수자 차별 문제, 장애인 차별 문제, 사회적 약자 문제, 전쟁 문제 등 다양한 차별과 혐오 사안에 있어서 교회가 앞장 서고 있다. 어느 집단보다 배고픈 자와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와 고통당하는 자를 보살피고 살펴야 하는 교회가 가장 차별하고 배제하고 혐오하는 집단이 되었다. 예수는 그런 자들을 위해서 살았는데 교회는 그런 자를 오히려 적대시하고 있다.

또한 인류가 겪는 많은 문제들을 보면 환경 위기, 경제의 위기, 정의의 위기, 인권의 위기, 난민 문제 등 다양한 사안들이 있다. 그래서 저자는 이런 위기의 시대 가운데 교회는 예수의 삶을 따라 환대와 사랑과 평화의 삶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필자 또한 저자의 이런 문제의식과 생각과 주장에 동의한다. 교회는 예수가 우리에게 친히 보여준 정신을 추구하고 몸소 보여주신 삶의 길을 이어가야 한다.

그러나 예수가 하늘에서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인류를 구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를 구조하기 위해서다. 환대와 용서와 평화를 추구하는 것은 멋있지만 예수는 그것만을 하는 분이 아니다. 물론 기독교가 위와 같은 가치를 추구해야 하지만 이것은 다른 모든 종교도 다 하는 것이고 인류의 공통 목표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기독교가 이런 일을 할 수 있고 당연히 해야하지만 이런 것이 기독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기독교가 도덕과 윤리와 인륜의 가치로 특징되어지는 것이 바른 것인가?

교회는 이 시대의 아픔과 눈물에 반드시 공감하고 들어주고 치유의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고유성은 이런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이 시대를 위해 존재하지만 전 시대를 위해서도 존재한다.

예수는 이 시대 안에서도 일하지만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분이다. 그래서 이런 인류 보편의 가치로 예수를 정의하는 것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수준이다. 예수는 역사의 주인이시고 지금도 섭리하시며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는 특징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나?

교회에서 제일 위험한 것 중 하나가 성도를 종교화시키는 것이다. 성도 한 명이 정말 예수를 깊이 만나고 주님을 사랑하여 그분이 원하시는 삶으로 변화되어야 하는데, 눈에 보이는 형식적인 것들을 수행함으로 믿음이 좋은 것처럼 길들여진다. 성도는 교회에 등록하고 출석과 헌금을 잘하는 것으로 되는 게 아니라 심령이 변하여 예수를 구주로 모시는 것인데 성도의 기준이 변질되었고 이것은 교회의 종교화이다.

이런 종교화를 부추기는 것은 교회의 타락이다. 종교적인 사람이 되면 자기가 우선이 되고 기준이 된다. 하나님이 계시해 준 말씀과 법도를 따라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욕망과 소원과 기준을 따라 교회 생활을 한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살이 떨리고 마음이 찔리는 경험이 없어진다. 주님의 음성 앞에 영혼이 쪼개지고 영적으로 각성되는 일이 없다. 말씀에 집중하기보다 욕망에 집중하고 하나님은 안다고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없다.

이렇게 되면 자기의 믿음을 예배 참여와 헌금 액수와 기도 시간과 새벽 기도와 큐티 횟수 등으로 증명한다. 주님과 친밀하게 교제하고 주님을 만나며 마음으로 변화되어 삶이 새롭게 되는 믿음이 아니라 기독교의 형식과 교회의 전통을 따르는 믿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와 다르거나 나처럼 하지 않는 자를 향해 정죄하고 비난하고 비판한다. 이렇게 욕망의 극대화가 되고 타자를 적대화 하는 것이 바로 종교화이다.

필자는 저자가 주장하는 환대와 용서와 평등과 정의의 길을 교회가 당연히 교회가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교회의 모습이고, 교회 또한 이렇게 실천해야 한다고 동의한다. 그러나 이것이 또 하나의 종교화가 될 수 있는 위험도 있지 않을까. 영혼의 거듭남이 없는데 삶의 거듭남만 강조하고 내면의 변화는 없는데 삶의 변화만 강조하는 것은 우선순위가 뒤바뀐 것 같다.

어쩌면 위와 같은 주제는 도덕과 윤리와 철학인데 이런 기준으로 교회를 정의하는 것은 불안해 보인다. 교회는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보다 들을 수 없는 진리를 들려주는 곳이다.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영적 경험을 하는 곳이다. 세상의 가치관과 질서에 순복하는 곳이 아니라 그 가치관과 질서를 전복하는 곳이다. 세상에서 치열하게 사는 자들이 이곳에 오면 영적인 쉼과 안식을 누리는 곳이다.

그런데 교회가 이 시대가 원하는 가치와 주제들을 우선시한다면 이것만을 추구하는 교회가 되지 않을까? 예수는 인류를 구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조하기 위해서 오신 분인데 그분의 목적이 흐려지는 것 같다. 교회는 물론 삶의 혁명이 일어나는 곳이다. 그러나 영혼의 혁명이 먼저 일어나는 곳이다. 그 영혼의 변화로 인해 삶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교제하고 동행하며 세상을 주님의 사랑과 진리로 충만하게 하는 곳이다.

결론

기독교는 이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고 세상을 이롭게하지 못하는 기독교는 무가치하다. 기독교는 이 사회에서 홀로 존재하지 않고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더불어 함께 잘 살아가는 길을 제시해야 한다. 그게 기독교가 추구하는 방향이고 예수가 보여주었던 정신과 삶의 길이다. 그런 면에서 교회는 제도중심적이고 교조주의적인 모습을 벗고, 영혼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길을 걸어가야 한다.

교회는 종교개혁의 가치를 따라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 것인가? 여기 저자의 글을 통해 우리는 치열하게 고민하고 씨름해 볼 수 있다. 필자는 저자의 주장에 백프로 동의하지 않아서 몸글에서는 좀 비판적으로 썻지만 결론으로는 이 책을 함께 읽고 회개하고 씨름하자고 반전의 메시지를 던지고 싶다.

교회는 인류 보편의 가치와 공동선을 추구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에게 외면당하지 않고 우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그것을 잘할 수 있도록 우리를 구원하고 있다. 많은 전문가들이 앞으로 교회의 수는 줄어들고 교회는 쇠퇴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과연 그럴까? 사회는 더 병들고 뒤틀리고 그 안에서 고통당하고 억눌린 자들은 더 많아질틴데 그들은 무언가를 갈망할 것이고 위로를 얻기 위해 어디론가 달려갈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 사회의 병을 고쳐주고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을 공감해 주는 곳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교회가 쇠퇴할 것이라고 하지만 교회의 역할이 더 커지는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교회는 이 땅에서 죄를 해결하고 영혼을 새롭게 하는 곳이다. 세상을 따르고 세상을 닮아가는 곳이 아니라 주님을 배우고 주님을 닮아가는 곳이다. 영혼의 변화와 회심을 충분히 경험하고 영적인 쉼과 안식을 이곳에서 얻어야 한다. 이것과 함께 교회는 저자가 말하는 것을 따라 예수가 지향했던 삶과 나라를 바라보아야 한다.

어쩌면 저자의 주장이 나의 교회론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 견고하게 하는 느낌도 든다. 더 온전하고 좋은 길로 가기 원하는 저자의 마음에 나의 마음도 연결시켜 본다.

이 글은 방영민 목사의 허락을 받아 페이스북에서 옮겨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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