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4일까지, KOSTA/USA 집회가 ‘THE STORY, 하나님나라’ 주제로 시카고 Wheaton College에서 열렸습니다. 주제 강의에 대한 리뷰와 강사 인터뷰를 6회에 걸쳐서 연재합니다. KOSTA운동에 대한 역사와 미래를 함께 조망해 봅니다. -편집자 주-

 

               2024 KOSTA/USA에서 강의하고 있는 노승환 목사 @ 코스타 제공
               2024 KOSTA/USA에서 강의하고 있는 노승환 목사 @ 코스타 제공

“낮의 사람 사마리아 여인과 밤의 사람 니고데모 남자”

<요한복음>은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함께 읽도록 구성해 놓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쉽게도 두 사람은 서로 만나거나 ‘썸’을 타지는 않습니다. 앞의 강의에서처럼, 룻이 보아스를 만나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펼쳐가거나,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를 만나서 애틋한 사랑을 이루어가는 이야기는 기대하지 말아 주십시오. 하지만 밤의 남자 니고데모도 예수님을 만나서 매우 흥미진지한 하나님나라 스토리를 이어갑니다. 

<요한복음>은 전체를 크게 두 개의 책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장의 프롤로그와 21장의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2장에서 12장까지를 ‘표적의 책’이라 하고, 13장에서 20장까지를 ‘영광의 책’이라고 부릅니다. 표적(sign)이라고 하는 의미는 그 사건이 ‘무엇인가’를 가리키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무엇인가는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말합니다. 요한복음은 '표적의 책'에서 7가지 기적 이야기를 소개하고, 그 사건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자가 표적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이렇습니다. 먼저 하나의 표적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단락에서는 그 사건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 부연 설명을 이어갑니다. 첫 번째 표적 이야기로,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사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밤의 사람 니고데모와 낮의 사람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해석해 줍니다. 두 이야기를 통해서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 대한 메타포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려줍니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7번째 신랑이 됩니다. 성경에서 숫자 7은 완전수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 여인의 마지막 사랑이 되며 ‘영적인 신랑’이 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서 드디어 완전한 사랑을 이루는 거지요. 그렇다면, 니고데모 이야기는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 표적에 대해서 어떤 ‘메타포’를 전달해 주고 있을까요?

<요한복음> 2장 6절에 보면, “유대 사람의 정결 예법에 따라 거기에는 돌로 만든 물항아리 여섯이 놓여 있었는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6개의 항아리에 이미 물이 채워져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물의 용도는 사람들을 깨끗하게 씻어주는 정결식에 사용될 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물은 혼인 잔치에서 아무런 역할를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메타포가 설명하는 바는 이제 더 이상 물로는 사람들을 깨끗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숫자 7은 완전수를 의미하며, 이 숫자에서 하나가 빠진 6은 불완전한 미완성의 수를 의미합니다. 무엇이 불완전한 것일까요? 유대교의 정결법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즉, 당시 유대교가 올바른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유대교의 정결예식으로는 더 이상 사람들을 깨끗하게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으로' 깨끗하게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6개의 항아리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킵니다. 옛 유대교에 담긴 항아리의 '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포도주'로 변화된 것입니다. 당연히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를 상징합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희생이 옛 유대교를 갱신하고, 모든 유대 사람들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밤의 사람 니고데모는 6개의 항아리에 담긴 옛 유대교를 상징합니다. 이제 그가 예수님을 만나서 옛 항아리에 담긴 유대교의 '물'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포도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니고데모의 하나님나라 스토리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세 가지 방향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표적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설을 위해, 예수님이 성전을 파괴하는 이야기,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간 이야기,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 등을 연속해서 들려줍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파괴하는 이야기는 옛 유대교의 성전이 허물어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로운 하나님나라 성전이 세워진다는 스토리입니다. 그런 다음에 이어지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새로 세워진 하나님나라에 누가 들어갈 수 있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밤의 사람 니고데모와 낮의 사람 사마리아 여인은 서로가 절대로 만날 수 없는 양 극단의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이렇게 양극단의 두 사람 이야기를 함께 들려줌으로써, 세상의 사람들 중에서 그가 누구이든지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누구이든지간에, 그 사람의 하나님나라 이야기가 곧바로 시작됩니다.

“니고데모는 왜 밤에 찾아왔는가?”

니고데모는 어떤 사람입니까? 유대 사회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는 권력자입니다. 당시 유대교를 대표할 수 있는 충분한 사람입니다. 바리새파 신분이면서 산헤드린공의회 지도자였습니다. 그의 이름 자체가 ‘백성을 다스리는 자’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밤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왜 굳이 밤에 찾아왔을까요? 자신의 체면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아무것도 없는 청년 예수를 만난다는 사실이 뭔가 불편했겠지요.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밤’의 이미지는 이러한 차원을 훨씬 넘어섭니다.

높은 자리에 있던 니고데모가 쳥년 예수를 만날 때는 당연히 창피함과 수치스러움이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에게는 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의 내면과 정신 상태는 깊은 '어둠’에 갇혀 있었습니다. 캄캄한 ‘밤’이었던 거지요. 그는 최고의 학식과 권위를 갖고 있었지만, 실상은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지 못했습니다. 유대교의 율법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니고데모의 실존에 대해, '그가 흑암 속에 있으며, 어둠에 속한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 놓여 있던 물항아리 6개에 비유됩니다. 또한 장사꾼들의 집이 되어버린 성전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그런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나라의 일을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겠지만, 실상은 예수님에게 어떤 칭찬과 인정을 받고자 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니고데모를 아주 냉정하게 대했습니다. 그에게 찬물을 끼얹듯이 매몰차게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 3:3) 예수님은 그가 아직은 땅의 사람이며, 어둠에 속해 있다고 말했습니다. 표적을 본다고 해서 곧바로 ‘예수가 누군인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진심을 담아서 질문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태도만으로 진리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마음 깊숙히 ‘공허함’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유대교 안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태어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첫 번째 표적인 혼인 잔치 이야기를 해설하는 본문에서, 니고데모는 사마리아 여인과 짝을 이루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유대교 전통에서 니고데모는 최고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며, 사마리아 여인은 그와 반대로 가장 낮고 천한 신분의 사람입니다. 더구나 당시 사회에서 여자는 인구 조사를 할 때, 숫자에도 포함되지 않았으며, 법정에서 증언할 자격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무엇보다 구약의 시내산 언약체계 하에서 니고데모는 최상의 자리에 있는 율법학자이며, 사마리아 여인은 이방인 여자로서 가장 낮은 자리에 위치한 인물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이름이 있지만, 이 여인은 무명의 사마리아 여자일 뿐입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중심부의 남자인 ‘인싸’와 주변부인 여자의 ‘아싸’를 명확하게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그가 어떤 신분의 사람이든지 어떤 존재이든지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노승환 목사 @ 코스타 제공 
노승환 목사 @ 코스타 제공 

“니고데모는 다시 태어났을까?”

여러분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더 가까운 사람인가요?” 자신의 상황에 따라 어떤 분은 니고데모의 내면적인 갈등에 더 가까울 수 있고, 또 어떤 분은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자신의 삶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삶의 여정에서 그 입장이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때와 지금의 내 모습은 언제든지 다를 수 있지요. 제가 그랬습니다.

저는 중학교 때 미국으로 이민을 왔습니다. 그리고 저의 가족은 15년 넘게 서류미비자 신분으로 살았습니다. 미국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계층입니다. 경찰차만 눈에 띄어도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이때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너무나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나의 모든 과거를 숨기고 싶었습니다.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흑인 동네에서 자랐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에 일 년을 휴학하면서까지 부모님 가게 일을 도와드렸습니다. 교회에 가서도 나 혼자 외톨이 신세였습니다. 주차장 한 구석에서 개미 숫자를 세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청년부 형과 누나들이 그런 나를 발견하고, 고등학생이지만 청년부로 데려갔습니다. 거기서는 제가 뭘 해도 예쁘게 봐 주었습니다. 기타 코드를 두 개밖에 모르는데 찬양 인도도 시켰습니다. 형과 누나들을 통해서 깊은 사랑을 느꼈습니다. 그 사랑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니고데모와 같이 깊은 내면의 갈등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중년의 나이를 훌쩍 넘었고, 어느 누구도 나에게 “너그 아버지 뭐하시노?” 혹은 “너 몇 살이야?”라고 묻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전혀 주눅이 들지 않습니다. 그래도 제가 교회에서 담임목사직도 갖고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 아닙니까? 저희 교회에 당회도 있고, 제가 당회장입니다. 만약에 <요한복음>의 저자가 저를 모델로 기록했다면, 3장 1절을 이렇게 표현했을 것입니다. “장로교파 사람 가운데 노승환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당회원이었다.” 이쯤되면 저도 교회에서 나름 기득권 세력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전에는 복음서를 읽을 때,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막 혼내시는 장면에서 엄청 통쾌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게든 바리새인들을 변호해 주고 싶고, '뭐 다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라고 생각해 주고 싶습니다.

어떤가요? 누구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하십니까? 저는 우리 코스타 청년들이 니고데모와 같은 내면의 갈등과 아픔을 많이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주관적인 상상력입니다만, 여러분들은 최고가 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 왔지 않겠습니까, 또한 부모들의 기대가 얼마나 크지 않겠습니까? 바리새인이 엄숙하고 율법적인 집안에서 겪는 것처럼, 모태 신앙의 가정에서 얼마나 가슴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상황을 견뎌오지는 않았는지요. 사회에서 최고가 되면 답이 있지 않을까 하고, 막연한 기대를 하면서 여기까지 달려 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성경은 말하기를,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 왔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밤의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교회에서 안타까운 청년들을 만납니다.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유명기업에 취직했다가 일 년도 안 되서 그만 두고 집에 돌아와서는 집에만 있습니다. 심한 무기력증과 우울증에 걸려서 어떤 사람과도 만남을 회피하고 깊은 공허함에 빠져 있습니다. 자신이 최고가 될 수 없다는 두려움, 부모님을 실망시켜드릴까봐 하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서 결국은 삶 자체를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이 청년들은 그래도 어릴 때부터 교회 안에서 자라왔습니다. 저는 그 청년들에게 다가갔습니다.

저는 청년들에게 위로부터의 ‘다시 태어남’을 초대하고자 하였습니다. 예전에 했던 종교적 열심을 다시 더 열심히 하는 것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고쳐서 쓸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청년들에게 제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을 새로 만나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청장을 다시 전해주는 것입니다. 예전의 ‘물’로는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 올랐을 때 찾아오는 그 ‘공허함’은 근원적인 존재의 문제입니다. 니고데모의 고민에 귀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나라에서 맛보는 ‘의와 평화와 기쁨’은 세상의 최고 자리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밤의 사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새로 만나는 것뿐입니다.

여인은 확실하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사마리아 동네에 들어가서 그 기쁨을 증언하고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그 결과를 명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은 ‘은근하게’ 뉘앙스만 전할 뿐 직접적인 설명이 없습니다. ‘아마도’ 그는 변화되었음을 요한복음의 다른 본문에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는 있습니다. 그는 산헤드린공의회 재판에서 유일하게 예수님을 변호하였고, 십자가 처형 이후에 누구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큰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의 장례를 치루어 준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니고데모의 하나님나라 스토리입니다. 성경은 코스타 청년 여러분들을 초청합니다. 코스탄 여러분,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의 기쁨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니고데모의 이야기가 코스타 청년들의 하나님나라 스토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노승환 목사는 매릴랜드 Towson대학교를 졸업하고, 버지니아 리치몬드 유니온신학교에서 목회학 석사를 마쳤다. 나성영락교회 교육목사를 거쳐 토론토 밀알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했다. 현재는 뉴저지 찬양교회 담임목사를 맡고 있다.

 

저작권자 © 미주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