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우선, 이야기의 의미에 대해서부터 말해 보자. 이야기 하나가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오면, 그 이야기는 우리 안에 씨를 심고 자라나고, 우리를 형성하고 우리 삶을 만들어간다. 어떤 이야기를 품고 사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이처럼, 이야기가 한 사람의 삶에 끼치는영향은 어마어마하다. 어떤 인생을 사느냐 하는 것은 어떤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제임스 브라이언 스미스라는 분은 이렇게 말했다. "삶을 내맡길 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는 몇 개의 간단한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그 이야기는 아름다운가, 선한가, 그리고 진실한가?" 누군가의 마음 속에 심겨진 이야기가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라면, 그 사람은 자신의 인생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낼 것이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그가 속한 공동체에서 다시 싹이 트고, 보다 넓은 사회로 뻗어가서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고, 세계의 지평으로 확대되어 '아름다운 히스토리'가 될 것이다.
그 다음, 아름다운 게 대체 뭘까? 시인 정호승은 이렇게 말했다. "밥알은 밥그릇에 있어야 아름답지, 얼굴이나 옷에 붙어 있으면 추해 보인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이 아름답다는 말이다. '아름답다'라는 말은 아름과 답다의 합성어다. 아름은 '나'를 가리킨다는 학설이 있다. 그렇다면, '아름답다'는 말은 '나답다'라는 의미가 된다. 나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이고, 나다운 이야기가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하나님나라 이야기는 무엇일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 모든 만물과 생명이 제자리에 있고, 그것들이 모두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었다는 말이다. 세상의 아름다움은 언제 깨지는가?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할 때다.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다른 사람을 차별하고, 생명의 질서를 무너뜨릴 때, 태초에 창조된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만다. 아담이 범죄하고 숨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물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이 인류에게 던진 최초의 질문이다. 이 말은 아담이 어떤 '장소'에 있느냐를 물은 것이 아니라, 너가 지금 어떤 '자리'에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사람의 자리를 벗어난 아담의 모습은 더 이상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하나님나라의 아름다움은 모든 것이 '창조되었던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본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나라 이야기다. 이 하나님나라 이야기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성경 이야기가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희년'이다. 희년이란, 하나님이 7일째 날에 창조하신 '안식'이 일주일마다 쉬는 최초의 절기로 시작하여, 땅은 7년에 한 번 일 년 동안 쉬고, 이 안식년을 7번 반복하여 49년이 지난 다음해인 50년째에 '뿔나팔'(Jubilee)을 부는 절기의 완성을 말한다. 이 뿔나팔을 불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희년"
첫째는 노예 해방이 실시된다. <레위기>는 25장 10절에서 희년을 이렇게 설명한다. "너희는 오십 년이 시작되는 이 해를 거룩한 해로 정하고, 전국의 모든 거민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누릴 해이다. 이 해는 너희가 유산 곧 분배받은 땅으로 돌아가는 해이며, 저마다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해이다." 사람이 살다가 가난해지면 빚을 지게 되고, 이후에 빚을 갚지 못하면 자기 땅을 팔거나 아니면 누군가의 종이 되어 팔려가게 된다. 그런데 희년이 선포되면, 그때까지 진 빚을 다 갚지 못했을지라도 팔았던 땅을 다시 돌려받게 되고, 종살이를 하고 있다면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어 자기 가족에게로 돌아가게 된다.
두 번째는 땅의 해방이 실현된다. 희년은 사람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땅도 원래 대로 돌아간다. <레위기> 25장 23절은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다만 나그네이며, 나에게 와서 사는 임시 거주자일 뿐이다." 이스라엘 율법은 땅을 팔 수는 있으나 아주 팔 수는 없었다. 땅은 애초부터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땅을 팔게 되었어도, 50년째 해가 되는 희년이 되면 땅은 원래 맡았던 사람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땅이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모든 것이 원래 대로 회복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다. 부유하게 살던 우리 집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해, 하루 아침에 단칸 방 신세로 내몰렸고, 신나게 뛰놀던 잔디밭 정원은 눈 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이후에, 아버지는 끊임없이 노력하셨지만 끝내 재기하지 못하셨고, 다시는 잃어버린 그 땅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만약에 단 한 번만이라도 희년이 있었다면, 아버지의 삶은 어땠을까? 인류 역사에서 희년이 실현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왜 성경은 희년을 지키라고 가르치는가? 나는 얼마 전에 인생 처음으로 집을 장만하게 되었다. 이후의 삶이 얼마나 행복하고 뿌듯한지 모른다. 그런데 만일, 저 하늘에서 희년의 나팔소리가 울리며, 당장 내일부터 그 집을 비우고 나가라고 한다면, 나는 이러한 상황을 꿈에서조차 상상하기가 싫다. 한 인간의 욕망이 이럴할진대 어떻게 현실에서 희년이 실현될 수 있겠는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 희년”
1986년, <시인과 촌장>이 ‘풍경’이라는 노래를 발표하였다. 나는 이 노래의 가사말을 너무나 좋아한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이 반복해서 흘러나온다.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간다면, 이 세상의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울 것이다. 전쟁과 폭력이 사라지고, 불평등과 가난이 없어지고, 질병과 고통이 치유되는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시인의 노래일 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직접 들려주시고 보여주셨다. 그는 <이사야> 성경을 펼쳐서 희년을 가르치셨고, 유대 온 땅을 다니시면서 희년의 삶을 실천하셨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렸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셔,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 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셨다”(누가복음 4장 18-19절).
우리는 희망의 끈을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과거의 실패를 아무리 극복하려고 해도 안 되고, 지난 날의 잘못을 돌이키고 싶은데 도저히 방법이 없고, 만약에 인생에도 리셋 버튼이 있다면 그 때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고 싶은데, 혹시 그런 분이 계시지 않나요? 삶이 망가져버렸는데, 가족과 친구의 관계도 다 깨져버렸는데, 사회는 엉망진창으로 흘러가고, 지구마저 병들어서 돌이킬 방법이 없어 보이는데, 이제는 희망을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나요?
이처럼 희망의 끈을 놓아버리고 싶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희년을 통해 보여주신 그 아름다운 이야기다. 사람도 땅도 동물도 식물도, 온 우주 만물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는 그 하나님나라 이야기 말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예수님은 우리가 떠났던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해 주신다. 예수님은 희년을 선포하고 실행하기 위해서 오셨다.
희년은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현대에서 노예는 어떤 사람들일까? 신분 상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생존권과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닐까. 오늘날 이러한 사람들은 세계 곳곳에서 넘쳐난다. 그리스도인이 따라가야 할 방향은 명확하다. 예수님의 삶과 희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이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빵과 생명을 주셨고, 식민지 포로들을 해방시켜 주셨고,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들을 일깨워서 밝은 세상으로 인도해 주셨고,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는 모든 백성들을 해방시켜 주셨다.
“미주 KOSTA는 희년 운동이다”
코스타는 운동이다. 고정화된 단체나 조직이 아니다.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계속 움직이며 나아간다. 내가 코스타를 대표하지는 못하지만, 매년 코스타에 올 때마다 느끼는 감동이며 고백이다. 이러한 코스타를 있게 하고 움직이는 원동력은 ‘간사들’ 덕분이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활동한다. 한국사회의 이슈들을 늘 살피고 성찰한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들을 현장에서 실천하고 있는 분들을 찾아내어 KOSTSA의 강사분들로 초청한다. 이러한 노력들로 인해, 미주코스타에서만 들을 수 있는 메시지와 내용들이 항상 준비되어 있다. 미주 청년들이 코스타에 와서 함께 듣고, 토론하고, 고민하고, 성찰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삶의 현장으로 나아가 예수님이 하신 하나님나라 운동을 이어간다고 생각한다.
코스타의 미래는 계속해서 ‘간사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수십 년간 헌신해 오신 간사들을 이어서, 또다른 청년 간사분들이 계속 나오기를 바라고 있다. 최근 몇 년간의 코스타 모임을 돌아볼 때, 나는 매우 긍정적으로 기대한다. 그 이유는 20대 청년들이 많이 오기 때문이다. 아마도 미주 지역의 교회들이 청년들에게 주지 못하는 어떤 비전과 사상을 코스타가 어느 정도는 채워주지 않는가 생각한다. 앞으로 미주 전역에서 청년들이 계속 찾아온다면 코스타의 미래를 밝을 것이다.
미주코스타는 과거의 한인유학생 모임이 더이상 아니다. 미주에서 한인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는 기독 청년의 모임이다. 이곳에서 하나님나라를 이루어가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운동이 되어가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와 한계들에 대해서, 미주 코스타 운동이 대안적인 비전과 메시지를 낼 수 있지 않을까, 미주코스타 운동의 한 일원으로서 많은 기대를 갖고 있다.
손태환 목사는 <시카고기쁨의 교회>를 섬기고 있다. 미국종교사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신학을 시작한지 20년 만에 목사가 되었다. 이민 목회자로서 15년 이상 활동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