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여객기 추락사고로 숨진 분들의 이야기가 하나둘씩 기사로 나오고 있다. 참으로 기막힌 내용들이다. 사실 사고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 모두의 인생은 그렇게 기막힌 인생이다. 그래서 우리는 잘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의 화두는 어떻게 살 것인가가 되어야 한다.

내 경우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그것을 찾았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죽음 이후에 어떤 곳에 가느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곳에서 살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토록 명료한 복음의 메시지를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허투루 듣는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은 보기 어렵다. 모두가 자기와 자기 가족이 잘 사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그것이 “이 모든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이들은 없다.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보는 것처럼 돈만을 바라보며 하루살이 인생을 살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내 말에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주장을 하고 싶을 것이다.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자신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를 구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주장과 함께 그 근거를 제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라는 단어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서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하나님이 가장 먼저가 아니라면 그것은 무익하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은 명목상으로만 그럴 뿐 실제로는 가장 먼저가 아니다. 여기서 인간의 합리화할 수 있는 능력은 가히 전능함을 과시한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신이 하나님을 가장 우선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주장을 하는가.

오래 전 일이다. 한 오지 국가를 위해서 자신이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선교사 후보생이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을 기정사실로 알았다. 그리고 마침내 소정의 교육기간을 마치고 말했던 그 국가를 방문하게 되었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 나라에 들어가 며칠을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생각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화장실이었다. 그는 그곳의 화장실에 적응할 수 없었다. 낭패였다. 얼마나 사소한 부분인가. 그러나 그는 그것을 극복할 수 없었고, 그것을 자신의 가족들에게 요구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이제까지의 자신의 말을 뒤엎고, 그 나라의 선교를 포기했다.

“그리고 곧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께서 사십 일 동안 광야에 계셨는데, 거기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의 시중을 들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시험이 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도 그러셨던 것처럼 당신의 백성들을 시험하신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시험을 받으셔야 했다. 물론 예수님은 그 시험을 통과하셨다. 모든 그리스도인들 역시 성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탄의 시험이 있다. 위의 선교사 후보생은 그 시험에서야 비로소 자기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좋은 옷을 입고 가난한 사람을 섬길 수는 없다." 얼마 전 본 어떤 사람의 글의 내용이다. 그러나 인간은 좋은 옷을 입고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면서 그것을 섬김으로 안다. 전형적인 자가당착이다.

얼마 전 한 사람과의 대화 중에 고급 차를 타고 다니며 하나님 나라를 전할 수 없다(그런 사람은 가짜)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 사람은 당시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내가 고급 차를 타고 다니며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목사를 폄훼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을 때 내가 하나님처럼 남을 판단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일이지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니고, 그런 판단을 하는 내가 은근히 나쁜 목사라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내가 다른 사람을 판단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내 주장이 틀렸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부자로 살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다. 복음이 가난한 자에게 전해진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자로 살면서 복음을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가. 부자도 복음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정말 복음을 들었다면 그대로 부자인 채로 살 수는 없다.

나는 삭개오의 기사가 바로 그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삭개오는 부자였지만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이 토색질한 것의 네 배를 사람들에게 갚았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삭개오가 매우 부자였기 때문에 그런 후에도 많은 재산이 남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삭개오가 정말 무일푼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재산 가운데 토색질하지 않은 부분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오늘날로 치면 완전히 파산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파산 가운데 복음이 주는 자유를 발견했다.

나는 나와 대화를 한 사람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아도, 그 사람이 한 말 중에 내가 은근 나쁜 목사였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인정한다. 나는 나쁜 목사다. 은근 정도가 아니라 매우 나쁜 목사다. 여러 면에서 그렇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내게 여전히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엘리트 의식이 남아있는 것이다. 오래 전 내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은 내게 늘 엘리트 의식이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 목사님이 오히려 열등감에 사로잡혀있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그런 내 생각도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내가 사로잡혀 있는 엘리트 의식을 순순히 인정한다. 그리고 이제는 그 능력을 비 능력으로만 사용하게 될 것이다.

이제 나는 그동안 내가 말해왔던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보여주는 사람으로 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지시한다. 그것은 도덕률이 아니다. 철학적인 당위성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매우 단순하다. 인용했던 성서의 구절에 따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조차도 단순화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는 말로 요약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 수 있었다. 그들의 그런 분위기를 다시 신자유주의체제 한 복판에 마련하려는 것이 내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모두의 인생은 소중하다. 그 인생을 여하히 잘 사느냐는 모두의 숙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 고민에 대한 답이다. 사람에 따라 그 모습은 다르겠지만 중심을 보시는 주님에 의해 그것은 모두 동일한 판단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날마다 묻는 질문이 있다.

오늘 죽어도 되는가? 아니 지금 당장 죽어도 되는가?

바울 사도 역시 이 질문에 답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감히 단언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하신 그 일로 내가 여러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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