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코우만 여사의 글 중에 재미있는 체험담을 기록한 내용이 있다.
그녀는 1년 동안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 나오는 것을 관찰했다. 번데기에서 나비가 되어 기어 나오는 구멍은 너무 작았다. 그 작은 구멍으로부터 큰 몸집을 빼내느라 오랫동안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안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도와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 그녀는 급히 가위를 가져와 구멍을 옆으로 조금 따주었다. 그랬더니 나비가 고맙다는 듯 퉁퉁 불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쉽게 빠져나왔다. 그녀는 큰 선심이라도 쓴 것 같은 만족감에 젖어 나비가 오색찬란한 날개를 펼치고 창공을 날아가기를 기다리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자신이 나비의 신세를 망쳐놓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큰 구멍으로 쉽게 빠져나온 나비는 날개를 질질 끌고 방구석을 기어 다니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작은 구멍을 빠져나오는 긴 시간의 몸부림, 이것은 꽃을 찾아 이 산 저 산 날아다닐 행복한 나비가 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과정이었다.
날개를 질질 끌고 방구석을 기어 다니는 나비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누구도 그런 나비를 정상적인 나비나 행복한 나비로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나비는 작은 구멍을 빠져나오는 힘든 과정을 지나야 했다. 그 힘든 과정은 환난이다. 지나야할 환난을 지나지 않아 나비는 나비가 되지 못했다.
나는 이런 나비의 탄생 과정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인의 탄생 과정을 떠올린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작은 구멍은 환난이다. 그리스도인은 환난을 지나야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이 위장된 축복이라는 말을 곧잘 하면서도 고난을 극도로 회피한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이 고난을 회피하게 해주는 수단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망설이지 말고 정직하게 대답하라. 그것은 돈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돈이 있으면 거의 모든 고난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생각해보라. 돈으로 거의 모든 고난을 피한 사람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이 상상이 가지 않는다면 어린아이를 생각해보라. 아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해결해주면 아이가 어떻게 되는가? 그래도 모르겠다면 오은영의 상담 프로그램을 시청해보라. 도저히 해결이 안 되는 아이들의 문제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즉각적으로 해결해준 것임을 발견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성서 역시 환난에 대한 강조가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또 돌짝밭에 뿌린 씨는 이런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곧 기쁘게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 속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 가지 못하고,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진다.“
가장 먼저 환난은 믿음을 시험하는 도구가 된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서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말씀을 배웠다고 교만해질 수는 있지만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되지는 못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환난을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씀은 환난이나 박해를 통과한 이후에 그 앎을 판단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환난을 자랑하게 된다. 그 이유를 로마서의 이 말씀은 잘 설명해주고 있다. 결국 소망의 사람이 된다는 것, 다시 말해 영원한 생명을 지닌 부활의 삶을 사는 사람이 된다는 것의 시작은 환난이다.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그런 희망을 보지 못한다. 그 이유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환난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시요, 온갖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이시오, 온갖 환난 가운데에서 우리를 위로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받는 그 위로로, 우리도 온갖 환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환난은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나는 어제도 내가 지난 극한 가난이 나를 업고 계시는 주님을 발견하는 영적인 체험의 시간이었다는 글을 썼다. 내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환난을 통해 하나님의 위로를 발견했다는 말과 동일하다. 잘 생각해보라. 오늘날 교회에서 참된 위로를 받지 못하는 것은 오늘날 교회가 맘몬의 신전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명백하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맘몬의 위로를 받는 곳이 되었다. 따라서 환난을 당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위로는 없다. 그들이 줄 수 있는 위로는 오직 맘몬이 줄 수 있는 위로밖에 없다. 이 명백한 오늘날 교회의 현실을 보지 못하는 것은 오늘날 교회가 환난을 극도로 회피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루어 줍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현세에 대한 시각을 제공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이 나그네와 순례자라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현세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시각은 그 정체성의 진위를 판단해준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이 줄 수 있는 평안은 물론 모든 것들이 피해야 할 장애물들이다. 성서는 단호하게 그것을 이렇게 말한다.
“죽은 사람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것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납니다.”
썩을 것을 심는다는 것은 현세의 안락과 즐거움을 바라는 육을 심는다는 것이다. 심는다는 것은 포기하거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연락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자원들을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돈을 포기할 때, 다시 말해 가난해지고, 돈을 미워하는 용도로 사용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수밖에 없고, 박해를 당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미움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그런 미움을 거절한다면 그들의 희망은 헛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난해질 것을 요구한다. 가난하면 환난을 당한다. 그러나 그 환난이 바로 구원의 방편이다. 나는 다시 환난을 자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이 시대에 보고 싶고, 만나고 싶다. 그들과 함께 창공을 독수리처럼 날고 싶다.
덧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죽음 이후의 세상을 믿지 않는다는 말을 하거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천국과 지옥은 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죽음 이후의 삶과 부활을 믿지 않으면 그리스도도 필요 없다. 그런 사람의 그리스도는 구원자가 아니라 철학자나 현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