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있던 것이 훗날에 다시 있을 것이며, 이미 일어났던 일이 훗날에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이 세상에 새 것이란 없다.”
오래도록 글을 쓰면서 늘 생각나는 말씀이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오래 전 쓴 글이 다시 반복된다. 내가 쓴 글의 내용과 거의 비슷한 다른 사람이 쓴 글이 있다. 다만 내가 모를 뿐이다. 내가 쓰는 글의 모든 내용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쓰는 글의 내용에 어떤 권위도 부여할 수 없다.
사실 내가 성숙했다는 가장 큰 증거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거듭 깨닫게 되는 것과 그러므로 내가 하는 모든 말이나 주장이 절대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인류의 일원으로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성령의 조명을 받아 우리 시대가 들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이미 일어났던 일, 다시 말해 역사에 주목하는 것이다. 물론 역사는 이기거나 힘을 가진 자의 입장에서 기록된다. 그러므로 그것을 넘어 그렇게 기록된 역사의 이면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성령은 그렇게 볼 수 있도록 역사를 조명하신다는 것이 내 경험이다. 그러므로 나는 성령의 조명과 인도하심에 예민하기 위해 늘 경성하면서 내 마음을 청소해야 한다.
이십여 년 전 봇물이 터진 것처럼 개신교 그리스도교를 장악하던 한 책이 있었다. <야베스의 기도>다. <긍정의 힘>이라는 책과 함께 그 책은 그야말로 스펀지가 물을 빨아드리듯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장악했다. 그 기도의 내용이 우리나라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그 책의 “지경을 넓혀주시고”는 부동산의 귀재들인 한국의 부자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쉽게 장악했고, 대형교회를 다니는 세련된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로 자리매김을 했다. 그들은 유창하게 야베스의 기도를 자신의 기도로 드렸다.
<긍정의 힘>과 함께 나는 <야베스의 기도>에 침몰하고 있는 한국의 개신교 그리스도교를 향해 나는 쓴 소리를 해야 했고, 사람들로부터 소외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이런 일을 내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 이어지고 있는 도도한 흐름이다. 만약 예수님이 예수님 당시 가르치시고 전파하던 것을 한국교회에서 다시 전하신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이단 판정을 받고 교류가 금지되셨을 것이다. 한 때 유행했던 야베스의 기도는 지금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의 반증이다.
예수님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맘몬이라는 주인을 부인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명목상의 주인이 되셨고, 맘몬이 하나님의 나라를 실효 지배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현실이다. 아무도 더 이상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이들은 더더욱 보기 어렵다.
맘몬의 신전이 된 교회들의 가장 큰 특징은 힘과 영향력을 추구하는 것이다. 특히 평화 이해가 그것을 입증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평화가 아니라 로마의 평화를 평화의 모든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힘없는 평화를 상상할 수 없다. 평화는 힘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공식입장이고, 이것은 그리스도교가 더 이상 평화의 종교가 아니라 폭력이 지배하는 이방 종교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방 종교가 신봉하는 신은 궁극적으로 맘몬일 수밖에 없고,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역사, 특히 그리스도교 역사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악을 행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죽였지만 그리스도인들이 보복하지 않았을 때에 그리스도교가 가장 급속히 확산되었다. 대박해의 시기에 교회는 그렇게 성장했다. 당시의 기록은 "한 사람이 순교할 때마다 열 사람이 회개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전한다. "순교자의 피에 성자의 씨앗이 들어 있다."라고 전하고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실천하지 못한다.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그리스도교는 죽는 그리스도인을 통해 열매를 맺는다. 하나님 나라는 그런 열매들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가장 고된 박해의 시기에 가장 건강했고, 가장 안락하고 평온한 시기에 가장 병들었다는 것은 심오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이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이 사실을 외면한다. “대마불패”라는 장로 대통령의 말이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붙들고 있는 복음의 정체를 말해준다.
커지려는 욕망은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특성이다. 나는 늘 수정교회와 로버트 슐러 목사의 이야기를 상기시키지만 그것은 마이동풍일 따름이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십자가 전쟁을 잘못된 그리스도교의 역사라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십자군 운동을 새롭게 시작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칼로 세상의 악을 제거하려 했던 그리스도교 운동이 남긴 핏자국으로 붉게 물들어 있다. 순교자들과 이단들과 단두대와 종교재판소의 야만적인 고문이 자행되었고, 그것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결국 십자가를 높이 매단 교회들이 그것으로 의무를 다한 교회들이 되었고, 십자가를 져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의무는 완전히 그리스도교 안에서 실종되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진다면서 번 돈의 일부를 교회에 바치는 것으로 가름한다. 그 돈으로 교회가 자비를 베풀고, 선심을 쓰는 것을 하나님의 정의라고 주장하는 곳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돈으로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일은 작아진 그리스도인들과 약해진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일에서 십자가를 져야 한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죽지만 그런 그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정의가 땅에서도 이루어진다. 그 십자가의 열매가 부활이다.
오늘 내가 쓰고 있는 내용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본래 그리스도교는 십자가의 종교이지 칼이나 총의 종교가 아니다. 아무리 그리스도인들이 외면해도 십자가는 계속애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속삭인다. 그리스도교 역사는 십자가에 충실했던 운동으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세상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느껴졌을 때에도 그리스도교는 파괴된 적이 없다.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처럼 죽어가면서도 신실했고, 하나님은 예수님께 그러셨듯이 그런 사람들에게 신실하시다.
결국 누가 주인이신가(누구를 믿고 있느냐)가 우리의 신앙을 가른다. 하나님이냐 재물(돈)이냐? 하나님이 주인인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진다. 하지만 맘몬이 주인인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높이 매달아 놓고, 세상의 평안과 안락함을 추구한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