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 의혹 예장통합 김의식 총회장, 징계 가능할까”

오늘 읽은 기사의 제목이다. 한 마디로 징계는 불가능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 대답은 명확하다. 그런 곳을 떠나야 한다.

그러나 이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목사들은 물론 그 교단 소속 교인들도 마찬가지다. 목사들의 경우는 제도권을 떠나는 것이기에 결정이 쉽지 않다. 교인들의 경우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사실상 강 건너 불구경하는 입장이다. 오늘날 개교회주의가 사람들을 그렇게 만든다. 자기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면 교단에서 불거진 일 따위는 그다지 큰 일이 아니다. 그래서 강 건너 불구경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목사들의 떠나지 못하는 이유와 그 교단 소속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의 떠나지 않는 이유는 사실상 매우 심각하다. 목사들이 떠나지 못하는 교단은 결국 조직이 되어버린 그리스도교를 상징한다.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조직이 된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가 될 수 없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사고에는 중이 절이 싫으면 중이 절을 떠나야 한다는 사고가 지배적이다. 이 사고에는 절이라는 조직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이 들어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조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조직이 아닌, 다시 말해 유기체인 교회가 어떤 것인지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상상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북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된다. 그들은 북한이라는 사회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과 그곳에서 살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북한이라는 철권독재정치체제에 도전하거나 그것을 붕괴시키려는 시도를 할 수 없다. 북한 김정은의 권력은 난공불락이다. 그것이 조직이 가지는 힘이다. 오늘날 조직이 된 그리스도교 역시 마찬가지로 난공불락이다.

결국 탈북을 한 이후에야 북한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탈북을 한 이후에도 탈북민들은 그곳에서 가지게 된 사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특히 남한 사회가 풍요롭기는 하지만 생각처럼 행복한 사회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한 후에는 오히려 북한을 그리워하게 된다.

북한이라는 조직에 한 번 익숙해지면 그 익숙함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반복해서 경험하게 된다. 나이 든 사람들이 꼰대가 되는 것은 그들의 과거의 문화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바꾼다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것이 아니라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늘 내가 꼰대라는 사실을 명심한다. 그래야 아이들의 말을 따를 수 있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목사들에게는 제도가 주는 보호가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부분은 자유롭지 못하지만 제도권을 떠난다는 것은 들판으로 혼자 나서는 것과 마찬가지다. 조직이 가지는 힘의 보호는 생각보다 견고하다. 그것을 마다하고 스스로 진리의 길을 걷겠다는 각오는 가상하기는 하지만 사실상 모든 것을 포기해야 가능한 일이다.

내 경우는 목사 안수를 받자마자 그 일을 결행했다. 가장 먼저 내가 목사라는 것의 정당성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은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 수 있게 되었지만 조직을 떠난 순간부터 그것은 사사건건 내 발목을 잡았다. 개신교 특성상 독립교회라는 것이 가능하지만 결국 그들도 독립교회 교단이라는 조직을 따로 만들었고, 제도권을 떠난 사람들은 그렇게 느슨한 조직의 보호라도 선택한다.

그러므로 목사가 불륜을 저지른 총회장을 보고 교단을 떠나는 일은 어렵다.

교인들의 경우는 훨씬 더 그럴 가능성이 없는데 오늘날 교회들은 모두 가인의 성처럼 독립된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곳의 목사는 절대 권력을 가짐으로써 김정은과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교단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교회에서 일어난 일에도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더구나 오늘날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의 사고에는 목사와 척을 지면 하나님과의 소통이 끊어진다고 생각하거나 신앙이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이지 다른 사람(목사)과는 상관이 없다는 사고가 지배적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눈을 감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없다. 특히 하나님과의 관계가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드러나고 확인된다는 사실을 모를 뿐만 아니라 알아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고는 하나님 사랑이 이웃사랑과 동일하다는 성서의 교훈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처사라는 사실을 오늘날 교인들은 생각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교단은 물론 다른 교회들 역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한 지체라는 생각 자체가 없기 때문에 처음부터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나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가 없다. 그들의 교회는 가인의 성처럼 에녹(봉헌)이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하나님과는 애초에 상관이 없는 곳이 되었다.

나는 예장 총회장의 불륜 사건과 같은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교단이나 교회를 떠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리스도교에 대해 교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생각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손에 꼽을 정도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아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로부터 집사직분을 받았지만 그들 가운데 진정한 교회가 무엇인지를 알거나 생각하는 사람조차도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내가 진정한 교회에 대해 이야기하면 내가 하는 이야기가 맞는다고 해도 도대체 그런 교회가 어디 있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생각을 한다. 나도 그런 사람들에게 더 길게 이야기할 수가 없다. 적당히 끊지 않으면 나와의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을 나는 안다.

확언하지만 예장 교단이나 총회장이 소속되어 있는 노회는 총회장을 치리하지 못한다. 치리를 할 수 있다 해도 조직이 된 그리스도교의 소속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될 수 없다. 불행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그렇게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곳이 되었다.

그러나 진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복음의 무의미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을 찾아가는 것은 좁은 길이다. 하지만 성서는 애초에 그리스도인의 길이 좁은 길임을 천명하고 있다. 나는 조직이 가지는 힘과 왜 그리스도교가 애초에 조직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안다. 그리스도교는 힘을 가지기 위해 오합지졸처럼 보이는 유기체의 길을 버리고 조직을 선택했다. 그리고 원하던 힘을 얻었다.

그 길이 가인이 선택한 길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하나님은 가인을 보호하시기 위해 그를 위해할 경우 칠 배의 벌을 내리시겠다는 선언을 하셨다. 하나님은 가인의 길을 가는 그리스도교 역시 보호하실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가인의 길에서 깨닫게 되는 날을 기다리시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총회장은 그 일의 반면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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