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이 구속되었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잠을 설치며 구속 여부를 기다려야 했다. 태극기부대는 영장을 발부한 서부지검에 난입해 부수고 때리면서 영장발부 판사를 찾았다. 찾아서 뭘 어찌 하겠다는 것인가.
그러나 나는 이것이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을 견인하는 것은 폭력이다. 공권력도 폭력이고 태극기부대의 난입 역시 폭력이다. 권력 자체가 폭력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그동안 권력이라는 폭력이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허물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만시지탄이지만 윤석열의 구속은 다행 정도가 아니라 “우리나라 만세”다.
"묵묵히 묵은 땅 갈아엎고 새로운 세상 준비하는 것이 교회의 몫"이라는 제목의 뉴스엔조이 기사에서 옥바라지선교회 이민희 목사는 이런 내용의 설교를 했다.
"자신 외에 관심도 없고, 돈과 권력을 얻는 일에만 발 벗고 나서며, 누가 쫓겨나거나 죽어 가도 무관심한 '굳은 땅'과 같은 이 시대에,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고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바로 '기경'이다. 아직 추운 날씨, 본격적으로 씨 뿌리는 시기가 다가오기 전, 다른 누가 나서서 하기 힘든 이 고된 일을 우리가 시작해야 한다. 고되고 지리한 혁명, 춥고 만만치 않은 좁은 길, 사각지대에서의 투쟁을 우리가 도맡아야 한다"
어떤 생각이 드는가. 이 목사의 설교처럼 그리스도인들이 묵은 땅을 갈아엎고 새로운 세상을 준비하는 ‘기경’하는 고된 일을 해야 하는가? 고되고 지리한 혁명, 춥고 만만치 않은 좁은 길, 사각지대에서의 투쟁을 그리스도인들이 도맡아야 하는가?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이런 복음 이해가 안타깝다. 하나님 나라는 폭력을 단념해야 하는 평화의 나라다. 그러나 기경은 위 설교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투쟁”으로서 이 또한 폭력이다. 예수님은 거대한 제국인 로마의 폭력에 폭력으로 대항하지 않으셨다. 만일 그러기를 원하셨다면 그분은 당시 ‘시카리’의 일원이 되셔야 했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셔야 했고(아니 애초에 끌려가지도 않고), 하늘의 군대를 불러 로마를 점령해야 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폭력이 없는 평화의 나라다. 하나님 나라를 폭력으로 건설하는 나라가 아니라 ‘자발적인 동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무혈 혁명으로 건설된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보이지 않게 부푸는 누룩과 같고, 임해도 그것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나라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
이 말씀에서 너희는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소금이며 세상의 빛이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소금과 빛으로 정의하신다. 소금은 녹아 사라진다. 섬김과 희생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빛이라는 사실은 더욱 중요하다. 우리는 학장시절 보이스카웃이나 누리단 야영에서 촛불을 켜고, 촛불의 의미를 마음에 새겼다. 자기를 태워 주변을 밝히는 촛불과 같은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이 담겨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런 촛불이 되어야 한다. 촛불은 다른 것을 태우는 폭력이 아니라 자기를 태워 주변을 밝혀주는 자기희생의 상징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빛이라는 의미 역시 이와 동일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소금과 빛이라는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물론 그 희생이 비폭력이어야 함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내가 “기경”이라는 단어를 보고 오늘 글을 쓰고 있는 이유다. 갈아엎는 기경은 폭력이다. 어떻게 굳은 땅이 되어버린 세상을 갈아엎을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내가 기경을 폭력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산 위에 세운 마을”이라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인 교회공동체의 의미는 절대적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살면서 세상과 다른 나라인 하나님 나라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자신들의 삶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를 보고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 “굳은 땅”이라는 보고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능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고 추구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건설에 동참에의 의지를 갖게 되고, 그들도 그리스도인이 되어 그 일에 동참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며 동시에 세상의 구원이다. 그렇게 온 우주의 마지막 가장자리까지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며 경륜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사고는 폭력을 기반으로 하는 제국주의적인 사고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변화의 단초가 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은 기경과 같은 직접적인 방식이 아니라 실제를 보여주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교의 변화에의 노력은 실패한 공산주의 혁명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평화는 폭력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할 수가 없다.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제국주의적인 사고에 함몰된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커지고 힘과 영향력을 가져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폭력적인 복음 이해가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근간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폭력을 추구하는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돈의 제국이 될 수밖에 없고, 실제로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아니라 맘몬의 신전이 되었다.
복음 이해 자체가 불가능한 곳이 된 것이다. 나는 이민희 목사님과 같은 분들을 이해하고 존경한다. 그분들의 진정성 역시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분은 폭력이 없는 평화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수 없고, 알 수 없다. 그래서 조금은 소박하고 어느 정도 평화적이기도 하지만 Christendom적인 사고에서 벗어날 수 없다. Christendom은 제국주의 사고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폭력적인 세상에 불과하다.
이 사실을 신학적인 이해차이로 생각한다면 복음은 무의미해진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승리는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상징한다. 그것은 비폭력저항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낸다.
나는 오늘도 하나님 나라를 더 잘 설명할 수 없는 나의 무식함을 한탄할 수밖에 없다. 내 능력과 내 글쓰기의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오늘도 성령의 역사를 위해 기도한다.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성령의 조명이 비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