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 타자 혐오 시대,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환대에 관하여, 죠이북스

 혐오 사회에 던지는 질문

그저 가르치려고 애를 쓰는 이, 그런 글과 말 그리고 이론으로만 가득한, 최소한 글쓴이 자신은 실제로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는 주장, 나는 거리감과 거부감을 느낀다. 맞는 말인데, 그 말처럼 살아갈까? 현실을 알고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이런 질문에 '예'라고 말할 수 없는 말과 글에 마음이 열리지 않는다. 그런 필자에게 아래와 같은 책과 글, 이야기가 좋다.

어떤 책인지도 말하지 않고 이야기를 열어간다. 이 책은 곳곳에 저자의 삶과 경험이 담겨있다. 장마다 토론을 위한 실제적인 질문도 제시하고 있다.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돌아보며 일상 속에서 글쓴이와 함께 반응하자고 제안한다. 이런 식이다.

캐나다 밴쿠버 ⓒ김동문
캐나다 밴쿠버 ⓒ김동문

 

"1. 여러분이 두려워하는 대상이 지금 빠르게 접근하거나 여러분의 삶을 침범하고 있는가? 아니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여러분에게 피해를 줄 가능성이 희박한 것은 아닌가?
2. 그 대상은 정말 여러분이 두려워할 만큼 강력한가? 아니면 상대적으로 무력해서 여러분에게 해를 입힐 수 없는 존재는 아닌가?
3. 그 대상은 정말 여러분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인가? 아니면 그저 그가 여러분과 다르기에 겁을 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67)

”2. 여러분의 교회나 직장에는 인종 또는 민족적 배경, 경제적 계층이나 문화적 정체성이 유사한 사람들이 어느 정도 소속되어 있 는가? 이런 표지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 어느 정도 심리적 장벽으로 작용할까?“(108)

 

저자는 무엇을 나누고 있는가?

이 책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 타자 혐오 시대,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환대에 관하여>라는 이름의, 윌리엄 윌리몬의 책 <Fear of the Other>(2016)의 한국어판이다. 죠이북스에서 펴냈다. 분량은 168쪽 밖에 안된다. 이 짧은 분량의 책을 읽으면서 저자와 마음과 말을 주고받는 느낌을 가진다. 우리가 다른 누군가를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로 취급하는 타자 혐오가 넘쳐나는 시대에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환대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이 책의 구성은 간결하다. 1장 타자에 의해 구원받다, 2장 타자, 나의 적, 3장 그리스도인답게 두려워하는 법 배우기, 4장 교회 안의 타자 사랑하기, 5장 우리의 참된 타자이신 예수님 등으로 구성하고 있다.

일상의 한복판에서, 현실 속에서 저자는 말한다.

"최근 시리아 난민의 입국을 허용할지를 두고 벌어진 논쟁의 배후에는 다음 질문들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가 그들을 받아 주는 데 어느 정도 비용이 들까? 국가의 치안이 약화되지는 않을까? 우리 동네의 부동산 시세가 하락하면 어쩌나? 그 이민자들이 국가 경제에 과연 도움이 될까?” 이 질문들 자체가 불합리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논쟁에서 기독교의 기본 입장은 환대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24)

이 단순한 원리는 사실 우리의 일상에, 한국 교회의 말과 행동에서 찾아보기 힘든 관점이다. 교회가 교회의 이름으로 예멘 난민이나 무슬림 다수국가 출신 이주자에 대해 경계와 혐오를 뿜어내는 것에 빨랐기 때문이다. 이런 질문은 인상적이다.

"... ‘타자’를 적극적으로 혐오하며 그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게으른 자들’, ‘벌레 같은 자들’, ‘더러운 자들’)과,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무관심한 태도로 그리스도의 명령을 거부하며 ‘타자’를 돌볼 책임을 아예 거부하는 일 중에 어느 쪽이 더 최악일까?"(85)어느 것이 더 최악일까? 한인교회와 한국교회는 어디쯤에 자리잡고 있는 것일까? 필자는 자주 친이슬람주의자로 취급받곤 했다. 지금도 그렇게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무슬림 혐오를 반대하고 이슬람에 대한 악의적 해석에 문제를 제기하곤 했기 때문이다. 

익숙한 성경 이야기를 낯설게 읽어준다. 저자의 성경 이해는 신선하다. 예를 들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 풀이에 이렇게 묻는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우리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할까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누가 우리에게 이웃이 되어줄 지에 관한 이야기다. 지금도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타자’, 우 리가 몹시 두려워하며 꺼리지만 그 손길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우리를 위기에서 건져내 줄 그 존재는 과연 누구인가?”(154)

 

우리에게 익숙한 집 나간 아들 이야기(이른바 탕자의 비유)를 두고는, 저자는 이렇게 묻는다.

“이때 그 아버지는 어디에 있는가? 아버지는 어두운 집 바깥에 나와 스스로 ‘타자’가 되어 버린 형에게 집에 들어가 함께 기뻐하며 동생과 교제를 나눌 것을 간곡히 권하고 있다. 이는 곧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라는 요청이다.”(106)

굳어진 시선과 경직된 태도는 현실을 마주하는 데 걸림돌이 되곤 한다. 성경을 보는 눈이 열릴 때 그분의 시선을 따라 타자를 마주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현실은 성경을 앞세워서 배제와 혐오를 강화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나의 일상에 무엇을 응용할까?

저자가 지금의 기독교가 계속 시달리고 있다고 진단한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오류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1. 하나의 민족적, 국가적, 경제적, 교육적, 문화적인 집단과의 배타적 동일시.
2. 사적이며 개인적인 영역으로 도피하는 주관적인 성향(이는 기독교의 보편 지향성과는 상반된다).
3. 기독교 신앙을 하나님이 세상을 회복하시는 일에 쓰시는 그분의 방편으로 여기기보다, 우리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내적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일종의 기술로 여기는 일."(99)

생각이 바뀌기 전에 시선이 바뀌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몸으로 겪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을 때가 많다. 사실 겪어 놓고도 생각이 바뀌기가 쉽지 않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이 분리된 이 시대이기에 더욱 그렇다.

"안타깝게도, 어떤 이들은 ‘타자’를 배제하는 일을 하나의 죄가 아닌 기독교적 미덕으로 여긴다. 이들은 인간을 판단하고 구별하며 배제하거나 포용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마치 우리에게 부여된 듯이 착각한다. 그리하여 타자를 명확한 위험 요소로 규정하고 자신만의 방어 기제를 구축하는 것이다."(91-92)

서울 용산구 이태원 ⓒ김동문
서울 용산구 이태원 ⓒ김동문

무슬림도, 무슬림 이주자도 사랑한다면서 경계할 대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최소한 필자가 경험한 현실을 통해, 위와 같은 저자의 진단에 공감한다. 이 시대는 당당하게 품위 있게 다른 누군가를 혐오할까를 고민하는 듯하다. 혐오를 정당화하느라 분주한 듯도 하다. 물론 한국 교회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런 현실을 사는 독자에게, 그리고 기독교인에게 이 책은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이 책을 읽으면서 발견한 아주 사소한 아쉬움이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과 이슬람교도들이 섬기는 신이 서로 다르다고 믿는다.”(105)에 ‘이슬람교도’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무슬림’으로 표기하면 좋았겠다. 사소한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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