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종이 믿는 교회는 '통행료를 받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집'이기에 모든 사람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성체도 '완전한 자들을 위해 내리시는 상이 아니라, 약한 자들을 위해 주시는 강력한 치료제요 영양제'라면서 성사를 향해 나아가는 문은 어떤 경우에도 닫혀서는 안 된다고 권고했다. 교종은 이 시대의 요구를 무시한 채 전례와 교리에만 '과시적으로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면서 교회를 '바깥을 향한 존재'로 규정한다." (출처 : 가톨릭일꾼(http://www.catholicworker.kr)
주교와 사제, 수도자들에게도 ‘신앙의 재구성’이 필요하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글쓴이 한상봉님은 교종이 믿는 교회를 소개했다. 글을 읽으며 교회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정말 교회가 '통행료를 받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집'인가? 그렇다면 교종이 말하는 교회는 건물인가 사람인가?
내가 교회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 것은 아무래도 교종이 믿는 교회가 건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이다.
이것이 같을 수 있을까?
내 생각은 ‘아니다’이다. 건물인 교회와 사람의 모임이 교회인 교회는 신·구약의 하나님 백성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이유다. 교회가 건물이라면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집이 아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예수님이 임종하시는 순간 일어난 일이다. 그분이 임종하시는 순간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 이것은 지성소가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더 이상 건물인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 그리고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지성소가 되어 하나님이 머무시는 곳이 되었다. 사람이 교회가 된 것이다.
나는 교종이 말한 것의 의미를 부정하고 싶지 않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의미 역시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교회가 건물이라는 사고는 불식되어야 할 신약백성의 철칙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성전에 가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무슬림처럼 거룩한 곳을 향하여 기도해야 하는 사람들도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며 장소에 관계없이 기도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성전의 훼파를 예언하시고, 그 예연대로 예루살렘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도 없이 무너졌다. 그것이 상징하는 바는 결정적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건물에 갇힌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 되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면 하나님 나라가 되어야 한다. 내가 하나님 나라가 된다고 하지 않은 이유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혹은 변질된 그리스도교가 그 사실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언이 아니라 당위로 말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오늘날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라는 계층이 존재할 수 있는 근거아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전이라면 이런 계층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건물이 교회라면 이런 계층은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건물이 교회가 된 교회를 교회로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었다. 그래서 미사나 예배를 드리러 예배당에 가면서 교회에 간다는 말을 하게 되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사고에서 교회는 여전히 성전이다.
이것을 부정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인들은 성전이 될 수 없고, 성전인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할 수밖에 없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편지로 인식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혹 있을지도 몰라 '거의'라는 부사를 사용했다. 간혹 그리스도의 편지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그리스도인을 구분하여 성인처럼 여긴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오늘날 그리스도교 안에 분명한 계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계층이란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 나라는 모두가 평등한 평화의 나라다.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은 계층이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가 똑같은 것을 먹고 마신다. 그러나 가톨릭에서는 성혈을 흘릴 수 없다는 이유로 분잔을 하지 않고, 성직자가 대표로 그것을 마신다. 똑같은 것을 먹고 마시지 않는 것은 이미 성찬례에서 시작된다.
한상봉님은 글에서 “주교와 사제, 수도자들에게도 ‘신앙의 재구성’이 요청된다”는 말을 했다. 나는 이런 말을 해야 하는 이유를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 그러나 주교와 사제, 수도자들이라는 계층이 엄연하 존재하는 상황 속에서 ‘신앙의 재구성“은 불가능하다. 설사 그들이 예수의 제자가 된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는 평신도들의 존재로 말미암아 그들은 온전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다.
아무리 주교와 사제, 수도자들이 예수의 제자가 된다 해도 예수의 제자가 아닌 존재가 모임 가운데 존재하는 한 그곳은 하나님 나라가 임할 수 없고, 될 수도 없다. 하나님 나라는 모두가 평등한 평화의 나라로서 그 어떤 권력도 존재할 수 없다. 권력은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공권력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공권력 역시 폭력이라는 점에서 다를 바 없다. 예수의 제자들은 폭력을 단념해야 하고, 하나님 나라는 어떠한 권력도 존재하지 않는 아나키스트와 비슷한 상태가 되어여 한다.
교회 안에 계층이 존재하는 한 모두의 ‘신앙의 재구성’이 이루어진다 해도 무의미하다. 신앙의 재구성보다 선행되어야할 것이 모든 계층의 타파이다. 그것은 단순히 사회적인 장벽들만을 허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평등을 해치는 모든 장벽들을 철폐해야 하는 것이가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허무신 것은 성서에 기록된 세 가지 장벽(“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들뿐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평등을 가로막는 모든 장벽들이다.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을 묵상해보라. 그분은 가장 천한 이방인 종의 자리로 내려가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이것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임하는 모두가 평등한 하나님 나라다. 그 나라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전이 된 모임 가운데 임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통행료를 받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사람들이 모인 사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