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는 결혼을 한다. 가톨릭 사제들은 결혼을 하지 않는다. 정교회 사제들은 결혼을 한 이도 있고(교회를 담당하는 사제는 결혼이 의무적이란다) 안 한 이도 있다. 당연히 나는 목사로서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하면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 결혼은 필수라고 생각한다. 내가 목사라서가 아니다. 결혼을 했기 때문도 아니다. 결혼을 통해 사랑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의 사랑은 피상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결혼을 하지 않고 자녀를 길러보지 않고, 특히 손자를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의 사랑은 피상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내 인생의 결론이다.

물론 나는 이태석 신부님과 같은 분을 좋아하고 존경한다. 하지만 독신이라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의 평등은 이미 불가능해진 상태가 된다. 고린도전서에 기록된 사랑을 묵상해보자.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나는 사랑장을 여는 이 선언이야말로 사랑의 전제라는 생각을 한다. 실제로 나는 대형교회 목사들이나 신부들의 사랑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와 같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도 있다. 나아가 예언하는 능력과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사랑이 없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 수도 있고, 자기의 몸을 넘겨줄 수도 있다. 말은 간단하지만 사실 이에서 벗어나는 더 큰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데 그런 경우에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이로움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도대체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물을 수밖에 없다. 세상이 말하는 사랑과 성서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그 사랑을 최근 손자를 통해 더 잘 볼 수 있고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아내에게 농담이지만 손자가 없는 신부들이 사랑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을 한다.

인용한 말씀의 요지는 간단하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얼마든지 대단한 능력을 가질 수도 있고, 위대한 일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위대한 능력과 일들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단한 능력을 보고 사랑을 확인하지 않고, 대단한 일을 보고도 사랑을 확인하지 않는다. 그런 능력이나 일을 사랑 없이 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이 없이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는 돈 못 버는 가장이 되어 살면서 가족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물론 이전에도 내가 가족들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사랑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정말 돈 못 버는 가장이 되어서야, 나는 가족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배워야 했다. 이전에 내가 사랑했다고 생각한 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고, 그것을 절대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가난이란 인생의 풀무 불을 지나면서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시험해야 했고, 연단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이제야 비로소 서로 사랑하는 가족이 될 수 있었다. 그 일에 화룡정점이 된 것은 손자의 출현이었다. 손자는 우리 모두에게 사랑을 재고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사랑을 다 배운 것이 아니다. 이제 나는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통해 그 사랑을 다시 연단하고 훈련하고 더 깊이 배워야 한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다. … 사람들이 가버리지 않는다...”이 집 사람들은 나쁘지만, 밖의 사람들은 더 나쁘다“라고 누군가 말했다. 또 ”이곳에서 행복하진 않지만 다른 곳에서는 더욱 불행하다“ 라고도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실상…서로를 필요로 하는 공동체이며… ’상처받은 자‘들의 공동체이다. 나 자신은 가끔 우리 공동체는 쫓겨난 사람들의 강제 수용소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들 모두는 공동체를 원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식량을 직접 재배할 수 있는 자신만의 통나무집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출처 : 가톨릭일꾼(http://www.catholicworker.kr)

물론 우리 가족도 공동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위 내용에서 보는 공동체는 전혀 다른 공동체를 의미한다. 나는 공동체에 관한 책을 한 권 번역했다. 많은 것을 생각하고, 또 많은 생각이 정리되었다. 그리고 나의 결론은 교회가 “소유를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되었다. 지금 인용한 ‘나그네의 집’이라는 공동체는 내가 생각하는 교회는 아니다. 하지만 복음대로 사는 삶이 있고, 신앙이 바탕이 되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공동체로서의 특징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 집 사람들은 밖의 사람들은 더 나쁘다.”,”이곳에서 행복하진 않지만 다른 곳에서는 더욱 불행하다“라는 그곳 사람들의 판단처럼 공동체를 더 잘 이해하게 해주는 말은 없다. 공동체에 관한 이해가 이보다 더 실존적일 수는 없다.

오래 전 한 공동체를 방문했을 때 그곳의 한 분이 했던 말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곳을 뛰쳐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막상 나가려고 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생각나서 다시 머물게 됩니다.“

공동체는 힘들다. 공동체는 불편하다. 그러나 그 힘듦과 불편함이 사랑을 알게 해준다. 사랑할 수 있게 해준다. 공동체의 삶이 없이 이루어지는 사랑은 그런 의미에서 불완전하다. 그러나 그것은 공동체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가족들을 통한 사랑을 배우지 못한다면 공동체를 통해 배운 사랑 역시 완전할 수 없다.

나는 가족과 타인과의 공동체가 성서가 말하는 사랑을 배우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그 두 과정에는 공통점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가난”이다. 가난하지 않다면 아무리 두 과정을 잘 통과한다고 해도 그것은 온전한 사랑에 대해 배울 수 없다. 그것을 가톨릭일꾼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가난한자들이 베푸는 ’친절‘ 보다도 더 좋은 친절은 없다. 그들 자신은 결핍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알아본다. 그리하여 이 00가의 집은 도움의 손길을 펼치는 것이다.”

내가 가난하지 않았다면 지금 내가 아무리 우리 가족들을 사랑한다 해도 온전한 사랑을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공동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가난하지 않다면 아무리 공동체 생활을 오래 한다 해도 ‘가난한 자들이 베푸는 친절’에 대해 배울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성서가 말하는 사랑에 세 개의 기둥이 있다는 결론을 신중하게 내린다. 가족과, 다른 사람들과의 공동체, 그리고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가난, 이 세 가지가 바로 그 기둥이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그 사랑을 배우는 과정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 사랑을 배웠거나 배우려는 사람들의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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