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8장에서 들리는 희미한 소리
어떤 사람들이 성경을 읽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말하거나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서다. 우리는 종종 성경의 소리를 듣지 않고 다른 이에게 말하려고 성경을 읽는다. 듣는 것에 게으르고 말하는 것에 부지런하다. 그래서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내가 전하는, 가르치는, 읽는 성경 속 시대, 장소, 상황, 소품, 사람 등이 눈앞에 그려지는가? 우리가 읽는 성경 속 이야기를 생생히 그려낼 수 있다면, 더 많은 이들이 성경 이야기를 눈앞에 보듯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이야기꾼이 되어 내가 읽는 그 본문 속 이야기를 보이고, 들리고, 만질 수 있는 이야기로 바꿔보자.
요한복음 8장 1-11절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이 본문을 보면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 또는 "예수가 땅에 쓰신 글씨" 등으로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이 사건이 일어난 현장은 예루살렘 성전 지역이다. 여인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면, 이 장소는 성전 구역의 여인의 뜰이거나 이방인 구역일 수 있다.
오늘 본문 속에는 여러 사람이 등장한다. 누가 주인공일까? 간음죄를 뒤집어 쓰고 끌려 나온 여인이 주인공일 수는 없을까? 빛으로 오신 예수의 눈길이, 눈빛이 이 여인을 비추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이 여인을 주인공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이 여인은 단지 예수의 어떠함을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다.
악(인)은 꼼꼼하고 부지런하다?
그렇다. 악은 꼼꼼하고 부지런하다는 것을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떠올린다. 이 이야기는 아침에 벌어진다. "아침에". 유대인 남자들은 하루 세 번 아침, 점심, 저녁에 기도하는 경우가 있었다. 지금의 대략적인 시간으로는 오전 9시, 낮 12시, 오후 3시 등이다. 아침 기도에 나온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종교성이 있는 이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이 아침부터 한 여인을 그리고 예수를 죽이기를 힘쓰고 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언제 이런 술수를 준비한 것일까? 그들이 언제부터 예수를 고발할 핑계를 찾기 위해 미끼로 던진 이 여인을 언제부터 노린 것일까? 이들은 왜 아침 시간을 노린 것일까? 예수가 그 아침에 성전을 찾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여인을 볼모로 삼고는 예수가 나타나기를 기다린 것이었을까?
예수가 땅에 쓴 글은?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요한복음 8:6-9)
땅에 쓰신 글씨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런데 땅에 쓰시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말씀하시고, 다시 땅에 쓰시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문자를 모르는 이들을 위해 땅에 쓰신 글씨의 뜻을 말씀하신 배려의 말씀이실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예수 시대에 유대인(사마리아와 갈릴리, 흩어진 유대인 중) 가운데 (성서) 히브리어를 읽고 쓸 수 있던 이들은 얼마나 되었을까? 학자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유대인 가운데 문자 해독이 가능했던 인구는 최대 3%가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본다. 작은 마을의 경우는 겨우 1, 2명이 히브리어를 읽을 수준이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고대 이스라엘의 중심지 예루살렘이니, 그것도 성전을 찾은 무리들이니, 히브리어 문자 해독자가 다른 지역보다는 훨씬 더 많았을 것은 분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께서 땅에 쓰신 글은 누구를 위해 쓰신 것일까? 고대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아니면 그림? 어떤 글자이고 어느 내용이든, 여인을 미끼로 던진 서기관과 바리새인 등을 향한 것임에는 분명하다.
여기서 흥미로운 현장을 떠올려본다. 예수께서 땅에 쓰신 글을 읽을 수 있던 이들 가운데, 그 자리를 뜬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글을 모르는 이는 당연히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글을 모르는 이들은 예수에게 뭐라고 쓴 것인지 묻거나 글을 아는 다른 이에게 물었을지도 모른다. 예수가 땅에 쓴 글을 읽고 반응한 것보다 예수의 말을 듣고 반응하는 것이 더 빨랐던 것도 같다.
이미 여러 번 죽임 당한 여인?
여인에게로 시선을 돌려본다. 이 여인은 누구일까? 앞서 살펴본 것처럼, 성경 본문에 이 여인이 누구인지 전혀 드러나 있지 않다. ‘음행 중에 잡힌 여자’,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 정도로 드러날 뿐이다. 이 여인의 처지와 관련하여 여러가지 경우를 떠올릴 수 있다. 예수 당시, 쉬운 이혼 관행으로 가난한 여인, 생과부가 된 여인이 적지 않았다. 과부가 단순히 ‘남편을 잃은 여인’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 ‘남편 없는 기혼 여성’을 뜻하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 유대의 율법 규정은 여성이 재혼까지 허락되었다. 그러나 두 번씩이나 이혼 당한 여성은 누군가의 '첩'이 되거나 ‘죄인인 여자’로 사는 경우가 많았다.
오늘 본문 속 여인은, 율법의 결혼 규정을 어기고 남편이 아닌 남자와 관계를 맺고 있는, 율법에 따르면 간음하는 여인일 뿐이다. 법이 허용하지 않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다.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다른 방도를 얻지 못한 여인이었을 것 같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의해 내던져진 이 여인의 남자는 누구였을까? 음행 혐의라면 그와 관계를 맺은 남자가 있어야 하지 않나? 아마도 예루살렘에 사는 어떤 남자의 여인이었을 이 여인은 왜, 어떻게 이곳에, 그것도 이른 아침에 끌려나온 것일까? 도대체 이 여인의 남자는 왜 이 여인을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는 미끼로 던진 것일까? 이 여인의 그 남자도 이 재판 현장에 있지 않았을까?
이미 이 여인은 수많은 죽음을 맞았다. 사회적으로, 율법적으로 이미 죽은 존재였다. 성전에 끌려나오기 전에도 그리고 지금 성전에 끌려 나와서도, 무리의 거친 외침을 듣고 있던 순간에도,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붙잡혀 돌에 맞아 죽게 될 것을 체념으로 받아들여야만 했을 이 여인은 어떤 감정이었을까? 그 여인의 회한과 공포, 절망감은 얼마나 심했을까? 이 여인은 성전 마당에서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고 있었을까?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이 여인은 성전 마당을 떠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긴다. 이제 어디로 가야할까? 갈 곳은 있었을까? 그는 어디로 발걸음을 돌렸을까? 지금 성전을 떠나면서 누구를 떠올리고, 무엇을 그리고 있었을까? 이 여인은 누구일까?
살리는 성경, 죽이는 성경?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예수 시대에 율법을 해석하고 판단할 수 있던 이들의 권력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그들의 억지스런 해석에 대해 저항할 수도 없었던 뭇 백성들의 처지도 느껴본다. 성경(토라)에 적혀있다고 말하니,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니, 글을 읽을 수도 볼 수도 없던 백성들이 논리적(?)으로 반대할 수도 없었던 그 답답함을 느낀다.
율법을 안다는 이들의 섬뜩한 살기를 느낀다. 율법을 연구하는 것이 그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율법 수호자들"일 뿐이었다. 다른 누군가를 판단하고 처단하기 위해서나 율법 지식이 사용하는 이들의 폭력적인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
오직 예수만이 그 여인의 변호인이 되어 곁에 선다. 그리고 그와 묻고 답한다. 그리고 그 여인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끌어낸다. 예수는 또한 이야기꾼이었다.
문득, 오늘 내가 읽는 성경, 내가 듣고 전하는 설교, 다른 이를 가르치는 성경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생각한다. 누구를 살리는 것에 주목하고 있나? 아니면 누구를 혐오하고 배제하고 죽이는 것에 눈길이 쏠려 있나? 우리의 성경은, 다른 이에게 어떤 말로 들려지고 전해지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본다. 배제와 혐오가 판을 치고, 집단 지성 대신에 집단 광기가 번뜩이기도 하는 현실을 산다. 이 시대에 기독교인의 양심, 상식, 하나님의 마음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