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는 설교자가 정한 성경 본문에 담긴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달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 본문 이야기에 주목하기 보다 그 안에 담긴 특정 단어나 표현에 몰입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럴 경우 성경 본문 속 이야기를 통해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성경 저자의 마음이나 의도를 놓치기도 한다.
듣는 설교를 읽는 설교로 바꿔 보자. 설교 본문 즉 성경 본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서 설교자의 강조하는 바를 다시 읽어보고자 한다. 이 시간을 통해 성경과 설교를 듣는 힘, 읽어내는 힘이 커가면 좋겠다. 이 공간에서 다루는 소재는, 최근의 설교에서 발췌한다. 이 글은 설교 비평이 아니기에, 설교자나 설교 현장에 관련한 정보는 생략한다. - 편집자 주
12월 22일 주일에 이루어진 또 다른 설교 가운데, 아래와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해당 설교자의 설교를 다시 읽어본다. 관련 본문은 마태복음 2:1-12절이다. 성탄주일예배 설교이다. 설교자는 그의 설교 가운데 아래와 말을 한다. 베들레헴 목자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담고 있다.
설교 읽기
세 번째는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자들입니다. 그 당시 목자들은 부자들이 아니에요. 지성인이 아닙니다. 목동의 주인에게 고용돼서 일하는 사람들이에요. 유대인의 역사책 미스바에 의하면 목자들은 평판 Refutation이 별로 좋지 않아서 법정 증인으로 채택되지 못하고, 구약의 정결법을 지키는 데서, 제외를 시켜버렸어요. 그런데 천사가, 가장 천한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기쁜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주었어요.
천사가 가장 무식한 사람들에게 천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탄생의 기쁜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해주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 11절 말씀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가장 천한 목자들이, 가장 변두리 인생을 살았던 목자들이, 가장 괼시받던 목자들이, 가장 먼저, 말 구유 위에 놓인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영광을 누렸고, 저들이 가장 먼저, 아기 예수를 만민에게 전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왜 하나님은 예수님의 탄생을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었을까요?" 우리 같으면 좀 지성인들, 좀 잘 나가는 사람들, 영역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해 줄 것 아닙니까? 근데 왜 하나님은 가장 천한 사람들에게 가장 기쁜 소식을 전하는 도구로 불러주셨을까요? 저들이 너무나 무식해서, 이 성탄의 기쁜 소식을 아무 편견 없이,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일까요?
목자들이 양을 치던 장소가 '라못 라헬'입니다. 과거에는 이 장소를 '벧학게렘'으로 불렸어요.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레갑' 후손들이 그곳에서 정착을 했습니다. 이 목자들은 레갑의 후손들이에요. 레갑의 조상인 요나답이 후손들에게 세 가지를 부탁했어요.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 농사를 짓지 말라. 장막을 떠나지 말라. 근데 놀라운 것은요. 이 레갑의 후손들이, 자손 대대로 300년이나 넘도록, 그 약속을 철두철미하게 지켰어요. 별로 안 놀라신데, 300년을 지켰던 것이에요. 그 세 가지를 하지 말라는 것을, 조상 대대로 내려온 그 영적인 가르침을, 목숨 걸고 지켰던 것이에요. 그래서 레갑 후손들은, 목축업에 종사하면서, 천한 목자로 살았던 것이에요.
이 사실을 아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위해서, 불이익을 감수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지키는 이들에게, 메시아가 오시기를 기다리는 이 목자들에게, 가장 좋은 소식을 먼저 아는, 특권과 영광을 주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희생을 감내하며, 불이익을 감내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최선을 다하여 순종하고, 예수님 바라보고 살 때, 남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아기 예수의 탄생의 기쁜 소식과, 아기 예수를 전하는, 그 엄청난 영광과 특권을,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불이익을 감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설교 속 이야기 다시 읽기
위에서 인용한 설교자의 설교 내용에는 몇 가지 오류가 있다.
분명한 것은 베들레헴은 라못 라헬이 아니다. 예수 탄생 이야기에 나오는 '베들레헴 '을 어디까지로 봐야 하는지는 불분명하다. 베들레헴과 베들레헴 에브라다(미가 5:2), '에브랏'(창세기 35:19, 48:7)은 창세기에서 같은 장소로 언급된다. 베들레헴과 벧학게렘(느헤미야 3:14, 예레미야 6:1)은 별개의 장소로 언급되고 있다.
'라못 라헬'(오늘날 Ramat Rachel Archaeological Garden 지역)이 '벧학게렘' 일 수도 있다. 벧학게렘의 위치와 관련 여러 가지 의견 중 하나가 오늘날의 '라맛 라헬'일 뿐이다.
최소한 레갑의 이야기가 나오는 그 시대는 물론, 야곱의 이야기에도 '베들레헴'과 '베들레헴 에브라다', '벧학게렘'은 다른 장소이다. 무엇보다도 '라못 라헬'이라는 지명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설교자가 언급한 '라못 라헬'이 성경의 '벧학게렘'이라면, "라못 라헬=벧학게렘=베들레헴" 이라는 논리는 적절하지 않다.
'레갑의 자손들'이 느헤미야 시대 이후에도 줄곧 유목민이라는 논리도 적절하지 않다. 아래의 본문에 따르면 기원전 7세기 후반, 6세기 전반의 예레미야 시대에는 예루살렘에 거주하였다.
"그러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이 땅에 올라왔을 때에, 우리가 말하기를, "갈대아인의 군대와 수리아인의 군대를 피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자." 하고 우리가 예루살렘에 살았노라."(예레미야 35:11)
기원전 5세기 중엽 느헤미야 시대에는 '벧학게렘'이라는 성에 거주한 것이다. 벧학게렘은 목자들의 들판이 아니라 행정중심지였고, 성이었다. 그렇기에 "목자들이 양을 치던 장소가 "라못 라헬'"이라는 설교자의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또한 "이 레갑의 후손들이, 자손 대대로 300년이나 넘도록, 그 약속을 철두철미하게 지켰어요. 별로 안 놀라신데, 300년을 지켰던 것이에요. "라는 표현도 적절하지 않다. 성경의 연대기상, 예수 탄생 시기와 예레미야 시대 사이에는 600년 이상의 시간 차가 존재한다. "예수 시대 베들레헴 목자=레갑의 후손"이라는 논리도 자연스럽지 않다.
일반적으로 예수 시대 베들레헴 목자는 삯을 받고 목축을 하는 삯군 목자들이었다. "레갑 후손들은, 목축업에 종사하면서, 천한 목자로 살았던 것"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성경 안에도 역사 속에도 자리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점에서 설교자가 레갑의 자손들과 베들레헴 목자를 연결한 것은 적절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이 주장은 설교자의 독창적인 주장이 아니다.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확산된 잘못된 주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