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8:1-11
|
설교는 설교자가 정한 성경 본문에 담긴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달해야 한다. 실화이든, 실화를 각색한 것이든, 아니면 만들어진 허구의 이야기이든, 대부분의 이야기에는 때와 곳, 사람, 사건, 일상, 소품 등이 어우러진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일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설교자는 성경 본문 이야기를 재현해 내는 것에 별 관심이 없다. 성경 본문 속 이야기를 주고받던 이들의 상황에는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 설교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돋보이기 위한 도구로서 성경 본문을 앞세우거나, 본문에서 찾은 특정 단어나 표현에 몰입하는 경우가 많다. 듣는 설교를 읽는 설교로 바꿔보자. 설교 본문, 즉 성경 본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서 설교자가 강조하는 바를 다시 읽어보고자 한다. 성경과 설교를 듣는 힘과 읽어내는 힘을 키우고 싶다. 성경 본문을 깊이 읽는 연습을 통해 설교를 더 잘 이해하고 수용하는 능력을 키우고자 한다. 이 공간에서는 최근의 설교를 다루며, 설교자나 설교 현장에 관련한 정보는 생략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12월 29일 주일에 진행된 A 목사의 설교 가운데, 아래와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관련 본문은 요한복음 8장 1-11절이다. 간음 혐의로 이른 아침에 예루살렘 성전에 끌려나온 한 여인의 이야기이다.
성경 본문 속 시대로 시간 여행을 떠나 이야기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보자. 2천 년 전 고대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를 받던 1세기 초반, 로마의 식민 도시 예루살렘 성 안에 자리한 성전 마당이 본문 속 시공간이다.
이제 이야기가 펼쳐지는 그 공간 속으로 더 다가서, 이야기의 한복판에 서보자. 그곳의 소리에 반응해 보자. 몇 명이나 모였을까? 어느 정도 되는 공간이었을까? 분문 속으로 들어간다면, 그 의미가 더욱 선명하게 다가올 수 있다. 그러나 아래의 설교 에서는 그런 '현장감'을 찾기 힘들다.
|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 요한 8:10-11. |
설교 읽기
요한복음 8장 9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우리는 자꾸 이 사건을 여기까지만 봅니다. “아, 그랬지.” 근데 사실 진짜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 이어지는 구절 후반부 부터가, 진짜 오늘 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9절 후반부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성경 헬라어를 보면요, 여기 ‘오직’이라는 이 말이 강조되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와와 거리던, 모든 무리들은, 다 떠나갔습니다. 저들이 손에, 하나씩 다 쥐고 있던 돌, 땅에 다 놓고요. 저들 무리들은, 다 떠나갑니다. 그리고 이제, 조용합니다. 왜요? 오직 예수와 이 한 여인밖에 없거든요. 조용합니다.
예수와 이 한 여인밖에 없는 이 상황 가운데서 이어지는 10절입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서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여자야, 고개를 이제 들어봐. 이제 고개를 들어, 그리고 한번 둘러봐.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는지 없는지, 한번 봐.” 예수님께서는 질문을 하시는 것도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제 이 여자의 고개를 들게 하는 것입니다. 고개를 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11절에 나옵니다.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이 여인이, “주여 없나이다”라고 대답할 수 있었던 까닭은, 고개를 그동안 숙이고 있던 이 여인이 고개를 들어서 보았기 때문이죠. 이제 이 여인은 고개를 듭니다. 그리고는 “정죄하는 자가 아무도 없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이 말씀을 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주 안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구절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특별히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이 구절은 신학적으로 대단히 모순이 있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이렇게 예수님은 적어도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왜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무리를 향해서, 7절에서 뭐라고, 말씀하셨다고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에, 무리들은, 다 죄인이기 때문에, 다 떠나갈 수밖에 없었죠. 그러나 무리들은, 그 어느 누구도, 돌을 들어서, 이 여인을 칠 수 없는, 죄인들이지만, 예수님은, 무리들이 놓고 간 돌 하나를 들어서, 저 여인을 향해, 쳐야만 했죠. 왜죠?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그리고 예수님은, 무리들이 던질 수 없었던 그 돌 하나를 들어서, 이 여인을 향해 던져야 마땅하죠. 그래서, 무엇을 선포하고 보여줘야 됩니까? “나는 죄가 없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선포해 줘야 되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순간은 어떤 순간이죠? 놀랍게도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이 비천한 한 여인을, 하나님의 딸 만들기 위하여, 스스로 죄인이 되어 버리는, 순간이 되어 버립니다. 하여, 이 구절은, 그냥 쉽게 읽을 수 있는 구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비천한 여인을, 하나님의 딸 만들기 위하여,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순간입니다. 이 사건이 있고 난 이후에, 예수님은, 곧바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게 되어집니다.
설교 다시 읽기
설교자는 "9절 후반부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성경 헬라어를 보면요, 여기 ‘오직’이라는 이 말이 강조되어져 있습니다."라고 강조한다. 이 구절은 그 많던 사람이 다 자리를 뜨고 둘만 남았다는 상황을 묘사하면서 '오직'(μόνος, monos)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예수가 죄 없으신 분임을 강조한다. 죄 없는 분만이 정죄할 수 있지만, 예수는 정죄 대신 용서와 회복을 선택했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예수가 죄인을 용서하기 위해 스스로 죄인처럼 행동했다고 해석한다. 설교자는 예수가 무죄하므로 돌을 던질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를 실행하지 않은 점을 신학적 모순으로 강조한다.
설교자는 예수의 자비와 구속 사역을 강조하려고 한다. 그러나 "스스로 죄인이 되는 순간"이라는 표현은 신학적 논란의 소지가 있다. 성경에서 예수는 '죄를 짊어지신 분'이지 '죄인'이 되셨다고 명시된 적은 없기 때문이다.(고후 5:21 참고). 예수께서 여인을 정죄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죄인됨의 수용이 아니다. 구속사적 차원에서 십자가로 향하는 상징적 행위로 보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설교자는 이 사건과 십자가 사건을 연결하며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설교 본문 자체는 십자가에 대한 암시보다는 용서와 회복의 메시지에 초점을 두고 있다. 십자가 사건과의 연결은 설교자의 신학적 해석일 수 있다. 그렇지만, 본문의 직접적 메시지(회개와 새 삶으로의 전환)와는 거리가 멀다. '기-승-전-십자가'를 강조하는 과정에 본문의 맥락을 벗어나 논리 비약을 하고 있다.
예수는 오늘 본문 속에서 한 여인에게 주목한다. 그러나 우리는 교훈거리에 집착을 한다. 예수가 빛이 되어 죽음의 어둠 속에 내몰린 여인의 삶에 빛을 비춘다. 그 여인의 목소리를 재생시킨다. 그러나 우리는 그곳에 눈길을 두지 않는다. 그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저 다른 이를 가르칠 것을 찾느라 애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