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야를 확보하려고 나무 위로 올라간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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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일(10월 6일)에 이루어진 설교 가운데,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설교자의 설교를 다시 읽어본다. 관련 본문은 누가복음 19장이다. 이번에 다루는 내용은 그 가운데 1-4절이다.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누가 19:1-4)
이 본문을 읽으면서 어떤 장면을 떠올리는가? 아니, 어떤 결론을 떠올리는가?
중년에 상처를 받으면
설교자는 아래와 같은 예화를 곁들인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제일 힘들 때가 언제냐? 통계를 봤더니요. 돈 없이 오래 살 때, 친구 없이 오래 살 때, 아프면서 오래 살 때 . 그래서 남자의 3대 망조가 있어요. 소년 출세. 너무 일찍 출세하면 인생을 망가뜨린다는 거예요. 소년 출세. 중년 상처. 중년에 상처를 받으면, 견딜 수가 없대. 그러니 여러분, 40대 남편들과, 사시는 부인들은, 남자들에게 상처를 주면 안 돼요... 더 어려운 게, 노년무전이래요. 늙어서 돈이 없으면, 정말 남자는, 여자는요. 아기라도 보고, 자기 혼자, 빨래도 해 입고, 음식이라도 만들어 먹지만, 남자가 늙어서 돈 없으면요. 진짜 갖다 버려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 특별히, 남자들은요, 집이라도 또 조금이라도 조금 있으면 절대 미리 자식들에게 주지 말고요. 끝까지 가게 있어야 됩니다.
이 가운데 설교자가 언급한 '남자의 3대 망조'를 살펴보자. '3대 망조'보다 세 가지 불행(삼불행)으로 더 공유된다. "일불행(一不幸)은 소년 급제(少年及第)이며, 이불행(二不幸)은 중년 상처(中年喪妻)이고, 삼불행(三不幸)은 노년 빈곤(老年貧困)이다."
그런데 설교자는 소년 출세, 중년 상처, 노년 무전 등으로 소개한다. 그 가운데 거슬리는 부분은 중년상처를 풀이하는 대목이다. '중년 상처'(中年喪妻)는 "중년에 아내를 잃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상처(아내를 잃다)를 상처를 받다, 상처를 주다, 즉 상처(傷處, Hurt)로 풀이한다.
믿음은 올라가는 것이다?
여러분 주변에 얼마나 많은 언어들이 얼마나 많은 말들이 돌아다녀요. 그 소리 다 듣고 우리 못 사는 거예요. 무슨 소리만 듣느냐? 믿음의 소리, 주님의 음성만 듣고 가는 거예요. 그렇게 갔어요. 그래서 저 멀리 쳐다봐도 안 보여요. 그러니까 올라갑니다. 찬송가에도 주를 앙모하는자, 내려가? 올라가요. 내려가요? 올라갑니다.
믿음은, 따라 합시다. 믿음은, 상향성이다. 믿음은, 올라가는 겁니다. 그래서 나무 위로 올라갔어요. 사람이 다 오늘 그 나무 위에 올라가서 어른이 걸터 앉아서 이렇게 쳐다보지는 않았겠죠. 아마 나뭇잎이 숨어 있는 그 안에 들어가서 눈만 삐끔 내밀고 있었을 겁니다. 점점점점 예수님의 일행이 오는데 아무도 느끼지 못하는, 삭게오만 느끼는 그 무언가가 있었어요.
"믿음은, 상향성이다. 믿음은, 올라가는 겁니다. 그래서 나무 위로 올라갔어요."라는 풀이가 눈길을 끈다. 그러면 나무 아래로 내려가는 것인가? 나무위에 올라가는 삶이 상향성을 삶을 드러내는 것인가? 삭게오가 위의 그림에서처럼 나무위에 올라간 것이 상향성의 삶을 그려주는 것인가?
여러분이, 지금까지 막 매여 있는, 그것이 아니면 못 살 것 같은,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진짜 예수를 만나는 것이고, 진짜 예수를 만나면, 그 한계를 넘어, 가장 행복하고, 가장 기쁠 수 있는, 인생의 가치관의 변화, 그래서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다. 새 것으로서의 삶을, 넉넉히 살아낼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기쁨이 뭐예요? 기가 뿜어나오는 거. 지금 삭게오는 기가 뿜어나오는 기쁨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약점을 쳐다보지 마세요. 주님을 향하여, 달려가세요. 주님을 향하여, 올라가세요. 우리 주님이 주목하면, 한 방에, 인생이, 끝나더라고요.
누가복음 19장의 무대에 등장하는 '뽕나무' 또는 '돌무화과나무'(Sycamore Tree)에는 무화과와 비슷한 열매가 맺힌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이 나무를 '생명나무'라 불렀고, 최고의 여신 이시스나 하토르 여신이 그 사이에 임재한다고 믿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설교자의 예화는 부정확했다. 본문 속 무대에 대해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하지 않았을까? 성경은 특정 장소와 시대, 시기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는데, 우리의 성경 이야기는 시간, 공간, 상황이 모두 생략되는 경향이 있다. 누가복음 19장의 삭개오 이야기는 독자에게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삶, 상향적인 믿음을 살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