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설교, 다시 읽는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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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는 설교자가 정한 성경 본문에 담긴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달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 본문 이야기에 주목하기 보다 그 안에 담긴 특정 단어나 표현에 몰입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럴 경우 성경 본문 속 이야기를 통해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성경 저자의 마음이나 의도를 놓치기도 한다. 듣는 설교를 읽는 설교로 바꿔 보자. 설교 본문 즉 성경 본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서 설교자의 강조하는 바를 다시 읽어보고자 한다. 이 시간을 통해 성경과 설교를 듣는 힘, 읽어내는 힘이 커가면 좋겠다. 이 공간에서 다루는 소재는, 최근의 설교에서 발췌한다. 설교 비평이 아니기에, 설교자나 설교 현장에 관련한 정보를 생략한다. - 편집자 주 |
지난주일에 이루어진 설교 가운데,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설교자의 설교를 다시 읽어보고, 설교 본문 속 배경을 다시 살펴보자.
설교 듣기
"그러나 이 들나귀는 주인이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의 주인이 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들나귀는 훈련이 되지 않는 나귀입니다. 그를 돕는 손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보통 때는 들을 떠다니며 살아가지만, 가뭄이 들면 풀이 없어 헐떡이게 된다고 예레미야서 14장 6절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위의 설교 내용에서 언급된 예레미야 14:6절은 어떤 뜻을 담고 있는지 확인한다. 예레미야 14장은 가뭄과 기근, 전쟁에 관한 내용이다. 1-6절을 읽어 보자.
1 가뭄에 대하여,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2 유다가 슬퍼하며 성문의 무리가 피곤하여 땅 위에서 애통하니 예루살렘의 부르짖음이 위로 오르도다.
3 귀인들은, 자기 사환들을 보내어 물을 얻으려 하였으나 그들이 우물에 갔어도 물을 얻지 못하여 빈 그릇으로 돌아오니 부끄럽고 근심하여 그들의 머리를 가리며
4 땅에 비가 없어 지면이 갈라지니 밭 가는 자가 부끄러워서 그의 머리를 가리는도다.
5 들의 암사슴은, 새끼를 낳아도 풀이 없으므로 내버리며
6 들 나귀들은, 벗은 산 위에 서서 승냥이 같이 헐떡이며 풀이 없으므로 눈이 흐려지는도다.
1절이 2-6절의 원인 또는 이유가 된다. 1절에 적힌 가뭄으로 인해 2절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1절은 2절의 원인이고, 2절은 1절의 결과가 된다.
2절의 상황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 3, 4절과 5, 6절이다. 3, 4절은 가뭄이 사회(사람)에게, 높은 자로부터 평민에게 끼친 영향을, 5, 6절은 생태계(동물)에게 끼친 영향이나 결과를 보여준다.
이런 맥락에서 설교자의 이해를 다시 읽어 보자. 설교자의 이해와 예레미야의 말을 다르다. "들나귀는 주인이 없고, 어느 누구도 그의 주인이 되기도 어려워서, 훈련이 되지 않아서, 보통 때는 들을 떠다니며 살아가지만, 가뭄이 들면 풀이 없어 헐떡이게 된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들나귀의 어떠함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가뭄으로 인하여 발생되는 환경을 서술하고 있다.
6절의 "들나귀들은 산언덕에 서서 이리처럼 헐떡이며 풀이 없으므로 쇠약해져서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본문은 이런 맥락을 담고 있다. 예레미야는 들나귀가 들을 떠다니며 살아가고, 가뭄이 들면 풀이 없어 헐떡인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예레미아 14:6절은 들나귀의 속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뭄으로 인해 빚어지는 힘든 상황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다.
"들나귀 같은 사람은 이스마엘 같은 사람입니다. 그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베드인 족속입니다. 그들은 거친 광야를 떠돌아다니면서, 살아갑니다. 정착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천막을 치고 살아갑니다."
설교 읽기: 설교자의 설교를 몇 가지 강조점을 따라 다시 읽어보자.
"들나귀 같은 사람은 이스마엘 같은 사람입니다."
"들나귀 같은 사람"은 나쁜 기질에 대한 표현일까? 아니면 좋고 나쁜 가치판단이 담긴 표현일까? 아니다. 조금 철지난 표현이지만 "야생마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베드윈 족속입니다. 그들은 거친 광야를 떠돌아다니면서 살아갑니다. 정착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천막을 치고 살아갑니다."
설교 읽기: 설교자는 베드윈에 대해 성경 속, 역사 속의 베드윈과 오늘날의 베드윈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일까? 굳이 성경을 끌어온다면 아브라함, 이삭, 이삭의 아들 야곱, 에서의 후손들도 설교자의 언어로 표현하면 베드윈들이 아닌가?
"그들은 목자들이라. 목축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나이다"(창세기 46:32)
"종들은 목자이온데 우리와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여 종들의 양 떼를 칠 곳이 없기로, 종들이 이곳에 거류하고자 왔사오니, 원하건대 종들로 고센 땅에 살게 하소서"(창세기 47:3-4)
성경 이해를 빌려 온다면, 출애굽한 이들은 광야 40년 동안 베드윈처럼 천막을 치고 살아가지 않았는가? 심지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천막을 치고 살지 않았던가?
설교자가 말하고자 하는 좋은 뜻이 있다. 그렇지만, 그 좋은 뜻을 전하기 위한 서술에는 적절하지 않은 주장과 추론, 상상, 확신이 뒤엉켜 있는 듯하다. 설교에서 전한다는 그 좋은 말이 곧 맞는 말을 뜻하는 것이 아닐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