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설교, 다시 읽는 설교

설교는 설교자가 정한 성경 본문에 담긴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달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 본문 이야기에 주목하기 보다 그 안에 담긴 특정 단어나 표현에 몰입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럴 경우 성경 본문 속 이야기를 통해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성경 저자의 마음이나 의도를 놓치기도 한다. 

듣는 설교를 읽는 설교로 바꿔 보자. 설교 본문 즉 성경 본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서 설교자의 강조하는 바를 다시 읽어보고자 한다. 이 시간을 통해 성경과 설교를 듣는 힘, 읽어내는 힘이 커가면 좋겠다. 이 공간에서 다루는 소재는, 최근의 설교에서 발췌한다. 설교 비평이 아니기에, 설교자나 설교 현장에 관련한 정보를 생략한다. - 편집자 주

 

The Second Denial of Saint Peter, between 1886 and 1894,James Tissot,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The Second Denial of Saint Peter, between 1886 and 1894,James Tissot,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지난주일에 이루어진 설교 가운데,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설교자의 설교를 다시 읽어보고, 설교 본문 속 배경을 다시 살펴보자.

 

1. 설교 듣기

본문에 나타나는 세 가지 대조적인 장면을 통해서, 교훈을 마음에 담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로는 , '멀찍이' 대 '가까이'입니다. 누가복음 22장 54절 말씀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잡아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 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예수님이 체포되자, 도망을 쳤던, 베드로가, 다시, 돌아왔지만, 예수님과 거리를 두고, 멀찍이, 따라갔어요. 그러다가, 예수님의 무언의 시선에 담긴, 예수님의 마음을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님께, 가까이, 나왔습니다.

예수를 따르십니까?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십니까? 혹시, 예수님께 너무나 죄송해서, 가까이 나오지 못하는 분이 계십니까? 세상에서, 예수 믿는 것이, 좀, 부끄러워서, 창피해서, 멀찍이 예수를 따르는 분들은, 안 계십니까?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터와 가정과, 삶의 현장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가까이 따라갑니까? 멀찍이, 따라갑니까? 사실 '멀찍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만 사용하셔야 돼요. 예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허물많은 죄인이기 때문에, 의로우신 주님은, 우리가 주님께 가까이 오는 것을, 막으셔야 돼요. 멀찍이 따라오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가까이 나오는 것을, 언제나, 환영하십니다. 우리가, 베드로처럼 실패하고, 넘어져도,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포기하지 아니하세요.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래요. 나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무언의 시선에 담긴, 메시지가 뭡니까? 이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를, 멀찍이, 따라가지 말고, 가까이 따라가라는 거예요.

 

2. 설교 읽기

누가복음 22:54-62절의 본문을 읽고 교훈을 찾는 것 못지않게, 본문 속으로 들어가 베드로가 등장하는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먼저 그려보는 것은 어떨까?

겟세마네에서 안나스 대제사장의 저택 까지는  1.5킬로미터 정도로, 20여분 정도의 거리였을 것이다. ⓒ구글 지도
겟세마네에서 안나스 대제사장의 저택 까지는  1.5킬로미터 정도로, 20여분 정도의 거리였을 것이다. ⓒ구글 지도

겟세마네에서 예수를 불법 연행한 후, 현재의 거리 개념으로 약 20분 안팎의 거리를 이동해야 했다. 안나스 대제사장의 저택으로 이동한 이유는 불법 심문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오늘 본문 속 사건이 벌어진다. 이 이야기의 무대는 바로 대제사장 안나스의 저택이었다. 이곳은 평소에도 성전 경비대가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예수에 대한 불법 심문은 늦은 밤중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당연히 그날은 평소보다 경계와 보안이 강화된 상황이었다.

베드로가 멀찍이서 예수를 주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분명하다. 평소에도 아무나 출입할 수 없던 곳이었고, 이날은 더욱 자유로운 출입이 어려웠을 것이다. 긴급하게 예수의 처형을 도모하는 현장에 누구나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을까? 베드로는 가야바 대제사장 집안과 교분이 있던 마가 요한의 도움으로 안나스 저택 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었을까?

 

James Tissot (Nantes, France, 1836–1902, Chenecey–Buillon, France). The Third Denial of Peter. Jesus' Look of Reproach (Le troisième reniement de Saint Pierre. Le regard de reproche de Jésus)., 1886–1894. Opaque watercolor over graphite on gray wove paper, Image: 9 3/16 x 7 13/16 in. (23.3 x 19.8 cm). Brooklyn Museum, Purchased by public subscription, 00.159.249 (Photo: Brooklyn Museum, 00.159.249_PS1.jpg)
James Tissot (Nantes, France, 1836–1902, Chenecey–Buillon, France). The Third Denial of Peter. Jesus' Look of Reproach (Le troisième reniement de Saint Pierre. Le regard de reproche de Jésus)., 1886–1894. Opaque watercolor over graphite on gray wove paper, Image: 9 3/16 x 7 13/16 in. (23.3 x 19.8 cm). Brooklyn Museum, Purchased by public subscription, 00.159.249 (Photo: Brooklyn Museum, 00.159.249_PS1.jpg)

요한복음에 따르면,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었다.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다"(요한 18:15-16).

예수를 불법적으로 묶어 이곳저곳으로 끌고 다니는 현장에서 누구나 예수에게 다가갈 수 있었을까? 예수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음에도 멀찍이서 예수를 바라봤다면, 베드로를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복음 22:54-62의 사건에서, 베드로가 예수에게 다가갈 수 있는 최대의 거리는 그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멀찍이' 예수를 볼 수 있는 곳이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위험을 감수하며 예수에게 가까이 다가간 것이 아니었을까?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의 최선을 바라보는 것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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