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하얀 연기와 함께 세인트피터 대성당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낸 이는 교황이 되리라 예상한 이가 거의 없었던 인물이었다. 남미 아르헨티나 출신, 예수회 사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황.”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그는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택했다. 교황직의 권위는 그대로였지만, 그 이름에 담긴 방향은 완전히 달랐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재위 11년 동안 전통의 껍질 속에 숨겨졌던 교회의 상처를 드러내고, 세상의 고통을 향해 열린 문을 만들었다. 종교적 리더를 넘어, 전 지구적 윤리의 목소리로 기억될 그의 여정을 다섯 가지 키워드로 정리한다.
1. 가난한 자와 함께 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첫 공식 메시지는 교회의 중심이 변두리에 있다는 선언이었다. 그는 말로만 가난을 말하지 않았다. 교황궁이 아닌 숙소를 택했고, 방탄차 대신 일반 승용차를 탔다. 겉모습이 아니라, 그의 목회 방향이 가난한 이들의 현실 속으로 향했다.
바티칸 광장에 설치된 노숙자 이발소, 이민자와 난민을 위한 기도,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한 메시지 등을 통해 그는 “경제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경제를 위한 시스템에 얽매인 시대”라고 진단했다.
2. 생태적 회개를 말하다
2015년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는 그가 남긴 가장 강력한 사회 문서 중 하나다. 환경은 더 이상 과학자들의 주제가 아니라 신앙인의 회개의 문제라고 선언하며, 생태위기를 ‘영적 위기’로 규정했다. 그는 ‘공동의 집’이라는 표현으로 지구를 신학의 영역 안에 두었다.
미국 콜로라도주립대 신학과 조앤 실바 교수는 “프란치스코는 환경에 대한 감수성을 교회의 교리 수준으로 끌어올린 첫번째 교황”이라며, “그의 생태윤리는 종교를 넘어 국제사회 전체에 울림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3. 다름과 함께 걷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유럽 중심, 로마 중심의 교회를 넘어서 세계 종교들과의 대화를 적극적으로 이끌었다. 그는 무슬림, 유대인, 불교도, 심지어 무신론자와도 손을 맞잡았다. 2021년 이라크 방문은 그 상징적 사건이었다. 시아파 지도자 알시스타니와의 만남은 분열의 땅에서 평화의 가능성을 열어 보였다.
“우리의 뿌리는 다르지만, 고통받는 사람을 향한 마음은 같다.”
그의 발언은 단순한 외교적 수사가 아니었다. 세계 곳곳의 갈등 현장을 찾아간 그에게, 종교는 국경을 가르는 언어가 아니라 공감의 언어였다.
4. 침묵을 깨다
프란치스코 이전의 교황들은 성직자 성추행 문제를 축소하거나 침묵해 왔다. 그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바티칸은 더 이상 비밀의 성이 아니었다. 내부 고발 시스템이 마련되었고, 은폐에 연루된 고위 성직자는 면직되었다. 피해자들의 고통 앞에서 ‘용서가 아닌 정의’를 말했다.
2019년 세계 주교회의에서 그는 “교회는 더 이상 피해자 앞에 침묵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실천은 느렸지만 방향은 분명했다. 교회는 회개를 시작했고, 그 중심에 프란치스코가 있었다.
5. 권위를 버리고 포용으로 나아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티칸이라는 ‘가부장적 요새’의 구조를 해체하려 했다. 여성과 평신도의 교회 참여를 확대했고, 복잡하고 폐쇄적이던 교황청의 재정을 투명하게 만들고자 했다. 그는 직언을 듣기 위한 자문위원회를 만들었고, 교리보다 현실을 고려한 사목적 판단을 독려했다.
교황은 “교리는 돌이 아니라 사람에게 가닿는 언어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혼자, 동성애자, 미혼모에 대한 그의 포용적 입장은 보수 진영의 반발을 샀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교회의 문턱을 낮추려 했던 그의 시도는, 오히려 교회의 뿌리를 다시 세우는 작업이었다.
'종교를 넘어선 윤리의 상징'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대가 요구한 리더였다. 뉴욕타임스는 그를 “21세기 가장 도덕적인 목소리”라고 표현했고, 가디언은 “신앙보다 실천으로 말한 지도자”라고 평가했다.
물론 그의 개방적 행보는 가톨릭 내 보수 세력의 지속적인 반발을 불러왔다. 그러나 그조차도 교회 안에 토론을 가능하게 한 변화였다.
또한, 프란치스코는 교회를 무오류의 성채가 아니라, ‘함께 길을 찾는 순례의 공동체’로 다시 정의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적으로 남긴 재산이 거의 없었다. 그의 삶은 철저한 무소유의 실천이었다. 급여는 전액 자선으로 사용되었고, 개인 소유의 유산도 없었다. 그는 부를 축적하지 않았지만, 세상에 더 깊은 유산을 남겼다.
한 바티칸 관계자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가 떠나며 남긴 것은 통장도, 땅문서도 아니다. 사람들 마음에 심어진 방향이다. 이 시대의 지도자는 무소유로 증명된 존재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야기는 끝났지만, 그가 던진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가장 작은 이들을 위해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