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방영민 목사의 '책숲 산책' 개혁주의 신앙과 여성안수 / 이광우 지음
서론
고린도전서 14장 34절에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적용하면 여성은 교회에서 입을 열면 안되고 남성이 하는 말에만 복종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여러 교단에서는 이 구절을 근거로하여 여성 안수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이고 하나님의 원리를 파괴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과연 이 구절이 그런 의미일까? 그 외에도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구절로 고린도전 11장 4-5절과 디모데전서 2장 11-15절, 창세기 1장 26-28절, 2장 18절 등의 말씀을 근거로 한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 어디에도 여성에게 안수를 주면 안되고 꼭 남성에게만 주어야한다고 적힌 곳은 없다. 즉 여성 안수 반대는 성경이 아니라 성경해석의 문제이지 이 자체가 비성경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은 위에 언급한 구절들이 과연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것인지 저자가 세밀하게 주해하고 분석한다. 그리고 여성 안수가 왜 하나님의 뜻인지 성경적이고 신학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한다. 저자의 글을 읽으면 아주 합리적이고 상식적이다. 무엇보다 여성안수가 성경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은퇴를 앞에 두고 있는 저자께서 그동안 교회가 여성을 배제하고 무시하고 멸시해 온 것에 대해 진실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책을 집필하였다.
성경은 어떤 책인가?
성경은 여성을 교회 사역에서 배제하고 조용히 허드렛일만 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이 쓰여졌던 시대는 노예가 인정이 되었고 아주 계급적인 사회였다. 그런 만큼 남성과 여성의 차이와 차별은 하늘과 땅이였다. 오죽하면 유대인의 기도 중에는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하다는 내용이 있겠는가. 고대 근동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예수님 시대와 조선 시대 그리고 오늘날도 여전히 남녀의 차별이 존재한다.
성경은 차별을 인정하고 용인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국적과 인종과 성별과 나이와 신분과 계급의 차이를 무너뜨리는 파격적인 책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될 수 없었던 그 불가능한 담도 무너지게 하는 말씀이다. 그런데 오늘날 성경을 믿고 따르는 교회에는 여전히 여성이 차별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교단이라고 자랑하는 곳은 이제야 여성에게 강도권을 허용해 주었다. 그런데 이것도 자세히 보면 여성 안수는 안해 줄 것 같은 모습이다.
그동안에 여성안수를 허용하지 않은 이유를 보면 교회가 세속화되고 동성애를 허용하게 되며 가정과 교회의 질서가 혼란해진다는 내용이다. 여성안수를 인정하면 창조질서를 허물게 되고 교회 안에 분란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런 주장들이 이해가 되지 않고 설득도 되지 않는다. 그들이 제시하는 성경해석도 크게 와닿지 않고 부족한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이며 유교적인 가치관만 더욱 강화될 뿐이다.
성경은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차별을 무너뜨리는 책이다. 그런데 교회에는 여전히 남성과 여성의 차별이 있고 여성 사역자에게는 안수를 허용하지 않는다. 전투기 조종사도 국회의원도 장관도 대통령도 여성이 되는 시대에 교회에서 목사는 여성이 인정되지 않는다. 남자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고 예수님도 여성의 몸을 통해 이 땅에 왔는데 교회는 여성의 권위와 역할을 제한한다. 성경은 이런 차별이 무너져야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데 우리는 전통과 문화와 교단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성경은 여성을 존중한다
성경은 여성을 아주 존중하고 여성의 역할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성의 인권이라고는 언급도 할 수 없던 시절에 성경은 여성의 존재와 역할을 대단하게 생각한다. 그야말로 시대의 문화와 가치관을 역전시킨다. 가히 성경은 혁명적이다.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고 가치관을 뒤집는다.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고 잘못된 생각을 고쳐준다. 사회적인 경계를 허물고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새로운 관념으로 바꿔준다.
여성에 대한 시각도 마찬가지다. 고대 근동에서 여성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던 시절이다. 그런데 성경은 여선지자요 사사인 드보라를 등장시킨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남자가 없던 시절 드보라를 통해 위대한 구원을 이루신다. 사사시대에 그 중요한 사무엘서를 시작하면서 무명의 여인 한나를 주인공으로 시작한다. 당시의 문화와 문학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여성이 제일 처음 나오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남자 제자들은 다 일곱 길로 도망갔지만 십자가 밑에서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지켰던 자는 여성들이였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일 처음 만난 제자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보고가 아니라 여성이였다. 십자가와 부활의 현장에서 성경은 여성의 믿음과 신앙을 높이 세우고 있다. 예수님 시대에 여성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는데 성경은 여성이 위대하고 항변하고 있다.
또 어디 그뿐인가. 신약의 교회가 세워지는 그 위대한 마가 요한의 다락방은 우리가 그렇게 불러서 마가 요한의 다락방이지 성경은 그 역사적인 현장을 사도행전 12장 12절을 보면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라고 부른다. 당시에 남성이 재산을 소유하고 유산도 남성이 가질 수 있었던 시절에 마리아가 그 집의 주인이라고 여성을 등장시키고 있다. 아마 당시 배경상 마리아는 주인이 아니였을 것이고, 성경은 그녀가 이렇게 믿음이 좋고 헌신적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 같다.
또 어디 그뿐인가. 이 마리아의 집에서 신약의 교회가 태어날 때 120명이나 모였다고 기록한다. 가롯 유다를 제외한 11명의 사도와 예수님의 동생을 제외하면 아무 대부분이 여성이 이 모임에 있었을 것이다. 마태복음 14장에는 오병이어 사건 때 여자와 어린아이 외에 오천명이나 먹었다고 기록한다. 여성을 수에도 포함하지 않던 극단적인 시절 성경은 구지 여성을 표현하며 여성이 이곳에도 많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 어디 그뿐인가. 사도행전 8장에서 바울이 예수의 추종자들은 잡아다가 옥에 가둘 때 남녀를 잡아서 가두었다고 기록한다. 아주 남성중심적인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자도 잡아갔다고 성경은 구지 여성을 언급한다. 그만큼 초대교회에서 여성의 믿음이 좋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바울은 뵈뵈에게 편지를 부탁하고, 유니아는 사도급으로 사역을 펼치고, 브리스길라는 여러 교회에서 인정받는 여성 지도자이다.
이렇듯 성경은 여성을 무시하고 멸시하던 시절 오히려 시대와 문화를 역행하며 여성을 존귀하게 여긴다. 시대와 남성은 여성을 차별하고 짓밟는데 성경은 여성을 존중하고 드높이고 있다. 오늘날도 여성이 많이 무시받는 시대이다. 후진국일수록 여성은 천대받고 하녀와 노예처럼 살아간다. 교회는 여성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성경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면 성경이 여성을 어떻게 높이고 있는지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차라리 일관성을 유지하라
필자는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교단을 보며 제일 이해 안가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여성에게 강도권도 주지 않고 안수도 허용하지 않으면서 여성을 신학교에 학생으로 받고 교회에서 여성 사역자로 청빙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전도사님들을 주일학교 각 부서에 담당자로 세우고 주일마다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이게 아직도 정말 이해가 안간다. 여성에게 강도권을 안주고 안수도 주지 않을 것이면서 왜 여성을 주일학교 강단에는 세우는가? 주일예배 강단과 주일학교 강단은 다른 것인가? 어른이 듣는 말씀은 안수 받은 자가 전해야 하고 아이들이 듣는 말씀은 안수와 상관없이 전할 수 있는가? 안수를 가지고 여성을 차별하면서 필요에 따라 여성을 입학시키고 사역자로 쓰는 것을 보면 너무 이기적이고 이중적인 것 같다.
차라리 솔직하게 부족한 성경해석으로 문맥과 상관없이 문자적으로 설명하기보다 아직은 교단이 시대의 요구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하면 좋겠다. 정직하게 아직은 가부장적인 어른들이 많이 있고 남성중심적인 흐름이 짙다보니 교단의 신학이 성경의 정신에 순종하는게 더디다고 인정하면 좋겠다. 아직은 교단에 속한 교회의 문화가 여성 안수에 대한 거부감이 많아서 조금씩 토의를 하며 의견을 좁혀가겠다고 하면 수긍이 될 것 같다.
솔직히 필자도 여성 안수는 인정하고 찬성하지만 아직 불편한 게 있다. 아직 내 속에서 가부장적인 문화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는 것 같고 그리고 무인가 신학교를 졸업한 여전도사님들이 공식적이지 않은 곳에서 목사 안수를 받아 비신학적으로 사역하는 모습을 보아서 그런 것 같다(물론 남성도 예외는 아니다). 지식과 실력이 부족하니 오로지 기도하고 은사와 신비를 쫓아 사역하다보니 그릇된 길로 가고 더 완고해지고 고집이 세지고 대화도 통하지 않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다.
물론 그런 분들 중에도 신실한 마음과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바르게 교회를 섬기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볼 때 많은 분들이 늦게 비인가 신학교를 가고 목사에 대한 부러움으로 안수를 받는다. 그리고 자신의 욕심과 경험과 소견대로 목회를 하신다. 그리고 아직은 교회라는 곳이 여성의 목사직을 환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만큼 아직 닫혀 있고 가부장적인 문화와 유교의 잔재가 벗겨지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결론
성경은 남성 중심의 역사를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남성 중심의 교회도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부장적으로 어그러진 역사에서 여성성이 회복되길 원하고 남성과 여성이 서로 존중하고 평등과 평화의 관계 속에서 교회를 건강하고 아름답게 세워가길 원한다. 물론 남성과 여성의 고유한 역할과 특징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서로의 차별이 아니라 다름이고, 서로의 강함으로 서로의 약함을 도와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고 한다. 그것은 독재와 군림과 억압과 착취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교회에 임하고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평화가 펼쳐지도록 그리스도께서 주관자가 되어 섬긴다는 것이다. 동일하게 남성이 여성과 가정의 머리가 된다는 것은 군림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희생과 섬김으로 여성과 협력하고 가정을 평화롭게 세워간다는 것이다.
그동안 역사는 여성을 무시하고 억압해왔다. 남성에게 종속되어 남성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예수님의 말씀과 복음의 정신은 서로 평등하고 동등한 관계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교회에서도 그동안 여성을 차별하고 무시해온 것이 사실이다. 많이 변화되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 이 책을 통해 여성 안수에 대해 정직하게 대답해 보길 원하고, 남성과 여성에 대한 바른 관점을 가지게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