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밴쿠버 치유상담센터 김홍구 소장
북아메리카 서쪽의 겨울은 비가 알려준다.
시애틀도, 밴쿠버도 눈보다 비가 먼저 찾아와 계절을 연다.
그리고 비와 함께 또 하나의 불청객, ‘겨울 우울증(Winter Blues)이 슬그머니 찾아온다.
어느 시인은 불안과 슬픔도 마음을 찾아오는 손님이니 정중하게 환대하라 했지만,
현실에서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이 고약한 ‘손님’은 오래 눌러앉을 때가 많다.
그렇다면 슬픔이 찾아올 때 우리는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불안이 문을 두드릴 때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 답을 찾기 위해 밴쿠버 치유상담센터 김홍구 소장을 만났다.
감정의 손님들과 공존하는 법,
그리고 비의 계절에도 마음이 젖지 않는 길을 함께 찾아본다.
M.Div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in America – Los Angeles. CA. USAGraduated Healing & Counseling Graduate University – Seoul South KoreaMissionary of BAM. (SEED CANADA) Sep 2011 ~ Dec 2018 Beijing ChinaOwner of Word of new life book. Nov 2004 ~ Sep 2011. Coquitlam, BC Canada한국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 부설 북미주치유상담연구소 소장캐나다 BCACC정회원 (RCC 18774)상담심리사1급(한국치유상담협회)가족회복지도사(한국가족보건협회)
요즘 바빠시겠어요. 상담하러 오는 분들이 많이 늘었나요?
네, 상담하고 싶어하는 분들이 점점 늘어나요. 작년 겨울부터 저희 센터로 상담 문의가 부쩍 많아졌다는 것을 체감합니다. 그런데 제가 만날 수 있는 분들은 한정되어 있잖아요. 보통 하루에 상담할 수 있는 분이 세 분, 많으면 네 분 정도입니다. 그 이상은 집중이 어렵습니다.
상담 시간은 보통 50분이고, 한 내담자를 끝내고 나면 다음 분을 위해 약 1시간 정도 휴식 시간을 둡니다. 제가 상담 내용을 정리할 시간도 필요하고, 다음에 오는 분을 위해 준비할 것들도 있으니까요. 직장인들이 많이 오시는데, 대부분 퇴근 후 방문하시기 때문에 상담이 대개 오후 4시부터 시작되고, 그때부터 네 분을 상담하면 저는 보통 밤 10시에 퇴근합니다.
어떤 분들이 오시나요?
어른 남성분들, 30대 부부들이 많고요. 다섯 살 여섯 살 정도의 어린 아이들도 와요. 여기 학교에서는 ADHD 진단을 쉽게 내리는 편이거든요. 그런데 아이들을 실제로 보면, 부모님이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ADHD가 아닌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모두 마음에 한 가득 짐을 안고 오시는 분들인데, 이 책상에서 상담자와 마주 앉는 소장님은 어떠실까 궁금해요.
처음 상담하러 온 분과 마주하면요. 저는 정말 좋습니다. 이분은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오셨을까, 어떤 아픔과 어떤 질문을 품고 왔을까. 사람은 천 명이면 천 명 다 다릅니다. 각자의 문제가 있고, 각자에게는 그 문제가 가장 시급하고 가장 무겁습니다. 그런데 내담자가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는 건, 자기 발로 들어온 거잖아요. 그만큼 용기가 있었다는 뜻이고, 내가 이 문제를 마주해 보겠다고 들어온 겁니다. 그러면 저는 물어봅니다. 제가 뭘 도와드릴까요? 이렇게요.
그리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 순간 그분 마음이 딱 열리는 느낌이 올 때가 있어요. 그때 정말 좋습니다. 아, 이분이 열리셨구나. 이제 내가 이분을 도울 수 있겠구나. 그 순간이 저는 가장 보람됩니다.
제가 기본적으로 사람을 참 좋아해요. 제가 대구에서 나고 자랐는데, 어릴 때부터 할머니 할아버지 모시고 대가족에서 자랐습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는 집, 늘 사람이 북적였고 어른들이 많았죠. 그래서 그런지 어르신들과 특히 잘 지냅니다. 우리 아내가 저보고 노인 전문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웃음)
아까 아이들도 많이 찾아온다고 하셨는데요.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때문에 오는 아이들이 많은데요.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아이들을 보면 ADHD가 아닌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여기 보시는 모래놀이 치료나, 인형 치료, 애착 치료 이런 걸 해보면 대부분 ADHD가 아닌 걸로 나옵니다.
저희 센터에 오는 제일 어린 내담자가 다섯 살인데, 부모님이 많이 변했다고 하시고, 학교에서도 “얘 무슨 치료 받았어요?” 하고 물을 정도예요. 제가 그동안 치료해온 과정들을 알려드리면 학교에서 다른 아이도 보내고 싶다고 합니다.
결국 놀이가 치료가 되는 거군요?
아이한테 모래판에 아무 거나 가져와서 마음대로 놀아보라 하는 겁니다. 여기는 네 세상이다, 네가 꾸미는 세계다. 그 안에서 마음대로 만들고 표현하게 두는 거죠. 그리고 나중에 제목도 붙여보고, 아이가 놀이 속에서 보여주는 모습들을 보면서 전문가가 조심스럽게 물어봅니다. 앞으로 이게 어떻게 될 것 같니? 그렇게 같이 놀아주면서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겁니다.
놀이를 통해 자기 세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대단한 집중력을 발휘해요. 그런데 단순히 집중력만 좋아지는 게 아닙니다. 자기 세계를 만들면서 자신을 찾아가는 중요한 과정을 만나는데, 이게 아이에게 아주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캐나다 미들스쿨이나 하이스쿨 교과 과정을 보면 우리 한국 애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일찍 하교를 하고, 방과 후 수업도 딱히 없습니다. 애들이 모여 프로젝트를 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놀러 다니죠. 그렇게 함께 다양한 놀이를 경험한 아이들은 삶의 에너지가 오래 가더라고요. 어른들도 마찬가지고요. 제가 그걸 잘 압니다. 왜냐하면 저도 학창 시절에 많이 놀아봤거든요. (웃음) 놀아본 사람이 놀이의 힘을 알아요..
“쫌 놀아보신” 느낌이 딱 옵니다. (웃음) 말씀하신 것처럼 놀이에는 힘이 있잖아요. 놀면서 관계 맺기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는데, 요즘 관계의 경험이 참 부족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맞습니다. 관계 맺기를 어려워하지요. 그로 인한 상처가 크고요. 부부라는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요즘 젊은 부부가 많이 오시는데, 처음엔 거의 원수처럼 들어오세요. (웃음) 여기 상담실 보시면, 제가 의자를 이렇게 배치해 놓잖습니까. 두 분이 서로 마주 보게 앉고, 저는 가운데에 앉아요. 제가 두 사람 앞에 따로 앉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이렇게 서로 얼굴을 보게 합니다. 서로 얘기할 때 상대의 표정과 태도를 자연스럽게 보도록 하는 거죠.
왜냐하면, 부부가 서로에게 반응하는 모습이 사실은 오랫동안 자기 안의 무의식에서 살아온 ‘내면 아이’의 반응이거든요. 대부분 자기 배우자를 보는 게 아니라, 무의식 속에서 자기 부모를 보고 반응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저 사람이 왜 저렇게 반응하지?” 하고 깨닫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진짜 변화가 시작돼요. 무의식에 숨어 있었던 게 갑자기 떠오르는 순간에 “맞다. 그거지!”하게 되는데, 그걸 상담에서는 “아하 경험(aha experience)’”이라고 합니다. 아하, 하고 깨닫는 순간입니다.
또 상담에서 자주 쓰는 질문이 있습니다. ‘기적 질문’이라고 합니다.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 당신의 삶에서 지금 겪고 있는 문제들이 기적처럼 바뀐다면 무엇이 달라졌으면 좋겠습니까? 이렇게 묻는 거죠. 그러면 어떤 분은 우리 남편이 다른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걸 상담 목표로 잡습니다. 남편이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거군요, 하고 그대로 인정해 줍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남편이 바뀐 게 아니고, 본인이 바뀐 경우가 많습니다.
이 의자에 앉았던 분들이 많이 우셨을 것 같습니다.
네, 그렇죠. 상담하다 보면 마음이 풀리면서 울게 됩니다. 저는 여기서 흘리는 눈물이 진짜 보배라고 생각해요. 마음속에 오랫동안 얼어붙어 있던 눈물들이잖아요. 그리고 이 공간이 안전하다고 느끼니까 그 눈물이 흘러나오는 거죠.
아까 ‘내면 아이’를 말씀하셨어요. 어릴 때의 상처가 영향을 계속 미치는 거군요.
제가 상담에서 강조하고, 강의를 하는 내용 중 하나가 ‘내면 아이 (Inner Child)’와 ‘내면 부모(Inner Parents)’입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저항도 못 했던 그 아이가 마음 속에 있어요. 어떤 아이는 순응형이 되고, 어떤 아이는 회피형이 되고, 또 어떤 경우엔 저항할 힘이 있는 아이가 되기도 하죠. 저를 가르치신 김중호 교수님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내면 부모’라는 개념도 가르치세요. 내면아이의 기억 속엔 내가 부모에게서 받았던 ‘내면 부모’의 흔적도 들어 있다는 거예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아들이 어느새 아버지의 모습을 따라서 자녀들을 학대하고 방임하고 강압하고 그렇게 하는 거지요.
원수처럼 찾아온 부부들도 상담을 하다 보면, 조금씩 자기 안에 있는 내면 아이를 만나고 부모의 모습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서로의 상처와 입장을 천천히 이해하게 되지요. 나도 모르게 상대를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결국 오래 머릿속에 굳어 있던 ‘가족 이미지’를 새롭게 정립하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배우자를 온전히, 그리고 건강한 시선으로 볼 수 있게 되고요.
저도 그런 과정을 지나왔습니다. 저희가 밴쿠버에 처음 온 게 2000년이었는데, 사실 그때가 저희 부부에게 가장 큰 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오고 나서, 정말 기적 같은 일들이 하나둘 일어났어요.
한국에서는 여행사, 의류 사업을 했다.
사업은 꽤나 번창했다.
돈도 명예로 뒤따랐다.
2000년, 잠시 쉼표를 찍자며 가족들과 여행을 계획했다.
친구도 만날 겸 찾은 곳이 캐나다 밴쿠버였다.
단순한 방문이라 여겼던 이 여정은
인생을 새로운 방향으로 돌린 전환점이 되었다.
돈을 벌었지만 솔직히 그 돈이 저를 많이 망가뜨렸습니다. 한국 남자들 흔히 그렇듯 술과 모임을 좋아했어요. 음주가무에 깊게 빠져 있었습니다. 아내가 교회 다니고 신앙생활을 꾸준히 했는데, 그때는 제가 많이 핍박했어요. 저희 부부 사이가 흔들릴 때였어요.
그러다 2000년 딱 25년 전이네요. 그해 11월에, 처음 밴쿠버 여행을 온 겁니다. 선착장에 서 있는데 아내가 그래요. 주변 풍경이 영화 같다고요. 비가 부슬부슬 오는데, 애들이 운동장에서 반바지 입고 축구하고, 노란 스쿨버스가 지나가는데 정말 평화로웠어요. 게다가 만나는 캐나다 사람들도 친절하고, 매너도 좋고. 삶의 속도가 다른 곳이었습니다. 그 무렵 한국에서는 제 술친구 의사도 세상을 떠났고, 저도 뭔가 인생을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 느끼기 시작했거든요.
한국에 돌아가서 바로 이민 신청을 하게 됐습니다. “이 나라 괜찮다” 이런 마음으로요. 이듬해 제가 아이와 밴쿠버로 먼저 왔는데, 그때 아내 없이 아이를 혼자 돌보면서 내가 어떤 아버지로 살아야할지, 인생 2막을 어떻게 펼칠지에 대해 많이 고민했어요. 아내를 핍박하던 그 마음도 돌려서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정말 전환점이었네요. 인생 2막을 말씀하셨는데, 이민 오셔서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처음엔 한국에서 했던 여행사를 계획했어요. 그런데 마음이 자꾸 서점 쪽으로 가더라고요. 아는 분이 기독교 서점 얘기를 하시면서 LA에 가서 어떤 분을 만나보라고 하셨습니다. 저희 부부는 “아, 서점? 하면 되지” 하고 쉽게 생각했고, 그래서 LA를 갔는데, 그분이 딱 세 가지 조건을 말하시는 거예요. 첫째, 30만 달러를 투자해야 한다. 둘째, 30만 달러를 넣어도 3년 동안은 먹고 살 수단이 따로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 조건이 정말 충격이었어요. 기독교 서점이란 공간은 그냥 책 파는 곳이 아니고, 그 지역 교회 하나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니 눈 감고, 귀 닫고, 입 다물고 묵묵히 견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겁니다. 정말 막막한 조건들이잖아요. 호텔로 돌아와 둘이 진짜 펑펑 울었습니다. “우리 밴쿠버 와서 뭔가 새롭게 살아보려고 했는데, 왜 이렇게 막힐까…”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어요. 거액 30만 달러가 모이고, 모든 게 거짓말처럼 채워진 겁니다. 반대도 정말 많았어요. “요즘 누가 기독교 서점을 그렇게 크게 해? 다 문 닫고 있는데!” 게다가 그 자리가 원래 한인 노래방 자리였는데, 거기서 사람이 죽었던 곳이에요. 바닥에 사고 현장 그림이 그대로 남아 있었거든요. 저희는 마음을 이렇게 먹었어요. “죽음이 있었던 자리에 생명의 말씀이 들어가면, 생명이 다시 살아날 거다.” 그렇게 선포하고 시작했죠. 기독교 서점 <새생명말씀사>는 그렇게 시작된 겁니다.
처음부터 상담을 하신 건 아니었네요. 서점을 해본 적이 없으셨는데, 사업이 잘 되었나요?
놀랍게도, 3년이 아니라 1년 반 만에 흑자 기업이 됐어요. 그때 깨달았습니다. 정말 우리가 한 게 아니구나. 하나님이 저희에게 주신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는 걸 봤어요. 이사야서 41장 10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그 말씀처럼 일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니구나 깨닫게 되었어요.
서점을 운영하면서 참 귀한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여러 교회 목사님들과 교류했고, CBMC(기독 실업인회) 활동도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밴쿠버 이민 사회가 많이 척박했지요. 다들 “요즘 이민자들이 너무 힘들어한다, 한국에서 치유 사역하시는 목사님을 모셔오자”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분이 정태기 목사님이었습니다. 처음엔 이름만 들었고, 잘 알지는 못했죠. 마침 서점 일로 한국을 자주 오가던 때라, 직접 연락을 드리고 찾아뵈었습니다. 그 만남이 스승과 제자의 인연으로 이어졌어요. 사실 정 목사님께서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를 막 세우셨던 때에 와서 공부하라고 권하셨는데, 그때는 제가 중국 선교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2011년에 중국을 가서 아내와 함께 선교 사역을 했어요. 2018년에 돌아온 뒤에야 정태기 목사님의 제자로 치유 상담을 본격적으로 공부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상담에 관심이 있으셨던가 봅니다.
저도 모르게 상담을 하고 있던 거 같아요. 그때 서점 안쪽에 작은 방이 있었어요. 그 방에서 제가 뭘 했냐면 그 동네 남자들 이야기를 들어줬어요. 관계가 깨어진 이야기, 교회에서 겪은 상처같은 얘기들이요.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다시 비춰주고, 이야기 들어주는 일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었는데, 정 목사님이 그걸 보고 그러셨어요. “그게 이미 상담이다. 너에게 그런 재능이 있다.” 그래서 더 배우고 싶었고, 상담 공부를 체계적으로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됐어요.
스스로도 치유의 경험을 하셨을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다. 상담을 공부하면서 제가 많이 치유받았어요. 소통의 방법도 알게 되면서 가족들과 대화하는 방식이 달라졌죠. 경상도 대구에서 사는 아버지와 아들이 무슨 대화가 있었겠어요? 그런데 그 무렵 부모님이 밴쿠버에 자주 오셨고, 제가 밴쿠버순복음교회에서 ‘아버지학교’ 강의를 맡았습니다. 강단에 섰더니, 제 아버지가 학생으로 앉아 계시는데, 얼굴을 보는 순간 말이 나오지 않았어요. 그냥 내려가 아버지 앞에 큰절을 했습니다.
전부터 마음에 오래 남았던 일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차를 타고 가다가 말다툼 끝에 아버지를 8차선 도로에 내려드린 적이 있거든요. 차들이 쌩쌩 지나는 길을 아버지가 혼자 건너가셨는데, 그 일을 처음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불효했습니다. 그래도 살아 계시고 여기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서로 펑펑 울었죠. 용서고 뭐고 할 것도 없고, 거기 있는 모두가 함께 울었어요. 그날 이후로 아버지와 관계가 달라졌습니다. 남자끼리 수다가 되더라고요.
아버지와 목욕탕에 가면, 손 잡고 “아버지 손도 늙었고, 내 손도 늙었네.” 그러면서 “아버지, 인생을 돌아보면 언제가 제일 힘드셨습니까?” 그런 것도 여쭤보면서 마음을 풀고, 어설프게 알던 인생의 맥락을 나누는 거죠.
아버지가 지난 해 돌아가셨습니다. 지금도 아버지 생각하면 울컥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쉬움이나, 용서해야 한다든지 용서를 받아야 한다든지 그런 감정은 하나도 없어요. 충분히 풀었기 때문입니다. 남은 건 고마움뿐이에요.
좋은 기억을 갖게 되는 거네요.
저는 상담에 오는 분들에게도 꼭 말씀드립니다. 부모가 자식한테 유산을 물려주잖아요. 우리는 보통 유산이라 하면, 돈이나 재산 같은 것만 생각합니다. 진짜 무서운 건 정신적인 유산, 영적인 유산입니다. 부모가 부부로서 살아온 모습, 그게 그대로 아이 무의식에 박힙니다. 그리고 부모가 가진 성격이나 기질도, DNA 타고 그대로 내려옵니다.
이걸 깨닫고 보면, 안에는 긍정적인 것도 있고 부정적인 것도 있습니다. 부정적인 건 내가 그걸 알아차리면, 다시 반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건 알게 되는 순간, 더 크게 살릴 수 있습니다.
상처와 나쁜 기억들을 걷어내고 나면, 결국 남아 있는 건 좋은 기억입니다. 부모님이 사랑해서 나를 낳았다는 정체성입니다. 저는 상담오는 분들께도 그걸 반드시 찾아드리고, 반드시 심어줍니다. 그리고 그 기억을 갖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게 사람을 다시 살립니다.
상담을 하며 한계를 느끼실 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어떻게 하세요?
저는 정태기 목사님께 정말 많이 배웠는데, 이분이 강조하는 제일 큰 원칙이 “내담자는 무조건 옳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늘 말합니다. 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포기하지 않으면, 저는 끝까지 같이 갑니다. 이런 태도는 한국에서 배운 귀한 마음입니다.
그렇지만 상담을 하면서 제 한계를 느낄 때가 있지요. “아, 이건 내가 더 이상 할 수 없구나.” 그럴 땐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건 제가 못 하겠습니다.” 내담자 파일을 들고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어떤 날은 울면서 기도합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기다리다 보면, 어느 날 그 사람 안에서 스스로 깨닫는 순간이 옵니다.
상담이란 것이 없는 힘을 제가 만들어서 넣어주는 게 아닙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저는 다만 그 사람이 자기 안에 이미 있는 걸 발견하게 도와줄 뿐입니다. 그리고 살면서 ‘비빌 언덕’ 하나 만들어 드리는 겁니다.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어서 이곳을 찾아오실텐데, 이 상담실은 잠시 기대는 자리이고, 제가 하는 일은, 그들이 스스로 ‘비빌 언덕’을 찾게 돕는 것입니다.
기댈 곳이 어머니, 아버지일 수도 있고, 종국에는 하나님일 수 있어요. 어떤 분들은 아내에게 끌려 오기도 하고, 엄청 저항하며 들어오는데 이런 말씀도 하십니다. “상담사님, 교회 다니시는 분 같은데 제 앞에서 예수 얘기하면 바로 나갑니다.” 그러면 저는 “예, 그러셔도 됩니다.”라고 해요. 시간이 지나고 라포가 쌓이면 마음이 열립니다. 그러면 제가 뭐라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교회로 발길이 향하게 되더라고요.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세요? 소장님만의 치유 방법이 궁금해요.
제 곁에는 좋은 멘토와 동역자들이 있어요. 정태기 목사님을 비롯해 여러 스승과 목사님들이 계시고, 제 아내 김미희 권사는 제게 가장 솔직한 조언과 가장 따뜻한 위로를 주는 사람입니다. 아프게 찌르기도 하고 깊이 격려도 해주는 존재죠. 그런 사람들과의 관계가 제 힘이 되고요.
또 성경 말씀을 묵상합니다. 제가 상담 공부를 하면서 동시에 신학을 공부했는데, 영성 수련의 하나로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조용한 곳에서 네 다섯 시간을 머물며 말씀을 내면화 하는 거지요. 성경을 소리 내 읽으면서 귀로 듣고, 마음과 오감으로 느껴보고, 그 느낌을 하느님께 솔직히 말씀드리며 기도하는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마지막에는 그 느낌을 정리해서, 오늘 내 삶에 어떻게 실천할지 생각해봅니다. 묵상을 통해 영적으로 건강해지게 되고, 상담자로 설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상담에 신학까지 공부하셨다니, 또 더 공부하실 계획이 있으신가요? 뭔가 다른 계획을 갖고 계실 것 같아요.
공부는 학위 때문이 아닐지라도 계속 하겠고요. 제겐 꿈이 있습니다. 제가 공부한 한국 치유상담대학원의 정신을 이곳에서 이어가고 싶습니다. 한국에서 저에게 큰 영향을 주신 선생님들을 모시고 오고 싶어요. 내면아이 치료도 정식 프로그램으로 만들고, 나중에는 정규 학위가 나오는 치유 상담 학교도 만들고 싶습니다.
또 제가 중국에서 선교 사역을 마친 뒤 디브리핑 시간을 가지면서 큰 회복을 경험했어요. 그때 마음먹었습니다. 우리가 받은 걸 언젠가 꼭 누군가에게 돌려주자. 지금도 그 마음 그대로입니다. 상담 공부와 함께 신학 공부를 마쳤고, 얼마 전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저는 목사님이나 선교사님도 와서 편하게 마음을 열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신학 공부가 상담에도 큰 힘이 되었고, 제 마음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결국 제 일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믿어요. 저는 그 일을 위해 쓰임받고 싶습니다.
그의 인생에는 세 개의 굵직한 마디가 있다고 했다.
말씀을 세상과 나누던 서점의 시간,
땅끝까지 복음을 들고 나아갔던 선교의 여정,
상처 위에 다시 숨을 불어넣고, 무너진 마음을 세우는 치유 상담의 자리.
그리고 이제, 그 끝에 또 하나의 마디가 모습을 드러낼 듯 하다.
‘치유의 학교’다.
한 사람의 회복이 또 다른 삶을 살리고,
그 생명이 다시 다른 생명을 깨우는 순환을 꿈꾸는 길.
그의 발걸음은 이미 그곳으로 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