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남부 지역으로 출장을 갔다가 수요일 사순절 예배를 드리기 위해 근처 교회를 찾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던 것은 아니고, 그저 익숙한 교단 이름을 보고 자연스럽게 들어간 교회였다.
나는 교인들과의 교제를 사랑한다. 익숙하지 않은 교회라 할지라도 예배당에 들어서는 순간 마치 먼 친척들과의 가족모임처럼 편안함이 스며드는 그 감각이 좋았다. 성찬 예식은 그런 소속감을 더 깊게 만들었다.
하지만 예배가 진행될수록 점점 이질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치 엉뚱한 호텔 연회장에 잘못 들어가 낯선 이의 결혼식에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예배 중간중간에서 풍겨오는 미국 정치의 낌새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순절 예배에서 말이다.
예배 후 호텔 방에 돌아와 설교자의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그리고 나서야 퍼즐 조각들이 맞춰졌다. 나는 방금, 2020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의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는 목회자 모임인 '블랙 로브 연대'(Black Robe Regiment) 소속의 목사 앞에서 회개하고, 경건한 예배를 드린 것이었다. 교회 예배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했던 이스라엘 관련 언급들도 이제야 이해가 됐다. 그 단체가 반유대주의적 경향을 보인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검색할수록 분노가 치밀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나를 회개로 이끌었지?”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털어놓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우리의 결론은 명확했다. 그것은 진정한 예배가 아닌, 가면을 쓴 기만이자 기독교 민족주의의 은밀하고 음험한 과시일 뿐이었다.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
며칠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자꾸만 그날 밤의 예배를 곱씹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무릎을 꿇고 죄를 고백했다. 함께 우리의 욕심과 세속적인 탐욕, 불의에 대한 무관심을 인정했다. 함께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진정한 회개의 영을 구했다.
그날의 예배는 우리 모두를 하나의 고백으로 묶었다. 그렇다면, 나는 옆에 앉은 이가 나처럼 죄를 회개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의 죄가 나에게는 너무나 뚜렷해 보였지만, 그 역시 같은 말씀 속에서 자신의 어두움을 보았기를 바라는 것이 너무 큰 기대일까?
우리는 목사의 음성과 회중의 음성이 섞인 ‘하나의 목소리’로 예배했다. 하지만 나는 끝내 그들과 나 자신을 같은 죄인으로 묶고 싶지 않았다. 아니, 묶을 수 없었다. 그 어두운 예배당 안에는 내가 용납할 수 없는 그림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의 회개도 어렵지만, 공동체의 회개는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을 그날 처음 깨달았다.
어릴 적 내가 자랐던 근본주의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사두개인을 두고 농담처럼 “슬픈 사람들이지”라고 말하곤 했다. 부활을 믿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겉모습은 화려하지만 내면은 비어 있는 신앙.
바리새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겉은 깨끗해 보였지만 속은 죽은 뼈로 가득 찬 무덤 같았다(마 23:27–28).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 하셨다(눅 18장). 우리는 ‘올바른 믿음’이 ‘올바른 삶’을 낳는다고 굳게 믿었다. 혼전순결, 세금 성실 신고, 성경 번역본 선택까지, 믿음은 행동으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회개 역시 마찬가지였다. 회개의 열매는 반드시 드러나야 했다. 공개적인 죄 고백과 삶의 방향 전환. 회개란 단지 “미안해요” 이상의 것이었다. 마음의 변화, 즉 '메타노이아'였다. 고백은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해방감을 주는 것이기도 했다. 죄는 눈처럼 희게 씻겨야 했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삶 전체에 명확하게 드러나야 했다(사 1:17–19).
그날의 설교자와 예배를 떠올리며 나는 다시 한 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떠올렸다. 기독교 민족주의에 사로잡힌 목회자는 사두개인 같았다. 세속 권력에 눈이 먼 종교 지도자들. 동시에 그는 바리새인 같기도 했다. 자신과 다른 신앙을 ‘부족하다’며 평가절하하고, 믿음이 강하지 않다고 단정하는 태도.
블랙 로브 연대에 대한 뉴스들은 분명했다. 그들에게는 올바른 믿음도, 올바른 행동도 없었다. 그러니 나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리였던 것이다. 겸손히 죄를 고백하는, 은혜를 구하는 자. 그래서 그 예배가 그렇게도 불편했던 것일까?
나는 내 ‘겸손한’ 자세가 곧 내 의로움의 증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문득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이 두 사람이 같은 장소에서 기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성전이었다. 믿음의 방향이 잘못되었든 아니든, 그들 모두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 나아오고 있었다.
정치적 성향에 따라 교회 공동체가 점점 나뉘는 오늘날, 솔직히 말하면 나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과 예배드리고 싶다. 잘못된 교인들은 그냥 집에 있으면 좋겠고, 잘못된 목회자들은 이제 그만 좀 보았으면 싶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결코 교회 공동체에 유익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회개의 자리에서 자주 깨닫는다. 물론 건전한 신앙과 바른 삶을 추구하는 공동체는 필요하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복음을 왜곡하는 자들을 경계하라고 말하고(갈 1:7–9), 고린도전서에서는 죄를 계속 짓는 자들과 교제하지 말라 권면한다(고전 5:10–12). 그러나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을 보신다”(삼상 16:7). 이 두 가지 진리를 함께 붙드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예배의 고백문은 우리를 더 깊은 겸손으로 이끈다. 누가 더 회개했는지, 누가 더 진지했는지를 따지기보다 나는 단지 회개하라는 부름 앞에 선 한 사람이다. 정치 성향이 달라도, 죄는 모두를 하나님 앞에 평등하게 만든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나기 전까지 모두 죽어 있는 존재다. 십자가 앞에서는 모두가 같은 자리에 서게 된다.
회개는 또한 우리에게 용서를 가르친다. 옆 사람과 내가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 전혀 일치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은 나에게 용서하라 명하신다. 우리의 죄가 동에서 서까지 멀리 던져져야 할 정도로 크다면(시 103:12), 그 민족주의적 목회자나 나나 모두 절박하게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부활절 주간은 매년 우리에게, 이 세상의 질서를 뒤엎는 예수님의 나라를 다시 보게 한다. 나는 그들이 백악관의 고급 승용차를 타고 오는 대통령보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를 더 매력적으로 느끼게 되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성경 말씀을 진지하게 묵상하다 보면 자신들의 길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동시에, 나는 나 자신의 죄가 타인의 죄보다 더 명확하게 보이기를 기도한다. 감람산에서 예수님을 버리고 권력을 좇았던 베드로처럼, 나도 주님을 버린 순간들을 성령께서 조명해주시길. 갈보리 언덕이 나의 자기의로 드리운 그림자가 되기를.
비어 있는 무덤은 믿음 없던 우리 모두를 향해 놀라운 환영의 입을 벌리고 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