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편의 영화와 100권의 책으로 읽는 창세기] 하나님의 판단 유보는 우리에게 해석을 맡긴 것
하나님에게 판단을 미루는 것은 가장 비겁한 행위(feat. 이찬수 목사)

고향으로 돌아온 야곱과 그의 가족들은 에서의 환대에도 불구하고 에서와 떨어져 살고 싶었다. 야곱은 세겜성에 장막을 치고 난 다음 근처의 밭을 세겜의 형제들에게 샀다.야곱은 거기에서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하였다.(창세기 33장)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간 야곱의 딸 디나를 본 그 지역의 지도자 세겜은 그녀와 성관계(겁탈, 강간. 더럽혔다, 욕보였다-defile로 다양하게 번역된다)를 한다.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뒤틀어지기 시작한다. ‘나갔다’는 단어 yasa(야짜)에는 여러 함축적인 뜻이 있는데 새로 정착한 낯선 동네에서 혼자 나갔다는 정황은 젊은 남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려는 의도로도 읽힐 수 있다. 또는 가부장 사회에서 아버지의 허락없이 집을 떠났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견해도 있다. 여기서 ‘나갔다’는 것은 일종의 가출 의미로 보인다. ‘욕보였다’ ana는 직접적인 성관계를 뜻하는 단어라기 보다는 ‘가졌다(occupy)’,’괴롭혔다’, ‘무시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은유적 표현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폭행이 정당화될 수 없다. 영화 ‘피고인’(The Accused, 감독 톰 토포, 1988년)에서 조디 포스터는 동네 스포츠 바에 노출이 많은 옷을 입고 갔다가 성폭행을 당한다. 작은 시골 마을 여론은 옷을 그렇게 입고 사내들이 많은 곳에 놀러간 조디 포스터를 비난하는 쪽으로 흘러간다. 가해자들이 피고인들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조디 포스터가 피고인처럼 취급된다는 영화다.

디나에게 실제로 그런 ‘불순한’의도가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오롯이 디나에게 책임을 돌릴 성격의 사건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성서는 위험하게도 이 사건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다. 디나는 사건 후에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아버지 야곱은 일단 들판에 나간 아들들이 돌아올 때가지 기다린다. 야곱의 판단은 곧 이야기를 전하는 화자의 의도다. 그래서 앞서 말했듯이 ana라는 모호한 단어를 썼던 것이다. 롯의 딸들이 대를 잇기 위해 아버지와 관계한 이야기, 며느리 다말이 역시 대를 잇기 위해 시아버지 유다와 관계한 이야기가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성폭행만큼이나 ‘더러운’이야기인데 이 사건들에서는 ana로 쓰이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순수 아브라함 족속이 아닌 다른 족속(히위족)과의 결합이기 때문에  '더러움' 으로 묘사되었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이렇게 모호한 디나의 사건을 분석하는데는 메이어 스턴버그(Meir Sternberg)의 방식이 유용하다.  스턴버그는 ‘The Poetics of Biblical Narrative’에서 창세기 34장, 즉 디나의 강간 사건을 성경 서사의 문학적 기법과 독자 반응의 역동성 측면에서 분석한다. 그는 이 사건을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 서사적 긴장을 형성하는 장치로 보고, 성서의 독특한 서술 방식을 강조한다.

스턴버그는 성서의 서사 전략이 정보의 절제(gapping), 시점의 조작(point of view), 반복과 변형(repetition and variation) 같은 기법을 통해 독자에게 특정한 해석의 틀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창세기 34장의 디나 이야기에는 주요한 정보들이 결여되어 있으며, 독자는 이를 보충하려 애쓰게 된다는 것이다. ‘피해자’ 디나의 입장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세겜과 디나의 관계도 사랑인지 폭력인지 명학하지 않다.

또한 스턴버그는 성서가 다양한 시점을 활용하여 사건을 보여주지만, 특정한 방향으로 독자를 유도한다고 분석한다. 세겜의 시점은 강간 후의 시점인지 원래 사랑했던 것인지 불분명하다. 오라버니였던 시므온과 레위의 시점은 그들이 누이의 수치를 씻으려 했다는 식으로 보이지만, 이후 그들의 행동(세겜 사람 전체를 학살)이 과잉 반응인지 정당한 복수인지 독자가 판단해야 한다. 게다가 이 사건에는 하나님의 시점이 부재하고 있다. 독자가 신학적 해석을 하도록 여지를 남기는 전략이다.

그 ‘사건’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은 야곱을 찾아와 디나와 세겜을 혼인시키자며 화해를 청하면서 많은 혜택을 제안한다. 그들이 속한 히위족은 가나안 족 계열인데 이미 에서의 두 아내가 모두 가나안족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지만 에서가 창세기 36장에서 가나안족 여인과 결혼을 한 번 더 하는데 이 때 세번 째 아내 오홀리바마는 확실한 ‘히위계’다.

야곱으로서는 형 에서가 친 가나안인 점을 감안하여 세겜의 땅에서 그들과 가깝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제 나이가 든 야곱은 그가 살아온 기만과 술수의 삶을 정리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들 시므온과 레위의 생각은 달랐다. 디나가 당한 ‘비극’(혹은 사랑일 수도)을 이용해 아버지가 살아온 방식대로 한 몫 크게 챙기고 싶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시므온과 레위, 그리고 디나는 모두 레아의 소생이다. 조선 시대 용어를 빌리자면 레아는 이른바 정실(正室)인 셈이다. 시므온과 레위는 ‘라헬 바라기(다시말해 요셉 바라기)’만 하는 어버지 야곱의 사건 처리 방식에 피해의식을 가졌을 수도 있다.

결국 세겜의 가족들에게 우리 집안과 화친을 맺기 위해서는 모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미끼를 던졌고 그들은 그대로 따랐다. 세겜의 남자들은 할례의 상처가 다 아물기 전, 모두가 엉거주춤있을 때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의 가족들을 몰살하고 모든 재산을 탈취한다. 뒤늦게 야곱이 아들들을 탓했지만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오히려 아들들은 그럼 우리 디나를 창녀로 두라는 말입니까라고 항변한다.

세겜 가문은 예의를 다해 디나를 며느리로 삼고 싶어 했으나 오히려 여동생을 창녀 취급하는 것은 야곱의 자식들이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배신하고 이방인들과 가깝게 지내는, 즉 순수성을 더럽힌 자들의 은유가 창녀였다. 디나의 오라버니들에게 디나가 겪은 사건은 세겜을 공격하기 가장 좋은 명분이었다. 게다가 복수의 정당성을 담보하는 것이니 형제들로서는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그러므로 창세기 34장 이야기는 성폭행에 대한 엄격한 징벌을 요구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여기서 디나의 이야기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이처럼 성서는 여러 인물의 관점을 제시하면서도 어떤 특정한 해석을 강요하지 않고, 독자가 각자의 해석을 하도록 만든다는 것이 스턴버그의 주장이다. 또한 반복과 변형을 성서 서사의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앞서 말한 롯의 딸들이나 다말의 이야기와의 연결성을 봐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화 ‘라스트 듀얼’(The Last Duel, 감독 리들리 스콧, 2021년)은 유럽 역사상 공식적인 마지막 결투를 다룬 영화다. 장(맷 데이먼 분)과 자크(아담 드라이버 분)는 경쟁자이면서 둘도 없는 친구다. 장은 몰락 귀족이 되어버린 가문을 다시 세우기 위하여 모든 전장에 참여해서 공을 세우려고 하지만 승리의 기억은 희미하다. 반면 자수 성가형 자크는 잦은 승리로 좋은 평을 받는다. 라틴어를 구사하며 예술적 식견도 높아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다. 오직 성공에만 눈 먼 장과 여유를 가진 자크의 우정이 불안한 이유다.

장이 집을 비운 사이 자크가 장의 아내 마르그리트를 겁탈한다. 하지만 귀족들의 신뢰가 높은 자크 쪽으로 여론이 기운다. 다시말해 디나를 단정치 못한 여인으로 묘사하려 했던 구약 성서의 어휘 선택처럼 마르그리트가 본래 자크에게 추파를 던지려 했다는 식이다

이제 사건은 재판의 영역이 아니라 신의 영역으로 넘어 간다. 결투란 하나님이 어느 편을 드는지 알려주는 장치라는 생각에서다. 디나처럼 마르그리트의 의견은 철저히 묵살되고 두 남자의 얽히고 설킨 관계가 한 쪽의 승리로 귀결될 것이다. 장은 성폭행 당한 아내보다 그동안 귀족의 후광을 입은 자크에 대한 복수심으로 결투를 성사시켰다. 장에 대한 묘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던 자크 역시 이번 기회에 우열을 확실히 결정지으려 한다.

영화 '라스트 듀얼'
영화 '라스트 듀얼'

장과 자크의 결투에 마르그리트의 결백 혹은 추파 의혹은 설 자리가 없다. 여성을 소유물로 여기던 시대의 사내들이 벌인 유치한 그러나 목숨을 건 장난에 모든 시선은 집중된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결과가 신의 뜻을 반영한다는대. 영화 대사처럼 “옳음 따윈 없어. 사내들의 권력만 존재”할 뿐이다.

창세기 34장에서 디나의 반응은 철저히 은폐된다. 그것이 진짜 성폭행일수도 있지만 성서의 화자는 깊게 개입하지 않는다. 시므온과 레위의 복수로 결론짓지만 그 복수는 레아의 소생들이 야곱을 향해 가졌던 불신, 권력을 향한 욕망의 투사에 다름아니다. 이 욕망 때문에 정작 중요한 불의(성폭행)의 진위는 유보상태가 되어 버린다. 디나가 당한 행위가 폭행이든 사랑이든 간에 그 어느것도 규명하지 못한채 오라비들의 폭력이 모든 것을 삼켜 버렸다

야곱은 마지막 유언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므온과 레위는 단짝 형제다. 그들이 휘두르는 칼은 난폭한 무기다. 나는 그들의 비밀 회담에 들어가지 않으며, 그들의 회의에 끼여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화가 난다고 사람을 죽이고, 장난삼아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다.그 노여움이 혹독하고, 그 분노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들을 야곱 자손 사이에 분산시키고,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흩어 버릴 것이다.(창세기 49:5-7)” 세겜의 학살 사건이 두고두고 걸렸던 것이다.

스턴버그의 주장처럼 성서가 판단을 유보할 때는 그 판단을 독자들에게 묻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뜻은 알 수 없으니 좀 더 기다려 보자는 설교가 복음주의로 둔갑한다. 판단을 유보하면서 더 큰 폭력을 조장하는 ‘스타’ 목사들의 이 행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나님에게는 판단 유보가 없다. 판단 유보처럼 보이는 사건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판단의 책임을 맡겨준 것이다 지금의 내란 사태의 옳고 그름도 판단 못하면서 무슨 목사 짓을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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