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편의 영화와 100권의 책으로 읽는 창세기) 야곱의 브니엘 경험
먼 타향살이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 야곱은 들판에서 잠을 자다가 ‘어떤 이(창세기 32:24)’를 만나 그와 씨름을 하였다. 야곱에게 진 ‘어떤 이’는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었다. 야곱은 새 이름을 얻는 대신 다리를 절게 되었다. ‘어떤 이’는 끝내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야곱은 ‘어떤 이’를 하나님이라 단정하고 그곳을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는 의미의 브니엘로 불렀다.
야곱의 과잉된 자의식이 다시한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가 싸워 이긴 존재는 감히 하나님이었고 그의 얼굴을 보고도 살아남은 사람도 자신이 유일했다고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C.S. 루이스의 소설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의 주제는 한 마디로 “우리가 아직 얼굴을 찾지 못했는데 어떻게 신과 얼굴을 맞댈 수 있겠는가?”다. 프시케와 큐피드의 사랑 이야기에 바탕한 이 소설은 프시케의 언니 오루알을 1인칭 화자로 하여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한 여정을 다룬다. 오루알은 외적인 모습과 내면의 진실 사이에서 갈등을 겪다가 여러 곡절을 거친 뒤 자신의 내면과 신적 진리를 대면하면서 ‘진정한 얼굴’을 발견한다. “우리가 아직 얼굴을 찾지 못했는데 어떻게 신과 얼굴을 맞댈 수 있겠는가?”는 오루알의 최후 독백이다.
야곱이 본 것은 정말 하나님이었을까? 천사였을까? 그는 과연 하나님의 얼굴을 볼 만큼 자기의 얼굴을 찾았을까? 거짓된 인생을 살아온 자신을 돌아보며 새로운 자아 또는 초자아를 발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내면 깊은 곳의 무의식이 발현된 환영일 수도 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발현의 전문가다. C.S루이스와 그의 가상 만남을 소재로 한 영화 ‘프로이드의 마지막 세션’에서 프로이트와 루이스가 나눈 이야기의 주제는 ‘얼굴’ 즉 발현이다.
2차 대전 중 런던 시민들이 이어지는 폭격에 두려워할 때 루이스는 프로이트를 찾는다. 프로이트가 루이스의 책을 읽고 있다는 소문이 루이스를 자극했다. 그가 폄하했던 프로이트, 더군다나 말기암을 앓고 있는 그에게 사과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 모든 것을 ‘성(性)’으로 풀어나가는 그와 한바탕 논쟁도 하고 싶었다. 루이스가 보기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여성의 문제는 남성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프로이트에게 여성은 그저 남근이 부재한 존재로 여겨질 뿐이었다.
프로이트의 미공개 편지가 열람이 가능해진게 2006년이다. 이 편지들에서 “프로이트의 이론들은 아무리 복잡해 보여도 확실한 공통분모를 지녔다. 바로 여성 혐오와 남성 우월주의에 기반한다는 점이다”는 것이 나타났다고 미셸 옹프레는 ‘우상의 추락’에서 주장한다. 2009년 뉴욕에서 연극으로 처음 올려진 ‘마지막 세션’의 극작가는 이 미공개 편지들에 분명히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1년 뒤 파리에서 출판된 ‘우상의 추락’과 달리 프로이트를 ‘추락한’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영화는 프로이트와 루이스 누구도 승자로 결론내리지 않는다. 두 사람 모두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외적으로 어떻게 발현(얼굴)되는가를 고민한다. 루이스가 프로이트 집을 방문해 현관문을 두드릴 때 문앞에는 신화 속 여성으로 보이는 얼굴이 붙어 있다. 영화 마지막에가서 루이스가 떠난 뒤 프로이트는 책상위에 놓여있는 여러 미니어쳐 신상들의 표정을 본다.
다시 야곱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내면이 발현된 환영을 보며 하나님이라 착각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이유는 루이스의 말처럼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있지만 그의 얼굴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바뀌어나가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이것을 얼굴성 또는 탈영토화로 설명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 얼굴성(visageité) 개념은 고정된 정체성, 또는 개인을 특정하는 하나의 단일한 표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한다. 얼굴성은 단순히 사람의 얼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문화적 체계 속에서 특정한 코드나 의미를 부여받은 표상 전체를 가리킨다. 들뢰즈는 얼굴이 단지 생물학적 특징이 아니라 권력, 통제, 의미 부여의 장치라고 보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얼굴은 주체를 규정하고 고착시키는 역할을 하며, 정체성의 틀 안에 갇히게 만드는 기제가 된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고착화된 얼굴성에 대항하여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를 제안한다. 탈영토화란 고정된 체계와 의미를 해체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는 과정이다. 얼굴성은 고정된 틀이지만, 탈영토화를 통해 그 틀은 깨지고, 얼굴은 새로운 의미를 가지는 흐름과 접속하게 된다. 들뢰즈는 얼굴이 더 이상 하나의 표상이 아니라, 움직임과 변화의 과정이 될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찾는다고 본다.
야곱의 씨름 이야기를 들뢰즈의 얼굴성 개념으로 보면, 야곱이 씨름을 통해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는 것은 단순히 신의 고정된 형상을 본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가 탈영토화된 상태로 나아갔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가 본 얼굴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새롭게 발견한 정체성의 일면이자 그 변화 과정에서 드러난 새로운 표상이었다. 들뢰즈적으로 말하자면, 야곱이 본 얼굴은 기존의 코드화된 세계로부터 벗어난 새로운 탈영토화의 순간에서 발현된 ‘얼굴 없는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은 것도 중요하다. 이름, 곧 언어화된 고정된 표상은 하나님의 본질을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얼굴성의 해체를 상징한다. 야곱은 자신의 고정된 자아와 씨름하며 새로운 정체성을 얻었지만, 그 정체성 역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었다.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었다고 해서, 그가 완성된 존재가 된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씨름하는 자, 변화하는 존재로 남는다.
따라서, 하나님의 얼굴은 단일하고 고정된 표상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탈영토화의 과정 속에서 드러난다. 야곱의 여정은 들뢰즈적 얼굴성의 탈영토화를 보여주는 상징적 서사라고 할 수 있다.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끊임없는 탈영토화, 즉 고정된 정체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체성과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자신과 씨름하며 진정한 자아와 만나고, 그 만남을 통해 또다시 나아가는 길이다. 야곱이 절름발이가 되었듯, 탈영토화의 과정은 아프고 고통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하고, 그분이 주시는 새 이름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이 아닐까?
한 편의 영화 : ‘프로이트의 마지막 강의’ (감독 맷 브라운, 2023년)
두 권의 책 : C.S 루이스,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홍성사)
이진경, ‘노마디즘 1’ (휴머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