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문명에 관한 오해나 편견 걸러내고 봐야

이희수, 이희수 교수의 세계도시문화기행 06 중동 고대도시와 문화도시(전자책), 청아출판사, 2014.
이희수, 이희수 교수의 세계도시문화기행 06 중동 고대도시와 문화도시(전자책), 청아출판사, 2014.

누군가의 글이나 말을 접할 때, 그 글과 말을 창으로 삼아 그 시대와 공간 속으로 여행을 떠나곤 한다. 단순히 글쓴이나 말한 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표현을 통해 독자인 내가 직접 주제를 다룰 수 있다. 그래서 글쓰기나 듣기는 가치가 있다.

오늘 다루는 주제는 이희수 교수가 쓴 <이희수 교수의 세계도시문화기행> 중 6번째 책 <중동 고대도시와 문화도시>다. 이 책은 청아출판사에서 2014년에 전자책으로 출간되었다. 책을 읽으며, 나는 이집트로 향했다. 저자인 이 교수의 언급에 동의하는 부분도 있고, 의문을 품게 하는 부분도 있다. 이 글은 그 의문들에 대한 재탐구의 흔적이다.

 

Headband with Heads of Gazelles and a Stag Between Stars or Flowers ca. 1648–1540 BCEMetropolitan Museum of Art, CC0, via Wikimedia Commons
Headband with Heads of Gazelles and a Stag Between Stars or Flowers ca. 1648–1540 BCEMetropolitan Museum of Art, CC0, via Wikimedia Commons

이집트는 3,500년 전 처음 힉소스(Hyksos)의 침입을 받은 이후 수많은 이민족의 침입과 약탈을 경험했다. 기원전 8세기에는 에티오피아의 지배를, 그 뒤에는 페르시아와 알렉산더 제국의 통치를, 그리고 서기 7세기부터는 이슬람 세력에게 정복을 당했다. - 이희수, "이집트 - 카이로 고대 이집트 문명의 보고", <이희수 교수의 세계도시문화기행 06 중동 고대도시와 문화도시>, 청아출판사, 2014.

3,500년 전은 힉소스가 이집트를 침입한 시기가 아니라 쫓겨난 이후이다. 힉소스의 이집트 유입과 지배 시기, 기간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대략적으로는 기원전 1650~1550년 사이 15왕조로 일컫는 시기에, 이집트 카이로 북쪽, 나일강 하류 삼각주 지역을 지배했다. 이집트 전체 지역이 아니었다. 

로마제국의 지배를 언급하면 더 좋을 듯했다. B.C. 30 ~ A.D. 616이 로마와 비잔틴 제국의 지배가 이어졌다.

 

ⓒ 김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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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카이로에는 아랍의 이집트 정복을 상징하는 아무르 사원(Gammi Amru)과 동방 기독교의 일파인 콥트 교회(Coptic Cairo)가 있고, 이슬람 지역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인 알 아즈하르(Al-Azhar)가 있어 전통적인 아랍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 이희수, "이집트 - 카이로 고대 이집트 문명의 보고", <이희수 교수의 세계도시문화기행 06 중동 고대도시와 문화도시>, 청아출판사, 2014.

아무르 사원은 아므로 이븐 알-아쓰 사원 Amr ibn al-As ( مَسْجِد عَمْرِو بْنِ الْعَاصِ, Masjid ʿAmr ibn al-ʿĀṣ) 이다. 콥트 교회와 Coptic Cairo는 다른 것을 가리킨다. 콘트 교회는 이집트 정교회를 뜻하고, 콥틱 카이로는 카이로의 고대 기독교 구역, 흔히 올드 카이로(Old Cairo, Maṣr El-ʾAdīma)의 일정 구역을 가리킨다.

 

ⓒ 김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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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오만이 불멸한다던 믿음은 점차 확대되어 귀족이나 일반 대중도 영생의 사후 세계를 위해 미라를 준비했다. 미라의 대중화가 이루어지면서 집집마다 한두 개의 미라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살아 있는 미라와 현대인, 진정 그들은 5천 년이라는 시공의 단절을 메우며 공존하고 있었다이희수, "이집트 - 카이로 고대 이집트 문명의 보고", <이희수 교수의 세계도시문화기행 06 중동 고대도시와 문화도시>, 청아출판사, 2014.

"집집마다 한두 개의 미라를 갖게 되었다"는 서술은 많이 낯설다.

 

ⓒ 김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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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 테베(Thebes)라 불렸던 이집트 남쪽에 위치한 룩소르(Luxor)는 조각과 신전들의 도시다. 룩소르 신전, 메디나트 하부 신전(Medinet Habu, 람세스 3세 신전), 카르나크(Karnak) 신전은 물론, 이집트 신왕국 시대의 뛰어난 파라오 람세스 2세(Ramesses II, B.C.1303?~B.C.1213?년)의 무수한 동상들이 도시를 압도한다. 인류의 온갖 지혜와 과학적 지식이 총동원된 고대 문명의 압축이다. 이희수, "이집트 - 룩소르  이집트 대중의 시대가 열렸던 곳", <이희수 교수의 세계도시문화기행 06 중동 고대도시와 문화도시>, 청아출판사, 2014.

사소하지만, 전문가의 표현은 정밀함을 필요로 한다. 동상이 아니라 석상이다.

 

ⓒ 김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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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 일대가 대피라미드로 연상되는 이집트 고왕국의 중심이라면, 남쪽의 테베는 침입자 힉소스의 지배를 종식시키고 아모세 1세(Ahmose I)가 새로운 이집트를 건설한 곳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이집트 왕 파라오는 태양신, 살아 있는 신으로서 신정 정치를 펼쳤다. 하지만 파라오는 결국 침략자 앞에 무릎을 꿇었고, 이로 인해 신의 아들로서 그의 권위는 크게 손상되었다.

그러자 아모세 1세 이래 신왕국으로 접어들어 귀족과 사제들의 세력이 성장하면서 대중의 의식에도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파라오만이 부활하여 영생불멸한다는 믿음에 의문이 생겼고, 귀족과 대중도 내세의 주인공이 되려 했다. 그들도 미라와 피라미드를 만들어 사후의 거주 공간을 준비하였다. 이제 이집트 신화는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으로 대중의 삶을 대변해 주게 되었다. 파라오 중심의 역사에서 이집트 대중의 시대가 열렸던 곳이 바로 테베, 오늘날의 룩소르 일대이다. 이희수, "이집트 - 룩소르  이집트 대중의 시대가 열렸던 곳", <이희수 교수의 세계도시문화기행 06 중동 고대도시와 문화도시>, 청아출판사, 2014.

고대 이집트의 신왕국 시대를 대중의 시대로 부를 수 없다. 대중들이 미라와 피라미드를 만들 수 있는 시대는 없었다. 고대 이집트 신화가 대중의 삶을 대변해준 시대도 아니었다. 여전히 파라오와 신들의 제국이었을 뿐, 대중의 시대가 열린 시기가 아니었다. 이미 고왕국 시대부터 파라오와 더불어 귀족도 내세의 주인공이 되려 했다. 오히려 신왕국 시대의 룩소는 파라오 중심의 시대가 더욱 강화된 현장이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 김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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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베의 주신은 이집트 창세 신화에 등장하는 신인 아몬(Amon)이었다. 이곳의 수많은 신전은 아몬을 위한 것이다. ‘정성된 성스러운 땅’ 카르나크의 40만 평에 얼마나 많은 신전이 지어지고 또 폐허가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100개의 관문을 가진 거대한 도성’이었다는 호메로스의 표현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이희수, "이집트 - 룩소르  이집트 대중의 시대가 열렸던 곳", <이희수 교수의 세계도시문화기행 06 중동 고대도시와 문화도시>, 청아출판사, 2014.

"룩소의 수많은 신전"이 아몬 신 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아몬이 수많은 신 가운데 중심을 이룰 뿐이다. 가방 구별된 장소, 엄선된 장소인 카르낙 신전의 경우, 아몬 레와 아몬 레의 아내 무트 신, 아들인 달신 콘수, 전쟁 신 몬투 등을 위한 공간이 공존한다.

고대 도시 테베 지역은 9만 3천 평방킬로미터(약 2.8만평) 정도였다. 테베(고대 룩소)의 한 곳이 카르낙(신전)이다. 당연히 카르낙 신전은 테베보다 작은 구역이다. 최대 2.4만평 정도이다.

The city of Thebes covers an area of around 93 square kilometres, and walking around the major parts of the city – depending on how hot it is – will be possible since major parts of the city are all located across the East bank of the Nile. - 영국박물관 블로그 https://www.britishmuseum.org/blog/historical-city-travel-guide-thebes-egypt-13th-century-bc

 

북쪽의 카르나크 신전에서 양 머리 형상을 한 스핑크스의 행렬은 10킬로미터를 이어 남쪽의 룩소르 신전까지 연결되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군데군데 폐허의 잔해만이 3,500년 연륜의 역사를 초라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이희수, "이집트 - 룩소르  이집트 대중의 시대가 열렸던 곳", <이희수 교수의 세계도시문화기행 06 중동 고대도시와 문화도시>, 청아출판사, 2014.

이 길은 스핑크스 길로 부르며, 2.7킬로미터 정도이다.

Magli, Giulio. (2018). Architecture, Astronomy, and Sacred Space: The Case of the Avenue of the Sphinxes. 10.1007/978-3-319-65274-0_3. 

 

그리스의 파르테논은 지금 유네스코가 지정한 인류문화유산 제1호이지만 카르나크의 의의와 존재를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는지. 이희수, "이집트 - 룩소르  이집트 대중의 시대가 열렸던 곳", <이희수 교수의 세계도시문화기행 06 중동 고대도시와 문화도시>, 청아출판사, 2014.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질문을 많이 하는 듯, 유네스코 홈페이지에도 "Q. 유네스코 세계유산 제1호는 파르테논 신전이다?" 제목의 글이 담겨 있다.

유네스코 로고와도 닮은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그래서인지 적지 않은 분들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제1호는 파르테논 신전이 아니냐는 질문을 합니다. 하지만 파르테논 신전은 유네스코 제1호 세계유산이 아닙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최초 등재된 곳은 하나가 아니라 총 12곳인데요, 1978년 등재된 유산들로, 폴란드의 비엘리츠카 소금광산, 에콰도르의 갈라파고스 제도, 세네갈의 고레섬, 미국의 옐로스톤 국립공원 등이 있습니다.

파르테논 신전 또한 1987년 등재된 그리스의 유산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안에 포함되어 있지만, 파르테논 신전이 단일하게 등재된 것은 아니며, 더욱이 세계유산 제1호도 아니라는 사실, 이제 확실히 알아두면 좋겠죠? -https://url.kr/gkjog9

참고 https://heritage.unesco.or.kr/_years/1978%EB%85%84/

세계문화유산은 1978년에 등재가 시작되었다. 파르테논 신전이 포함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는 1987년에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고대 테베와 네크로폴리스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은 1979년의 일이다. 이집트 룩소 지역이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지역보다 훨씬 앞서 등재되었다. 

 

ⓒ 구글지도
ⓒ 구글지도

룩소르의 신전들은 태양이 떠오르는 나일 강의 동편에 있다. 그리고 태양이 지는 나일 강의 서편에는 예외 없이 이집트인들의 묘지가 있다. ‘네크로폴리스(Necropolis)’라 불리는 서쪽 강변의 거대한 ‘죽음의 도시’에는 파라오의 무덤군으로 유명한 왕가의 계곡과 왕비의 계곡, 장제전(장례를 지내는 장소)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희수, "이집트 - 룩소르  이집트 대중의 시대가 열렸던 곳", <이희수 교수의 세계도시문화기행 06 중동 고대도시와 문화도시>, 청아출판사, 2014.

룩소 지역 나일강 서쪽의 장제전은 한 곳이 아니다. 핫쉡수트 여왕(Mortuary Temple of Hatshepsut)을 비롯하여, 세티 1세(Mortuary Temple of Seti I), 투트모세 3세(Mortuary Temple of Thutmose III) 등의 장제전이 있다. 장제전을 두고 "장례를 지내는 장소"라는 서술은 적절하지 않다. 나일강의 서쪽에도 수많은 신전이 존재한다.

ⓒ 구글지도

또한 현대 이집트인의 묘지는 나일강 동쪽에도 존재한다. 공동묘지는 나일강 동쪽 서쪽의 문제가 아니라, 일상 생활 공간에 자연스럽게 닿아 있다.

 

ⓒ 김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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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과 불멸 사상은 귀족과 일반 대중으로 파급되었고, 작은 규모의 수많은 피라미드가 룩소르의 네크로폴리스를 뒤덮었다. 하지만 그 피라미드들은 대부분 쉽게 손상되었고 도굴되었다. 그러자 파라오들은 깊은 계곡에 암벽을 뚫고 아무도 모르는 암굴 무덤 속에서 내세를 추구하였다.이희수, "이집트 - 룩소르  이집트 대중의 시대가 열렸던 곳", <이희수 교수의 세계도시문화기행 06 중동 고대도시와 문화도시>, 청아출판사, 2014. 

"작은 규모의 수많은 피라미드"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호하다. "룩소르의 네크로폴리스를 뒤덮었다"는 표현이 적절한 것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 김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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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이에 등극하여 열여덟 나이로 요절한 3,400년 전 투탕카멘의 왕묘는 이렇게 발견되었다. 그러나 놀라운 사건에는 그에 걸맞은 어둠이 따르기 마련인데, 이른바 ‘파라오의 저주’다.

이는 1923년 카나번 경이 모기에 물려 죽는 것으로 시작해, 2~3년 내에 투탕카멘의 발굴에 관여했던 20여 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다. 왕묘 입구의 관 위에는 ‘왕을 방해하는 자에게 죽음의 날개가 펼쳐지리라’는 구절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투탄카문의 무덤 입구에 위와 같은 경고문이 있었다는 말이 돌고 있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영국 이집트학자인 Charlotte Booth는 그의 책에서 아래와 같이 서술한다.

이집트에서 발굴된 수천 개의 무덤 중 도굴꾼을 막기 위한 '저주'가 있는 무덤은 몇 개 있지만 투탕카멘의 무덤은 그렇지 않았다. Of the thousands of tombs excavated in Egypt, a few do have a ‘curse’ to deter tomb robbers but Tutankhamun’s was not one of them. - Charlotte Booth, The Boy Behind the Mask, Oneword, 2007,  p. xvi.

 

ⓒ 김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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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본 것처럼, 저자의 해석의 다양성보다는 사실 관계가 다른 부분이 적지 않다. 이 책이 2014년에 출간되었지만, 해당 글은 2000년에 여행신문에 먼저 실렸다(참고:https://www.travel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388). 이집트 여행기는 여행신문에 2000년 7월 17일~8월 21일 사이에 6회 연재되었다.

연재된 2000년과 책으로 출간된 2014년 사이에는 시간이 적지 않게 흘렀다. 위에서 살펴본 내용은 편집 과정에서 충분히 다듬어지지 않았다. 저자의 글에 담긴 주장과 관련해 사실에 대한 점검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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