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상훈 이주영 사제 부부 @  미주뉴스앤조이 
 배상훈 이주영 사제 부부 @  미주뉴스앤조이 

“가족사 배경이 서로 닮아 있는 사제 부부”

미국성공회 교인수는 200만 명에서 300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 미국 개신교 숫자가 전체적으로 수천만 명이 넘는 것을 감안하면, 매우 작은 교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 역사에서 성공회는 종교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적으로도 매우 큰 의미와 위치를 갖고 있다.
그러나 한인 교회와 이민자들은 미국성공회에 대해서 이해가 부족하거나 아예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미국 기독교의 역사에서 성공회는 회중교회와 함께 가장 오래된 교회다. 1600년대에 미국 교회는 성공회와 회중교회가 90퍼센트 이상을 차지했다.
그러나 현재 두 교회는 5퍼센트 미만의 군소 교단으로 전락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레잇넥성공회교회(All Saints Episcopal Church, Great Neck)는 1886년에 설립된 교회다. 올세인트교회에 ‘한인성공회교회’가 만들어지기까지는 4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 
1975년 맨해튼의 성요셉 교회에서 시작하여, 퀸즈의 아스토리아 교회와 플러싱의 성요한 교회를 거쳐서, 현재의 그레잇넥 올세인트교회에 자리를 잡았다. 2015년, 배상훈 신부가 이 교회의 7대 교구 목사(Rector)로 부임하였다.
그의 아내 이주영 신부는 맨해튼에 있는 뉴욕 교구의 성 토마스교회(Saint Thomas Church, Manhattan)에서 아시아인 사역과 한국어 미사를 책임 맡고 있다. 배상훈(요셉) 신부와 이주영(프리스카) 신부를 만나서, 미국성공회의 역사를 돌아보고, 두 사람의 만남과 사목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주영(프리스카) 신부 @ 미주뉴스앤조이
 이주영(프리스카) 신부 @ 미주뉴스앤조이

우선 이주영 신부의 삶과 이력이 궁금하다. 현재 가톨릭은 여성 사제를 허락하지 않는다. 2013년, 로마 교황 프란치스코는 이 문제에 대하여, “문은 닫혀 있다. 그리고 교회는 이미 안 된다고 결정을 내렸다”라고 말했다. 남아공의 여성 사제 다이앤 윌먼은 “교회 내의 남녀 차별은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인종차별과 같다”라고 말했다. 이신부는 그녀의 말에 대해서 깊이 공감한다고 말했다. 교회는 인종, 성별, 계급, 장애 등 어떤 이유든 간에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기독교의 근본 정신을 훼손하는 것이다. 개신교의 보수 교단들도 여전히 여성의 목사 안수를 허락하지 않고 있다.

미국성공회가 여성에게 첫 사제 서품을 준 것은 1974년이다. 필라델피아교회의 은퇴한 주교 세 명이 11명의 여성 부제들에게 사제 서품을 주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성공회 역사는 이 사건을 ‘Philadelphia Eleven’이라고 부른다. 여성에게 사제 서품을 부여한 첫 시작이었다. 이 사건이 벌어진 후, 1997년 총회에서 “어떤 교구도 단지 단지 성별을 이유로 성소 지망자 자격을 박탈하거나, 성직자의 집례 허가를 거부하는 것을 방지한다”는 교회법을 제정하게 되었다. 한국의 대한성공회가 여성에게 사제 서품을 수여한 것은 2001년에 가서야 시작되었다.

이주영 신부는 선배들의 노력으로 무난하게 사제 서품 받을 수 있었다. 그녀에게 사제의 길을 가도록 가장 크게 영향을 준 것은 가족의 뿌리와 배경이었다. 첫번째로, 증조부가 성공회 신부님이셨다. 대한성공회 역사에서 한인으로서는 매우 이른 시기에 사제 서품을 받은 분이셨다. 증조부께서는 북한 선교를 위해서 지원하셨다가 한국전쟁을 맞닥뜨렸다. 그는 모든 교인들을 피난시킨 후, 자신은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북한에 홀로 남았다.

이후 그의 소식은 들을 수가 없었다. 성공회는 증조부를 순교자 명단에 올렸다. 그의 삶과 이름은 성공회 역사에 전승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역사에도 그대로 전수되었다. 할아버지는 증조부의 신앙과 삶을 그대로 이어 받으셨다. 돌아가시기 전에 10년 정도를 하바신 마비로 지내셨지만, 언제나 밝고 평안한 모습을 보여주셨다.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사신 할아버지는 평생에 성공회 기도서를 지니고 다니셨다. 거의 닳아빠진 그 기도서는 자손들에게 남겨주신 가장 귀한 유산이 되었다. 이신부는 어릴 때부터 증조부가 물려준 신앙의 유산 속에서 자라났다.

 배상훈 신부(요셉) @ 미주뉴스앤조이
 배상훈 신부(요셉) @ 미주뉴스앤조이

배상훈 신부 역시, 이신부의 가족사와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한국성공회 역사에서 역사적인 인물로 기억하는 분이셨다.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왔을 때, 그 신부님들을 보좌하면서 심방도 대신 다녔을 뿐 아니라 세례도 직접 주었다. 정식으로 사제 서품을 받지는 못했지만, 성공회 기도서를 모두 외우고 수사들처럼 동일하게 성무일 기도를 하셨다. 그는 거의 사제처럼 동일하게 사역을 하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신앙을 이어 받아서 정식으로 신부가 되셨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신앙보다 한 발 더 나가셨다. 그는 실천하는 믿음을 강조하셨다. 나는 가난한 삶이 싫어서 아버지에게 대들기도 했다. 그럴 때에 아버지는 동문서답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꼭 신부가 되겠다. 너도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는 주님의 종이 되거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신다. 나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인간의 존엄성과 선함을 믿고 모두를 용서해야 한다. 여자도 남자와 서로 다를 것이 없다. 오히려 여자들이 더 훌륭하다.”

이주영 신부의 아버지는 평신도였지만, 사제 못지 않은 신앙의 삶을 사셨다. 그도 증조부와 할아버지의 신앙 유산을 그대로 이어가셨다. 이신부가 어릴 때 뉴욕에서 4년 간 살았다. 아버지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한인 성공회 교회 개척을 위해 온 힘을 쏟으셨다. 모든 교회 개척의 역사는 한 사람이 ‘일당백’을 역할을 해야 한다. 그는 기본적인 봉사와 섬김에서 신자 회장과 성가대 대장까지 직장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 그곳이 바로 현재 남편, 배신부가 섬기는 <올세인트그레잇넥교회> 한인공동체의 시작이었다. 신앙의 유산을 통해 세대 간이 만나고, 동과 서가 연결되고, 남과 여가 하나로 연합되고, 성공회 역사와 하나님나라 운동이 이어지는 것이다.

이주영 신부 @미주뉴스앤조이
이주영 신부 @미주뉴스앤조이

“어릴 때부터 가져온 꿈이 곧 사제의 길이 되다”

이주영 신부는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와 신학대학원을 졸업했고, Union Theological Seminary에서 수학한 후 미국성공회 롱아일랜드 교구에서 성직 과정을 밟았다. 배상훈 신부는 중학교 2학년 때 미국으로 왔다.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종교학을 공부하고 예일대학교신학대원을 졸업했다. 이후 시베리-웨스턴 신학대학원(Seabury-Western Theological Seminary)에서 수학한 후 버지니아 크라이스트교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2000년, 성공회 컨퍼런스에서 두 사람이 만났다. 이신부는 한국에 있었고, 배신부는 미국에 있었을 때다. 2007년, 배신부가 이신부를 다시 찾아 왔다. 그녀는 그의 프로포즈를 받은 후 고백했다. "나는 사모의 부름이 아니라, 사제의 부름을 받았다." 그 때 배신부는 사모를 찾는 것이 아니라 동반자를 찾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동반자’가 되었다.

이주영 신부에게 사제의 소명과 신앙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사제의 소명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곧 하느님의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과 함께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신앙의 핵심은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분과 하나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웃 안에 계신 하느님을 보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배상훈 신부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사제의 소명은 “성사와 말씀과 행동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그런 자리와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각 개인이 성령께서 주신 은사를 공동체 안에서 섬기고 세례 언약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신앙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사랑 받는 사람인가를 깨닫고, 그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나처럼 소중하다는 사실을 느끼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이주영 신부는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의 삶에 큰 영향을 받았고, 또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섬기는 신앙 안에서 자랐다. 그녀가 설명하는 소명과 신앙의 핵심에는 ‘섬김과 삶’이라는 단어가 키워드로 쓰인다. 배상훈 신부 역시 할아버지의 삶에 큰 영감을 받았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실천하는 삶의 배경에서 자랐다. 그가 설명하는 소명과 신앙의 핵심에는 유난히 ‘사랑’이라는 단어가 키워드로 사용되었다. 두 사람이 강조하는 ‘섬김과 사랑의 삶’에서 성공회 사제로서의 인격과 기품이 느껴진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종교적 수사일 수도 있겠지만, 두 사람의 말에서 전해지는 진지함과 무게감은 남다르다.

 이주영 신부 @ 미주뉴스앤조이
 이주영 신부 @ 미주뉴스앤조이

이주영 신부의 삶에서 사제의 길은 뭔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소위 세속적인 삶과 거룩한 삶의 구분이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선택을 위해서 뭔가의 특별한 체험이 굳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냥 자라온 배경이 신앙의 삶이며 사제의 길이었다. 그녀가 특별하게 관심을 갖고 있는 생태신학과 영성신학도 이런 맥락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또한 배상훈 신부의 삶에서도 사제의 길은 별로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가 아버지에 대해서 저항 혹은 반항했던 유일한 이유가 “왜 우리 가족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더 보살펴 주십니까”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월급 봉투를 받은 적이 없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런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에서 사제의 길이 무엇인지는 일찍부터 깨달았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길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신부의 길을 꼭 가겠다.” 지금 그가 사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특별한 선택이 아니라 그냥 아버지의 길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것일 뿐이다. 두 사제가 동일하게 영성의 삶을 추구하고, 사랑과 섬김이라는 신앙을 강조하는 이유가 이런 맥락 안에 있음을 엿보게 된다.

이신부는 성공회 신학의 세 기둥을 성서, 전통, 이성이라고 말했다. 세 기둥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침없이 동등한 권위를 갖고 서로 균형을 이룬다. 이것이 성공회 신학의 두드러진 특징이며, ‘전통과 이성’의 영역을 강조하는 것은 개신교와 차별점이 될 것이다. 또한 교회 위계 구도와 결정 방식이 비교적 민주적이라는 점은 가톨릭 교회와 다른 점이 될 것이다. 배신부는 성공회 신학의 특징을 ‘중도’라는 키워드로 설명하였다.

중도란 개념은 단순히 타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을 찾아내어 화합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이런 면에서 성공회는 개신교와 가톨릭을 이어주는 다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초대교회의 순수한 믿음을 토대로 하고, 그 위에서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가며, 성서와 이성이라는 렌즈를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찾아가는 것이 교회일 것이다. 어쩌면 성공회의 교회 공동체 모습이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에서 고민하는 분들에게 새로운 ‘대안’(alternative)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망을 갖고 있다. 미국성공회 소속인 두 한인 사제가 이러한 신학과 신앙고백을 하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과연, 미국성공회는 그동안 어떤 역사적인 길을 걸어왔을까?

“미국교회의 역사와 교파의 흐름들”

유럽인들의 미대륙 진출은 새로운 땅을 향한 열망으로 시작된 것이었지만, 그 안에는 강력한 종교적 동기가 훨씬 더 컸다. 이들은 1500년대 초반부터 카리브 지역과 멕시코에 들어가 아스텍, 마야 문명을 멸망시키고 자신들의 종교인 가톨릭를 전파했다. 콜럼버스의 계획을 승인하고 함대를 내준 스페인의 국왕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 부부는 무슬림과 유대인을 몰아내고 강력한 기독교 국가를 세우는 것이 목표였다. 콜럼버스 역시 매우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가 탄 배 이름은 ‘성 마리아’였고, 항해 중에 쓴 모든 기록물은 “예수와 마리아 우리의 항해와 함께 하소서”라는 글로 시작하였다. 그가 처음으로 도착한 곳에서 왕관을 쓴 십자가가 새겨진 깃발을 꽂고, 그 섬 이름을 ‘거룩한 구세주’를 뜻하는 산 살바도르(San Salvador)라고 지었다.

한편 영국 성공회의 북미 대륙 진출은 종교개혁을 마무리한 엘리자베스 1세의 재위 기간 중인 158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뉴펀들랜드, 노스캐롤라이나, 버지니아 연안에 대한 탐사가 이루어지고, 대서양 연안에 발견된 모든 땅을 독신으로 지낸 여왕을 기념하여 ‘버지니아’라고 명명하였다. 1607년, 영국이 북미 대륙에 최초의 버지니아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그곳에 제임스타운이라고 하는 성공회 정착촌이 세워졌다. 1619년, 최초의 식민지 의회인 ‘버지니아 의회’는 북미 대륙를 성공회가 지배하는 국가로 만든다는 선언을 했다.

영국의 버지니아 식민지 진출이 막 시작되었을 무렵, 런던 북부의 노팅엄에 살던 한 작은 분리파 공동체가 네덜란드로 이주하여 숨어 지내다가, 국왕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 후 제임스 1세에게 버지니아로 가는 허락을 받았다. 1620년 9월, 이들 분리파 ‘순례자’(Pilgrims)와 상업적 이주민들을 태운 메이플라워(Mayflower)호가 북미 대륙 버지니아를 향해 영국 플리머스를 출발했다.

3개월이 지난 후, 이 배는 목적지가 아니라 지금의 매사추세츠주 케이프 코드(Cape Cod)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1628년, 존 엔디코트(John Endicott)가 60명의 청교도를 이끌고 살렘(Salem)에 와서 정착하는데 성공하였다. 1630년대 말까지 청교도들이 살렘으로 몰려오면서 곧 두 번째 도시인 보스턴(Boston)이 만들어졌고, 이후 총 16,000여 명의 청교도들이 밀려와 뉴잉글랜드에 정착하게 되었다. 청교도들이 뉴잉글랜드에 건설한 교회는 엄격한 칼뱅주의를 따랐으며, 전통적인 성공회의 감독(Episcopal) 제도를 거부하고 회중교회제도(Congregationalism)를 선택하였다. 1636년, 회중교회가 세운 하버드대학은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들의 종교적 이상을 재생산해 나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1690년대 이전까지, 북미 식민지 전체 교회의 90퍼센트가 성공회 아니면 회중교회였다. 그러나 1776년 미국 독립선언을 기점으로 하여, 1850년대에 이르면 각 교파 간의 교세는 완전히 역전되고 만다. 북미에서 최대 교파였던 회중교회는 4퍼센트의 중소교단으로 몰락하고, 성공회도 3.5퍼센트로 금감했다. 이와는 반대로 2.5퍼센트에 불과했던 감리교는 34.5퍼센트라는 압도적인 수치로 최대 교단이 되었고, 침례교는 20퍼센트가 넘는 2위 교단이 되며, 그 다음으로 장로교, 루터교, 개혁교회, 퀘이커, 메노나이트 등이 줄을 이었다. 한편 1.8퍼센트에 불과하던 가톨릭이 크게 성장하여 감리교, 침례교 다음으로 큰 교세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미국교회의 신학과 교세 변화는 미국사회의 역사와 함께 역동적으로 변해 왔다. 미국의 독립 전쟁과 남북 전쟁은 가장 큰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독립전쟁은 많은 교회에 큰 손실과 상처를 남겼다. 미국의 독립을 찬성하여 적극적으로 나선 교회도 있었고 그 반대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교회는 중립을 유지하거나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독립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였느냐와 상관없이, 미국 독립전쟁의 소용돌이를 피해갈 수 있는 교회는 없었다.

특히 교단 전체가 영국 국왕에게 충성하고, 미국 식민지의 독립을 반대했던 성공회는 가장 큰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많은 성공회 교회들이 파괴되었고 성직자들이 고통당했다. 독립전쟁 중에 4/3의 성공회 성직자들이 영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이 독립하자 영국성공회는 공식 종교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 1789년, 미국성공회는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였다.

이후, 미국의 교회사에서 가장 큰 종교적인 사건은 제2차 대부흥운동이었다. 이 운동에 대하여 어떤 신학적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서, 각 교회들의 교세가 흥하거나 쇠하였다. 불행하게도 성공회는 이 시기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고, 미국 독립전쟁의 상처에 이어 또 한번 자신들의 기득권에 안주하는 선택을 하면서, 미국사회의 변화를 오랜 시간 동안 따라가지 못했다.

1800년대, 한 천막 집회에서 시작된 ‘천막 부흥회’는 감리교와 침례교가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 분기점이 되었다. 이들은 민중들 속으로 파고 들어서 크게 성공하였다. 그러나 성공회와 회중교회는 부흥회를 따르는 사람들를 ‘천한 서민’(ignoble vulgus)이라고 폄하했고, 집회 방법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신학교육을 요구하지 않고 누구든지 ‘부흥사’로 나설 수 있었던 감리교와 침례교의 부흥운동을 엘리트 주류 교단들은 경쟁하기가 어려웠다. 부흥운동의 다른 한쪽 끝에는 유니테리언-유니버셜리즘(Unitarian-Universialism) 운동이 있었다. 뉴잉글랜드 지역의 지식인 사이에서 나왔으며, 칼뱅주의 전통을 전면 거부한 이 운동은 회중교회의 진보주의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면서 회중교회를 분열시켰다.

올세인트 그레릿넥 성공회 교회 @ 미주뉴스앤조이
올세인트 그레릿넥 성공회 교회 @ 미주뉴스앤조이

“성공회가 뭐에요, 혹시 이단인가요?”

21세기 미국교회는 새로운 도전 앞에 서 있다.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는 이 국면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성공회가 뭐에요, 혹시 이단인가요?” 60대의 어느 교인이 던진 질문이었다. 그는 평생 동안 교회를 다녔고 장로까지 지낸 분이다. 이 분이 생각하는 기독교는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순복음교, 성결교’ 등이다. 성공회와 회중교회 그리고 가톨릭은 기독교가 아니다. 메노나이트와 퀘이커 등 소수 종파는 기독교이기는커녕 마귀의 집단들일 뿐이다. 왜 이렇게까지, 한국의 보수 개신교 사람들은 차별 의식을 갖게 되었을까? 자신들만이 ‘주류’라는 자의식 때문이다.

‘역사는 반복된다’라는 말이 있다. 현재 미국교회의 지형은 17-18세기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주류와 비주류가 바뀌어 있을 뿐, 별로 달라진게 없다. 일종의 평행 이론인 셈이다. 식민지 초기에 주류 교단으로서 큰 교세를 자랑하던 성공회가 지금은 군소 교단에 불과하다. 이 당시에 감리교는 매우 왜소한 교단이었다. 현재 감리교는 크게 분열하고 있으며, 성공회는 매우 안정적이다. 그동안 성공회는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길을 많이 보여주었다.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하는 교회가 되었으며, 사회 정의를 위해 목소리를 내고, 소수자 인권을 위해 가장 먼저 앞장 섰다. 여성에게 사제 서품을 준 것도 가톨릭과 개신교보다 앞섰다. 한국성공회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공헌한 바가 매우 컸다.

배상훈, 이주영 신부가 강조하는 목회의 제일 중요한 기본은 ‘인간의 존엄성’이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약속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실천해가면서,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우리 스스로가 사랑 안에 거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남을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그런 삶이 바로 인간의 존엄성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자꾸 나누게 된다. 벽을 쌓고 편을 가른다. 그것이 동성애 이슈일 수도 있고, 나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그럴 수도 있고, 정치적으로 다른 생각 때문에 생길 수도 있다. 특히 이민생활을 하다보면 더욱 좁게 될 수밖에 없다. 많이 외로울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점점 더 벽을 쌓게 된다. 다민족, 다문화 이런 생각이 매우 중요하지만, 언어적인 어려움 때문에 쉽게 접근하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는 교회 사목과 생활을 하면서 ‘미스틱’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미스티시즘’(mysticism)을 신비주의라고 한다. 이 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어떤 신비로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을 의미한다. 이런 신앙을 ‘미스틱’이라고 부른다. 교인들이 성장하면서 ‘예수님을 닮아가고, 일상에서 예수님을 느끼며 생활할 수 있는’ 신앙을 도와주고 싶다. 기도와 영성 훈련을 통해서 ‘미스틱’ 신앙을 가질 수 있다. 그 신앙이 바로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에게 받은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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