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노나이트를 만나서 반공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다”
아시안화해센터(ReconciliAsian)에서 디렉터로 일하고 있다. 미국사회에서 왜 ‘화해’(reconciliation) 사역이 필요한가? ‘이민’이라는 자체가 복합적인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이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돕기 위해서 하는 사역이다. 이민자들을 구제 차원에서 돕는 사역이 아니다. 각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 지 서로서로 이해하도록 도와주고, 올바른 가치관과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함께 하는 운동이다. 그러기 때문에 운동의 형태는 큰 조직이나 단체가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는 매우 작은 소그룹으로 진행한다. 보다 더 중요한 방향은 ‘전문가’ 사역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사역은 매우 일상적으로 함께 살아가면서 진행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몸집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작은 운동을 지향한다. 그리고 이런 소그룹 형태의 운동이 여러 지역에서 계속 확장되어 나가야 할 것이다.
나는 종종 ‘소셜 디자이너’라는 말을 듣는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일을 좋아하다 보니까 그렇게 보였는지 모르겠다. 사람을 연결하다 보면 거기에서 자연스럽게 일이 생긴다. 또 한편 사람들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툭 던진다. 당신은 어쩌다가 메노나이트 소속 목사가 되었나? 그리고 지금 시대에 왜 아나뱁티즘(Anabaptism) 운동을 하는가?
긴 이야기가 필요하지만 짧게 요약해 보면 이렇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반공주의 세대의 인물이시다. 내가 자란 교회는 김장환 목사의 침례교회다. 나는 어릴 적부터 학교를 가든, 교회를 가든, 집에 들어오든, 반공주의의 그늘에서 자랐다. 매주 교회에서는 모든 설교가 기승전 ‘반공’으로 끝났다. 나는 당연히 기독교의 본질이 반공주의 사상인줄 알고 자랐다. 기독교의 적은 공산주의이고, 그 적과는 반드시 싸워서 이겨야 하는 것이었다.
신학교 2학년 때에 메노나이트 사람들에 대해서 처음 들었다. 그 사람들은 기독교와 이교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우리가 먼저 죽어야 한다고 말했다. 원수를 대적하여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 원수를 대신하여 죽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라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때만 해도 내 주변에서는 16세기의 아나뱁티스트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나의 충격과 감동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내 기억 속에서 점차 사라졌다.
그런데 1997년 풀러신학교를 다닐 때 나의 담당 교수님이 메노나이트 교수님이셨다. 이 분을 다시 만나면서 나의 세계관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이 교수님이 하시는 수업을 8과목 들었다. 그는 메노나이트라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신학과 사상은 철저하게 아나뱁티즘 관점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 교수님께서 한국에 설립된 아나뱁티스 교회를 소개해 주셨다. 이후 자연스럽게 메노나이트 소속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침례교에서 사역하려는 마음을 여전히 갖고 있었다. 그런데 메노나이트 교단으로 소속을 옮기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한국교회의 현실과 신학적인 이유가 매우 크다.
“한국교회의 세 가지 병,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한국교회가 앓고 있는 병이 세 가지 있다. 개인주의 신앙, 교회를 다니지만 예수의 가르침과 별 상관없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 전쟁과 폭력을 지지하는 매우 극우 성향으로 의식화된 교회의 모습 등이다. 이런 ‘개인주의, 명목상의 그리스도인, 전쟁과 폭력’이 한국교회의 매우 큰 아픔이다. 그런데 메노나이트 신학의 핵심 가치가 ‘공동체, 제자도, 평화’ 등 세 가지다. 개인주의의 반대가 공동체 신앙이며, 명목상의 그리스도인 반대가 제자도이며, 전쟁과 폭력의 반대가 평화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교회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메노나이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앨런 크라이더의 <평화교회>를 많이 소개하고 있다. '평화와 교회' 단어는 매우 평범한 말이지만, 이 둘을 하나로 합쳐서 <평화교회>라고 하면, 웬지 낯설게 다가온다. 왜일까? <평화교회> 전통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전통이다. 초기 예수운동과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추구했던 전통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폭력을 거부했고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초기 기독교는 <평화교회>라고 불릴 정도로 평화 자체가 핵심 사상이었다. 초대 교부 저스틴은 <이사야> 2장의 하나님나라 평화가 교회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할 정도로 평화의 사상을 중요하게 설파하였다. 이러한 평화교회의 전통은 역사와 종교와 문학에서도 '간디와 톨스토이, 마틴 루터킹' 등 많은 사람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역사적으로 ‘평화와 교회’라는 말은 서로 분리될 수가 없었다. 사실, 평화가 교회이며, 교회가 곧 평화였다. 같은 말의 다른 표현일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떠한가? 이 둘을 합쳐서 <평화교회>라고 부르면, 웬지 불편하고 낯선 느낌을 받는다. 즉, 주류 기독교가 아니라 메노나이트나 퀘이커 등 아웃사이더 종교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메노나이트는 평화운동을 하면서 많은 박해와 핍박을 받았다. 초기 기독교은 ‘반가국적인’ 저항 운동을 하는 그룹이었다. 국가의 전쟁과 폭력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비폭력과 평화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예언자 이사야의 하나님나라 비전을 이 땅에 실현하는 것이 신앙의 목표였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뭇 백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2장 4절).
“미주코스타운동은 평화교회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세상을 향해 평화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교회는 처음부터 ‘평화의 교회’였다. 초기 예수운동은 변두리에서 일어났지만 제국의 전쟁을 거부하고, 국가의 폭력에 저항하며, 박해와 핍박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함으로써 제국의 종교로 변하였다. 이제는 박해를 받던 교회에서 박해를 하는 종교로 뒤바뀌었다. ‘크리스텐덤’(Christendom)의 기독교국가체제는 교회와 국가가 결혼한 것으로 되어버렸다.이후 1500년 동안 이러한 체제가 지속되었다. 16세기, 이 암흑의 시대를 뚫고 다시 태어난 공동체가 메노나이트의 <평화교회> 운동이다. 초대교회의 ‘평화교회’ 전통을 계승하는 운동이었다.
KOSTA에 강사로 참여한 지는 10년이 넘었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들이 메노나이트 목사를 초대해서 서로 대화하려고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이단’으로까지 취급하는 사람들이 많다. 당연히 강단에 초청할 수가 없다. 그런데 미주 코스타는 열린 마음으로 초대해 주고, 계속해서 청년들과 대화하는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지금 나는 미주코스타와 동역자라는 믿음으로 함께 참여하고 있다.
미주 코스타는 한인 유학생들의 모임이 아니다. 미국에 사는 한인 디아스포라 청년들의 공동체 운동이 되었다. 이민자의 ‘이웃’은 한인들만이 아니다. 미국사회 안에는 다양한 인종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미국 안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200여 개가 넘는다. 공용어는 영어이지만, 가족으로 돌아가면 자기 민족의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이처럼 많다. 특히, 미국의 대도시에서는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미주 코스타 운동은 ‘화해와 평화’라는 가치를 함께 고민하고 실천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인 기독교 청년들이 미주 코스타를 통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평화교회’ 운동을 계승해 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허현 목사는 한인메노나이트교회와 다민족교회의 목사로 섬겼고, Anabaptist Mennonite Biblical Seminary 이사를 역임하고, 미국메노나이트교단에서 사역했다. 현재는 아시안화해센터(ReconciliAsian) co-director, Ignis Community 이사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