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남가주 새누리교회 박성근 목사 “주일만 쓰는 건물은 낭비입니다." 지역사회와 쉼쉬는 교회
1957년에 세워진 남가주 새누리교회는 미국 한인 사회에서 손꼽히는 역사를 가진 교회다. 초대 담임 김동명 목사와 안이숙 사모 ‘죽으면 죽으리라’의 신앙으로 한국교회 역사에 깊은 자취를 남긴 믿음의 거장 부부가 개척하여 복음과 헌신의 터전을 닦았다. 그 뒤를 이은 박성근 목사는 1989년, 불과 37세의 나이에 제2대 담임으로 부임했다. “신앙의 거장 뒤를 잇는다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남긴 믿음의 유산을 이어가야 한다는 마음 하나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로부터 35년. 박 목사는 그 유산을 지켜냈을 뿐 아니라, 시대에 맞게 확장시켰다. 오늘의 남가주 새누리교회는 등록 교인 2,500명, 주일 출석 1,700명에 이르는 남가주 지역의 한인타운 대표적인 교회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는 숫자보다 “교회가 지역의 축복이 되어야 한다”는 사명에 더 무게를 둔다. 남가주 새누리교회는 지역사회와 세대를 품는 ‘미셔널 처치(Missional Church)’의 모범으로 서 있다.
박 목사의 부임 과정에는 안이숙 사모의 특별한 관심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텍사스에서 작은 교회를 섬기던 시절 남편 김동명 목사의 후임으로 추천된 것으로 알고있다 아마도 평소 눈여겨 본듯하다. 이후 안이숙 사모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특송으로 격려하는 등 교인들 앞에서 새 리더십을 세워 주었다고 한다. 박 목사는 “안 사모님은 저에게 어머니 같은 분이었다”고 회상한다. 초대 김동명 목사가 세운 순교적 믿음은 박 목사를 통해 순종의 언어로 재해석되었다. “믿음의 유산은 단순히 복제할 수 없습니다. 시대의 언어로 다시 써야 합니다. 저는 그 일을 맡았을 뿐입니다.”
이민교회의 역사는 분열의 역사다. 새누리교회도 그 길을 비켜가지는 못했다. 부임 초기 교회는 리더십을 둘러싼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때 박 목사는 교회 정치 대신 복음으로 재정비하는 길을 택했다. “누구도 시비 걸 수 없는 주제, 바로 구원과 복음에 집중했습니다.” 그는 구원 설교와 전도 훈련에 전념했고 평신도 리더십을 대폭 세워 교구와 사역을 맡겼다. 안수집사와 장로들이 교구장으로 섬기며, 목회자가 아닌 공동체 전체가 교회를 세우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그는 회상한다. “그 시기를 지나며 교회가 새로워졌습니다. 오히려 위기가 건강의 시작이었습니다.”
1990년대, 교회는 예배당 확장과 교육관·체육관 건축(1997년 완공)을 마쳤다. 이후 2014년에는 대규모 본당 재건축이 추진됐다. 무리한 부채를 피하기 위해 단계별 건축(Phase 1: 지하 주차장 / Phase 2: 본당) 전략을 세웠다. 그 결과, 350~400대 규모의 주차시설을 갖춘 다목적 복합 공간이 완성됐다. 박 목사는 이 공간을 “하나님께 드린 선물”로 표현하면서도 이렇게 덧붙였다. “하나님께 드린 공간을 주일 하루만 쓰는 건 낭비입니다. 교회는 지역의 공공재가 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새누리교회는 한인단체, 교육기관, 선교모임 등 다양한 지역 모임에 공간을 개방하고 있다. 교회의 담장이 낮아지자 복음은 지역사회 속에서 자연스레 들리기 시작했다.
박 목사는 “교회가 선교를 ‘하는’ 기관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선교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남가주 새누리교회는 멕시코 엔세나다 양로병원 사역을 오랫동안 이어왔다. 성도들은 여름마다 노인들의 발을 씻기고, 식사를 대접하고, 병동을 수리했다. 여성 병동이 필요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교회는 헌금을 모아 여성 양로병원 신축을 지원했다. 또한 몽족(Hmong) 교회의 예배당 마련과 어린이 기술학교 건립에도 동참했다. “성도들이 억지로가 아니라 기쁨으로 헌신합니다. ‘내 삶 전체가 선교’라는 마음이 생기면, 프로그램이 없어도 교회는 선교합니다.”
1997년 1차 건축 막바지, 박 목사는 심한 번아웃을 겪었다. 밤샘 회의와 재정 압박 속에서 기도가 막혔다. 그러던 중, 웨스트코비나에서 열린 셀 컨퍼런스에서 싱가포르 로렌스 콩 목사의 설교를 들었다. “목회자 이전에, 하나님 앞의 한 양으로 서십시오.” 그 한마디에 박 목사는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그는 그날을 “영적 회복의 전환점”이라 부른다. “약함을 인정할 때, 하나님은 그 약함 속에서 다시 일하십니다.”
새누리교회는 목회자가 모든 것을 하는 교회가 아니다. 훈련된 평신도들이 사역의 주체로 선다. 교구장, 사역팀장, 봉사리더 대부분이 안수집사와 장로들이다. “진짜 목회자는 모든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세우는 사람입니다.” 이 구조 덕분에 교회는 목회자 개인의 역량보다 공동체의 성숙으로 운영된다.
새누리교회의 ‘열린 문’은 상징은 남가주밀알선교단(단장 이종희 목사)과의 협력이 그 대표적 사례다. 박 목사와 교회는 사랑의캠프, 밀알의 밤 등 장애인 선교를 꾸준히 후원해왔다. 특히 20여 년 전부터는 매주 화요일 저녁, 교회를 ‘밀알 화요예배’를 위해 개방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50여 명이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있는 귀한 공간이 마련된 것이다. 한두 번 사용을 허락할 수는 있으나 20여 년간을 장애인을 위해 예배당을 내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종희 목사는 “지난 20여 년 동안 한결같은 사랑과 함께해 주신 남가주 새누리교회와 박성근 목사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교회가 지역사회를 향해 문을 열고 하나님 나라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미셔널 처치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라고 전했다.
새누리교회의 열린 공간 사역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소망소사이어티(이사장 유분자) 와의 협력은 오히려 밀알선교단보다 앞서 시작되었다. 교회 건축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새누리교회는 소망소사이어티에 사무실과 모임 공간을 제공했다.
소망소사이어티는 말기 환자와 노년층, 그리고 삶의 마무리 준비를 돕는 비영리단체로 지역사회에서 ‘품위 있는 죽음과 아름다운 삶’을 나누는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
박 목사는 “교회가 다 하지 못하는 영역을 소망소사이어티가 섬기고 있습니다. 주변 지역의 외롭고 소외된 분들을 돌보는 일이야말로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동역자로 여기고 함께 사역해 왔습니다.”
그의 말처럼 새누리교회의 문은 단순히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문을 통해 이웃과 단체들이 드나들며 사랑과 섬김이 흐르는通路(통로) 가 되어 있다. 이 열린문은 박성근 목사가 말하는 “미셔널 교회, 지역의 축복이 되는 교회”의 실체다.
최세형 행정목사는 새누리교회에서 20년 넘게 부교역자로 함께하고 있다. 그는 박성근 목사에 대해 “담임 목사님은 30년이 넘는 목회 속에서도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강단에 설 때마다 여전히 긴장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서십니다. 부교역자 입장에서 보면 그 진심이 큰 도전이 됩니다. 우리 교회의 영적 흐름 제자훈련, 중보기도, 특별새벽기도와 선교… 1년 365일 영적인 운동이 멈추지 않는 그 현장에서 늘 앞장서십니다.”
그는 이어 “박 목사님은 남침례교단 내에서도 ‘큰 바위 얼굴’ 같은 존재”라며, “목회자들의 롤모델이자 교단의 얼굴로 존경받는 분”이라고 덧붙였다. 한 교회에서 20여 년을 부교역자로 함께한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담임목사와 부교역자의 관계를 넘어 인격적 신뢰와 영적 동행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신뢰가 새누리교회의 안정감과 지속성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박성근 목사는 원래 목회보다 학자의 길을 꿈꾸었다. 신학적 탐구와 가르침에 매력을 느꼈던 그는 미국 남침례신학교(Southwestern Seminary)에서 공부하며 교수의 길을 준비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강단으로 부르셨다. “저는 원래 목회자가 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면 순종하겠습니다 그 한마디로 제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그의 목회는 계획이 아니라 부르심에 대한 순종의 결과였다. 그의 한결같은 걸음은 지금도 그 서원 위에 서 있다.
35년의 세월 동안 남가주 새누리교회는 한 교회를 넘어 지역의 축복이 되었다. 복음으로 교회를 세우고, 평신도를 세우며, 공간을 열고, 선교를 정체성으로 삼는 교회 그것이 새누리의 모습이다. 박 목사 “교회가 진짜 교회다워지려면, 지역이 교회를 보고 하나님을 느껴야 합니다.”
남가주 새누리교회의 역사는 한 목회자의 성공담이 아니다. 믿음의 유산을 시대에 맞게 해석한 순종의 기록이다. 35년을 한결같이 달려온 목사, 열린 공간으로 지역을 품은 교회, 그 안에서 복음은 오늘도 살아 움직인다. “교회가 미셔널이 될 때, 지역은 축복이 됩니다.”
걸음은 조용하지만, 그 속엔 흔들림 없는 신념과 단단한 중심이 있다. 말보다 실천으로 교회를 세운 그의 우직한 리더십이 오늘의 새누리를 있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