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체험을 하고 나서 급진주의자가 된 그룬트비

1783년, 덴마크 유틀란트 반도의 작은 마을 우드비(Udby)의 목사관에서 니콜라이 프레데리크 세베린 그룬트비(Nikolaj Frederik Severin Grundtvig)라는 아이가 태어났다. 덴마크 루터교 목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경건과 학문이 가득한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단순히 아버지의 길을 따르는 순탄한 여정이 아니었다. 그는 평생에 걸쳐 깊은 신앙적 갈등과 지독한 자기 성찰을 겪었으며, 이 모든 과정을 거쳐 덴마크라는 조국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불태운 위대한 사상가이자 국민 시인으로 거듭났다.

목회자 아들로서 그룬트비의 어린 시절은 '영혼의 병'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진지하고 예민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경과 고전문학, 역사서를 탐독하며 지식을 쌓았지만, 그와 동시에 내면의 공허함과 씨름해야 했다. 당시 덴마크는 이성 중심의 계몽주의가 지배적이었다. 신앙은 논리적으로 설명되어야 했고, 감정이나 신비로운 체험은 불신을 받았다. 엄격한 목사의 아들로서 그에게 주어진 길은 분명했다. 신학을 공부하고, 이성적인 논리로 신을 증명하는 것. 하지만 그의 가슴은 차가운 이성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었다.

덴마크 코펜하겐 그룬트비 포럼에 있는 그룬트비 동상 : 이미지 출처 오마이 뉴스
덴마크 코펜하겐 그룬트비 포럼에 있는 그룬트비 동상 : 이미지 출처 오마이 뉴스

그의 초기 저작들에는 이러한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역사학과 신학을 공부하며 북유럽 신화와 아이슬란드 사가(Saga영웅담)를 깊이 연구했다. 그는 이교도의 신화에서 기독교적인 진리를 발견하려 했고,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덴마크 민족의 염원을 읽어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그를 더욱 깊은 영적 위기로 몰아넣었다. 지식은 넘쳤지만, 그의 영혼은 기갈을 느꼈다. 1810년경, 그는 극심한 우울증과 정신적 혼란에 빠져 '영적 어둠'의 시기를 겪는다. 덴마크의 위대한 지성인으로서 그의 미래는 무너지는 듯 보였다.

그룬트비의 삶은 두 번의 극적인 회심을 통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첫 번째 회심은 바로 이 '영적 어둠'의 시기 끝에 찾아왔다. 1810년 12월 26일, 그는 자신이 쓴 시를 읽던 중 갑자기 "성령의 목소리"를 듣는 강렬한 영적 체험을 한다. 이성적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경험은 그에게 신앙이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깨달음을 주었다. 그는 자신의 지적인 오만함을 철저히 회개하고, 신앙의 본질을 '살아있는 말씀'에서 찾기 시작했다.

이후 그의 신학은 급진적으로 변한다. 흔히들 영적 체험을 하고 난 뒤 이성과는 담을 쌓고 살기가 쉬운데 그는 성경의 문자적 해석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전해지는 '말씀' 그 자체에 집중했다. "성찬례와 세례를 통해 살아있는 말씀이 우리에게 직접 전해진다"고 주장하며, 덴마크 교회의 형식주의와 계몽주의 신학을 맹렬히 비판했다. 그의 비판은 교회 지도자들과의 갈등을 불러왔고, 결국 그는 설교단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목회자의 아들이라는 굴레를 벗고, 이제 진정한 자신의 신앙을 따라 걷기 시작한 것이다.

그룬트비의 삶은 덴마크의 역사적 격변기와 겹쳐 있다. 1814년 킬 조약으로 덴마크가 노르웨이를 잃고, 1864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패배하며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을 상실하는 뼈아픈 역사를 목격했다.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그룬트비는 개인의 신앙적 문제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덴마크의 영혼을 구원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그는 덴마크 국민들이 과거의 영광에만 안주하지 말고, 새로운 미래를 위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재정립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덴마크 국민을 한 사람 한 사람 깨우치고, 그들이 서로의 이웃임을 자각하게 만드는 것에서 희망을 찾았다.

이러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그룬트비는 덴마크 국민 전체를 위한 '국민 교회(Folkekirke)'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에게 국민 교회는 단순히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장소가 아니라, 덴마크 국민의 언어와 역사, 문화를 담아내는 살아있는 공동체였다. 그는 "덴마크인들에게 복음이 덴마크어로 들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성가와 시를 통해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교육의 힘, 국민 고등학교 운동

그룬트비의 사상은 단순한 신학적 논의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덴마크의 미래가 국민 교육에 달려 있다고 믿었고, 이는 '국민 고등학교(Folk High School)'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의 제자 크리스텐 콜이 이 운동을 주도하며 1844년 최초의 국민 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학교들은 기존의 권위적이고 주입식 교육과는 달랐다. 시험도, 학위도 없었다. 대신 '살아있는 말씀'인 강연과 토론을 통해 농부와 노동자 등 평범한 사람들에게 덴마크의 역사, 문화, 언어, 민족의식을 가르쳤다. 그룬트비는 "인간이 되라"고 외쳤다. 그에게 교육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공동체 안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살도록 돕는 것이었다.

그의 열정적인 외침은 덴마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국민 고등학교는 덴마크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었고, 국민들의 자존감을 높여주었다. 1864년 전쟁 패배로 국토의 일부를 잃은 덴마크는 좌절 대신 '밖으로 잃은 것을 안으로 되찾자'는 정신으로 똘똘 뭉칠 수 있었다. 이 정신적 부흥의 중심에는 그룬트비의 사상이 있었다.

그는 덴마크 루터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추앙받지만, 정작 그의 가장 큰 유산은 종교를 넘어선 곳에 있다. 그의 사상은 덴마크인들에게 진정한 '국민'이라는 개념을 심어주었고, 국민 고등학교 운동은 덴마크를 오늘날의 복지 국가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을 구하자는 극우 기독교인들의 목소리가 우리의 눈과 귀를 오염시키고 있다. 전광훈 손현보 등에게 묻는다. 대한민국을 구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룬트비의 삶은 치열한 고뇌와 자기 성찰을 통해 비로소 자기 것이 되는 것임을 증명했다. 그룬트비는 아버지의 울타리 안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길을 개척했고, 그 길 위에서 덴마크라는 조국의 영혼을 되살려낸 진정한 영웅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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