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에녹, 최초의 도시: 죄와 정주( 定住)의 기원

창세기 4장은 인간 문명의 출발점으로 도시의 기원을 이야기한다. 성경이 묘사하는 최초의 도시는 가인, 즉 아벨을 살해한 자의 후손이 세운 에녹이다. 가인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유랑자로 떠돌았지만, 결국 성을 쌓음으로써 자신의 불안을 정주의 형식으로 봉합하려 했다. 이 도시는 회복이 아니라 도피의 건축물, 하나님과의 단절을 상징하는 구조물이다. 프랑스의 신학자 자크 엘륄은 『도시의 의미』에서 도시를 인간의 자율성과 권력 집중의 결과물로 보았다. 에녹은 하나님 없는 질서를 추구하는 인간 욕망의 첫 번째 결정체다.

그러나 에녹의 도시는 단순히 성벽과 건물로 이루어진 공간이 아니다. 이는 인간이 죄의 무게를 견디며 스스로를 고정하려는 시도, 즉 유랑의 공포를 덮으려는 시도였다. 현대 도시도 이와 다르지 않다. 뉴욕, 로스앤젤레스(LA), 도쿄 같은 메트로폴리스는 자본과 기술의 집적지로서 에녹의 후손처럼 보인다. 특히 오늘날 LA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불법 이민자 단속을 빌미로 거리에 출동한 해병대와 주방위군은 도시의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 아래 약자를 배제하고, 도시를 감시와 통제의 공간으로 만든다. 이들은 에녹의 성벽처럼, ‘내부’와 ‘외부’를 나누며 도시를 단절의 장소로 재구성한다.

 

2. 머리둘 곳 없는 자: 예수와 ‘노매드랜드’

예수는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다”(누가복음 9:58)고 선언하며 도시 문명과 거리를 두었다. 이는 단순한 가난의 표현이 아니라, 도시가 강요하는 체계화된 삶과 권력의 구조를 거부하는 급진적 신학적 선언이다. 예수는 성문 밖, 시장 바깥, 중심이 아닌 변두리에서 거처했다. 그의 공동체는 집 없는 자, 소외된 자, 정주의 자격을 갖지 못한 자들로 이루어졌다.

이 선언은 클로이 자오의 영화 ‘노매드랜드’(감독 클로이 자오, 2020년)에서 현대적으로 되살아난다. 주인공 펀(프란시스 맥도맨드 분)은 남편의 죽음과 경제적 붕괴로 도시를 떠나 캠핑카로 유랑하는 삶을 선택한다. 네바다와 애리조나의 사막을 떠돌며 일용직 노동자로 살아가는 펀의 여정은, 도시가 제공하지 못하는 인간성과 연대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영화 속 노매드들은 캠핑카 사이, 모닥불 옆에서 서로의 ‘머리둘 곳’을 나눈다. 이는 고정된 공간에 뿌리내리지 않은 채, 유랑 속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공동체다. 펀은 정착하지 않고 다시 길을 떠나지만, 그 여정에서 만난 이들과의 짧은 연결은 예수가 꿈꾼 ‘또 하나의 도시’를 상기시킨다.

 

3. 뉴욕, 저항의 도시: 이와사부로 코소의 통찰

이와사부로 코소의 ‘뉴욕열전’(김향수 옮김, 갈무리)은 뉴욕을 자본주의의 심장이자 저항의 최전선으로 읽는다. 그는 도시를 고정된 구조물이 아니라, 민중의 몸과 리듬이 만들어내는 ‘운동하는 블록’으로 본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탈영토화’ 개념을 빌려, 코소는 뉴욕의 브루클린, 퀸스, 할렘에서 흑인 청년의 랩, 이민자의 춤, 노숙자의 시선이 도시를 다시 쓰는 텍스트라고 말한다. 이는 자본의 중심에서 밀려난 이들이 만드는 ‘또 다른 도시’다.

KBS화면 갈무리
KBS화면 갈무리

코소의 통찰은 창세기 4장의 에녹과 대비된다. 에녹이 죄와 단절의 상징이라면, 코소의 뉴욕은 저항과 연결의 가능성을 품는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실은 코소의 낙관적 비전을 위협한다. LA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서류 미비 이민자 단속을 명목으로 배치된 해병대와 주방위군은 민중의 리듬을 억압한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가난한 이들은 도시 외곽으로 밀려나고, 거리의 언어는 침묵당한다. 단속 과정에서 폭력과 감시는 도시를 에녹의 성벽처럼 폐쇄적으로 만들며, 소외된 이들의 몸짓과 저항을 지운다.

 

4. 도시의 해악과 새로운 공동체의 상상

오늘날 도시의 해악은 단속과 감시의 이름으로 더욱 두드러진다. LA에서 서류미비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거리에 배치된 군대는 도시를 전쟁터로 바꾼다. 이들은 약자를 체포하고, 거리를 통제하며, 도시의 생명인 유동성과 다양성을 억압한다. 이는 에녹의 도시가 가진 본질적 문제—배제와 단절—를 현대적으로 반복하는 모습이다. 도시가 자본과 권력의 도구로 전락할 때, 예수가 말한 ‘머리둘 곳 없는 자’는 더욱 설 곳을 잃는다.

그러나 ’노매드랜드’와 코소의 뉴욕은 대안을 제시한다. 펀은 도시를 떠나 유랑하며 새로운 연대를 만들고, 코소는 뉴욕의 거리에서 민중의 저항을 발견한다. 이들은 모두 고정된 질서에 저항하며, 움직임과 연결을 통해 도시를 재정의한다. 예수의 신학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는 성문 밖에서, 소외된 자들과 함께 새로운 공동체를 상상했다. 이는 창세기의 에녹을 넘어서는 ‘또 하나의 도시’—서로의 머리둘 곳이 되어주는 열린 공간—이다.

 

5. 유랑과 연대의 도시로

창세기 4장의 에녹은 죄와 도피의 도시였다. 그러나 예수와 ‘노매드랜드’, 코소의 뉴욕은 도시가 단절이 아니라 연결의 장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가 세우는 도시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LA의 거리에서 단속으로 쫓겨나는 이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밀려난 이들, 정주의 자격을 박탈당한 이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선언—“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다”—를 다시 곱씹게 만든다.

도시는 고정된 성벽이 아니라, 유랑하는 이들의 리듬과 만남으로 다시 쓰여야 한다. ‘노매드랜드’의 펀이 떠나며 남긴 말, “잘 가요, 다음 길 위에서 또 만나요”는 새로운 도시의 언어다. 이는 잠시 머리둘 곳을 나누는 연대의 순간, 단절된 세계를 잇는 다리다. 창세기 4장을 통해 우리가 상상해야 할 도시는, 에녹의 성벽을 넘어 서로를 품는 열린 틈, 유랑과 연대의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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