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은 사모의 간증은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편견을 조용히 흔드는 이야기입니다. 그녀의 삶은 장애와 비장애, 강함과 약함, 기대와 현실 사이에 놓인 수많은 경계선을 넘나들며, 그 사이에서 피어나는 만남의 소중함을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누구나 ‘정상’이라는 틀 속에 자신과 타인을 가두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삶의 풍요로움은 그 틀을 넘어설 때 시작됩니다. 정 사모의 이야기처럼, 휠체어는 한 사람의 능력을 가두는 도구가 아니라 일상의 자연스러운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 그 만남 속에서의 배려와 공감은 우리 모두의 삶을 더욱 넓고 깊게 만듭니다. 장애와 비장애, 인종과 계층 그배경의 차이를 넘어 우리는 비로소 참된 공동체의 가능성을 보게 됩니다.
정 사모의 고백은 바로 그 가능성의 증언입니다. - 편집자 주 -
지난 4월 26일 뉴욕밀알선교단(단장 김자송) ‘장애인의 날’ 행사에서 한 편의 조용한 간증이 많은 이들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남겼다. 정재은 사모의 이야기였다. 그녀는 말한다. “우리 가정은 조금 다릅니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듯 보이는 그녀의 고백은, 그러나 곧 장애와 편견, 그리고 사랑과 연대에 관한 깊은 통찰로 이어졌다.
정 사모는 뉴욕에서 남편, 딸, 연로하신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며 매달 렌트비를 내고, 아이의 교육을 위해 분주한 일상을 보낸다. 언뜻 보기엔 전형적인 일반 가정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인해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이다. 그는 목회자이자 뉴욕밀알선교단 행정실장으로 사역 중이며 매일 새벽 설교하고, 운전도 하고, 가족과 여행도 떠난다. 정 사모는 “남편이 휠체어 때문에 무언가를 못하는 걸 본 적이 거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상의 시선은 다르다. 어느 날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이웃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남편이 저러니까 아내도 모자란 사람일 거라고 하더라.” 황당한 이야기였지만, 정 사모는 그 안에 사회 깊숙이 자리 잡은 편견의 실체를 보게 되었다. 그녀는 되묻는다. “남편은 얼마나 많은 오해와 시선 속에서 살아왔을까요?”
그 일을 계기로 그녀는 자신이 속한 뉴욕밀알선교단의 친구들, 즉 장애를 지닌 지체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열리는 미술 치료 수업은 그녀의 사역 중 중요한 시간이다. 단순한 창작 활동이 아닌, 마음과 마음을 잇는 교감의 장이다. 정 사모는 '로드아일랜드디자인스쿨' 유학 시절 시각장애인을 위한 지도 제작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한다. “아트는 보여지는 세상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구나. 보이지 않는 마음을 이어주는 작업이 더 아름다울 수 있겠구나.”
그녀의 수업은 작품의 완성보다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고 나누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처음에는 산만하고 집중하지 못하던 이들도 서서히 변해갔다. 무표정이던 얼굴에 호기심이 떠올랐고 미세한 손의 움직임이 시작되었으며 마침내 조심스러운 미소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자신의 그림을 부모님께 드리고 싶다며 조심스럽게 그림을 들고 갔다. 정 사모는 조용히 기도했다. ‘부모님이 이 그림을 기쁘게 받아주셨으면….’ 결과는 알 수 없었지만 다음 주에도 그 친구는 밝은 얼굴로 수업에 참여했다. 그것만으로도 희망이었다.
정 사모는 처음엔 멋진 작품을 만들고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방향이 바뀌었다. 더 나은 결과물이 아니라 더 깊은 관계와 사랑이 이 수업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친구들은 점점 더 용기 있게 자신의 감정을 색과 선, 형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고 발표 시간엔 조심스럽지만 분명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것만큼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정 사모의 이 말은 단지 아름다운 이상이 아니다. 그녀는 실제로 그 거리를 좁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장애는 열등함이 아니라, 다름이며 가능성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밀알의 친구들에게서 배우고 있다. 작은 친절에 크게 웃고, 소소한 배려에 깊이 감동하는 그들은 오히려 삶의 본질을 가르쳐주는 스승과도 같다.
그녀의 삶도 계획한 길은 아니었다. 미국 유학 시절, 좋은 직장과 안정된 삶을 꿈꿨다. 그러나 인생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렀고 어느 날 휠체어를 퀵보드처럼 타고 들어온 한 남자를 만났다. 사랑에 빠졌고, 결혼했고, 목사의 아내가 되었으며 밀알의 친구들과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예상한 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지만 지금의 삶은 훨씬 더 풍성합니다.”
많이 가진 것도, 누리는 것도 아니지만 공허하지 않다. 그녀는 말한다. “주님이 이끄시는 삶은 더 높은 곳이 아니라 더 낮은 곳으로. 더 많이 갖는 삶이 아니라, 더 많이 나누는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그녀는 참된 기쁨과 만족을 경험하고 있다.
정재은 사모의 간증은 단지 한 개인의 고백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묻는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만남을 오해와 두려움 속에 잃어버리고 있는가? 그녀의 이야기는 그 질문에 대해 분명한 대답이되었다.
최병인 기자 / <미주뉴스앤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