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설교 / "지진 전 이 년", 손태환목사(시카고기쁨의교회)

시카고기쁨의교회 설교(2024.12.08) 동영상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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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둘째 주일을 맞는 교우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오늘 평소와 조금 다른 설교를 할 것이고 거의 읽는 방식으로 하겠습니다.

미국 종교사를 전공으로 박사 과정을 지내고 있을 때 역사를 왜 공부하는지에 대해 지도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왜 하필 역사가가 되었느냐는 제 질문에, 교수님은 "역사는 나를 겸손하게 한다"라고 답해 주셨습니다. 그 말이 지금까지 제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어떤 사건을 보거나 직접 겪을 때, 역사는 이 순간을 어떻게 기록할까 묻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언제나 저를 겸손하게 도와주고 깨어 있게 도와줍니다.

 

지난 12월 3일 한국 시간으로 오후 10시 30분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습니다. 종북과 반국가 세력을 척결하고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겠다고 밝혔지만, 대한민국 헌법 제77조에 명시된 비상계엄 선포 조건을 전혀 지키지 않은, 명백한 위헌 행위였습니다. 우리 시대에 다시 계엄이 선포되고 무장한 군인들이 국회를 점거하는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으나 믿을 수 없는 그 일이 우리 눈앞의 현실로 일어났습니다.하나님이 도우셔서 실패로 돌아갔지만 성공했으면 참혹한 유혈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맞이한 오늘 주일 예배에 어떤 설교가 행해졌는지, 어떤 기도를 드렸는지, 훗날 우리 시카고기쁨의교회 역사를 살피고 정리하는 우리의 후손들은,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며, 적어도 그들에게 우리 교회가 부끄럽게 기억되고 기록되지는 말아야 하겠다, 생각했습니다. 조국땅에서 불의한 권력이 민주주의를 무너뜨린 일을 자행했는데, 우리의 부모님들과 선조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평소와 똑같이 예배하고, 똑같이 설교했다고, 침묵하고 외면했다고 기억된다면, 그것만큼 부끄러운 일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물론 목회자가 현실 정치에 대해, 직접 설교 중에 언급하는 일은, 매우 조심해야 하는 일이고, 공교회가 정치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민감하고, 때로는 위험한 일입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은, 지난 화요일 이후, 이번 사태 직후에, 그저 한국에서 상처받고 아파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자고, 한마디 말을 했는데, 새벽부터 교인들로부터 항의성 전화를 받고, 지금까지 괴로워합니다. 보수적인 이민사회와 한국 한인 교회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공공의 선을 위협하는 악하고 불의한 일을 폭로하고 저항할 분명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회자인 제게 주어진 책무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것은 특정 정당의 편에 서거나 목회자나 교회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반드시 공공의 선을 위한, 그리고 공의를 실현하기 위한 목적이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속한 미국장로교 규례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정의를 위해 일하도록 교회를 보내신다."라고 명시하고 있으며, 폭력과 억압의 시스템에 저항하여 증거하는 일을 교회의 중요한 책무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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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성경은, 명백한 불법과 불의 앞에 중립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선지자들이 어떻게 악한 권력에 맞서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는지를 수없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침 우리가 아모스서를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아모스서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유다 왕 웃시아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2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 대부분의 선지서가 그런 것처럼, 아모스서도, 선지자가 어느 왕의 통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예언 활동을 했는지, 그 시대적 배경을 밝힙니다. 남유다에서는 웃시아 왕이 통치하고 있었고, 북이스라엘에서는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바로 그 시기에, 아모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활동했다고, 밝힙니다.

이걸 왜 알려주는 것일까요? 선지자들의 예언 활동이, 구체적인 역사적 정황 속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런 맥락 없이, 허공을 향해 선포되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컨텍스트가 있고, 시대 상황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마치 "조 바이든 대통령 임기 시절에" 혹은 "도널드 트럼프가 재선했을 때에"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대한민국으로 말하자면 "문재인 대통령 시절에", "윤석열 대통령 시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선포했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유다 왕 웃시아,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하면, 무관하게 느껴지다가, 현시대 대통령의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우리는 긴장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컨텍스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처한 현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처한, 현실 속의 통치자이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그 시절에도, 그랬습니다. 당시의 최고 권력자가 서슬퍼렇게 살아있을 때, 대부분의 종교 지도자들이 권력자들의 편에 설 때에, 대부분의 민중들이 그들의 가르침에 현혹되어 살아가고 있었을 당시에, 그래서 공의와 정의를 외치는 자는, 언제나 핍박받던 시절에, 선지자는, 하늘의 명을 전하는 일에, 자신의 삶을 던졌습니다.

선지자가 말씀을 전할 때에, 사람들은 긴장했을 것이고, 권력자의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에, 마음이 오그라들었을 것이며, 권력자들과 그 편에 서 있는 자들은, 분노했을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언제나, 기존 체제를 부정하고, 반역하는 이들로 여겨졌습니다. 그들은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위험 인물로 분류되었고, 따라서 늘 소외와 핍박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 선지자들은 외치고 또 외쳤을까요? 다른 것을 보았고, 다른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가 말하는 것처럼, 만일 어떤 이가 행진을 하며 다른 이들과 발을 맞추어 걷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가 다른 북소리를 듣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선지자는 다른 목소리를 듣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 1절은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이상'은 영어로 Vision이고 히브리어로 '하존'(חזון)라고 하는데 "무언가를 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를, '선견자'라고도 부릅니다. 히브리어로 '호제'(חזח) 라고 합니다. 그들은 뭔가를 본 사람들입니다. 미리 보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혹은 같은 것을 보아도 다른 세상의 관점, 즉 하늘나라의 관점으로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오늘 본문은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상'은 보는 것이고, 말씀은 듣는 것인데, 어떻게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는 표현이 성립될 수 있었을까요? 아모스는 그가 본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던 것입니다. 가장 풍요롭고 가장 부강했던 여로보암 2세 시대에 살면서 가난한 사람을 신발 한 켤레에 받고 팔아넘기며, 힘 없는 자의 머리를 땅에 짓이기는 악한 자들의 폭압을 보았고, 안식일은 지키지만, 안식일과 절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가, 저울을 속여 돈 벌기에 급급했던 이들의 탐욕을 보았으며, 예배는 열심으로 드리지만, 불법과 불의에는 침묵하며 앞장서는 이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보며 무엇을 듣고 살고 있을까요? 우리는 과연 보아야 할 것을 보며, 들어야 할 것을 듣고 있을까요? 지난 토요일, 대통령의 탄핵을 촉구하는 수십만 명의 인파가, 여의도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탄핵을 반대하는 이들의 맞불 집회가 광화문에서도 열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여의도에는 젊은이들과 학생들이 넘쳐나는데, 광화문에는 노인들이 넘쳐났습니다. 그리고 그 노인분들은, "할렐루야, 할렐루야"와 '아멘'을 외쳤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여의도에 모인 시민들이, 탄핵을 촉구하며, 시위 문화가 바뀌어서 흥겹게 노래하고 그렇게 자신의 발언을 하던 그 중에, 한 시민이 무대에 올라왔습니다. 사회자가 불러서, 무대에 섰습니다. "어디사는 누구냐?"고 물으니까 "천주교인입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환호합니다. 그분이 이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종교를 떠나서 하늘 무서운 줄 아는 사람은, 그러지 않습니다." 그러더니 노래를 부르는데, "노래 한마디 하겠습니다." 하고 노래를 부르는데,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가 쓴 글에 곡을 붙인(김충희 작곡, 이승희 편곡), "아무것도 너를" 이라는 성가를 불렀습니다. 시위가를 부른 것도 아니고, 민중가요를 부른 것도 아니라, 성가를 불렀습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맑은 목소리로 너무 은혜롭게 성가를 부르자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를 했습니다.

그걸 보며 생각했습니다. 누군가 나와서 "누구냐?"고 물을 때에 "기독교인입니다. 개신교인입니다."라고 대답했다면,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그리고 이어서 찬송가나 복음성가를 불렀더라면, 사람들은 과연 환호했을까요? 그러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현 대통령이 주술과 미신에 빠진 사람이든 말든 힘껏 머리에 안수해 주며, 축복해 이들이, 이름만 대면 다 알 만한 한국교회 목사들이고, 교인들이었다는 사실을, 세상이 다 알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들이,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이 죽어가던 그때도, 사회적 약속을 보란듯이 여기며, 공공의 적이 되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다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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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개신교회는 가장 분별력이 없는 집단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보아야 할 것을 못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못 듣는 사람들입니다. 귀를 가리고 눈을 막습니다. 외쳐야 할 때, 침묵하고, 침묵해야 할 때 외칩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암울한 시대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선지자들을, 남겨두셨습니다. 이상으로 받은 말씀을 전할 선견자들과 예언자들이 오늘도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리에 자신의 자리를 걸고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말씀을 전하려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단에 서는 목회자들이 있고, 불의한 현실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거리로 나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외치는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이 있습니다. 이미 깨어 있는 많은 목회자들과 기독교인들이, 시국 선언에 나섰고, 우리 미국 장로교단도 성명서를 냈고, 한국의 민주주의가 바르게 세워질 수 있도록, 촉구하며 함께 기도하는 중입니다. 저는 이런 이들에게서 여전한 희망을 봅니다.

오늘 본문 1절은 아모스가 여로보암 시대 지진 전 2년에 말씀을 받았다고 말합니다.이 지진은, 스가랴서에도 언급된 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이 당시 사람들에게 강하게 각인된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지진은,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그 여호와의 날에 일어날, 현상 중의 하나로 종종 소개됩니다. 실제로 아모스서에서는, 지진을 연상시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뒤덮으시고, 온 땅이 강에 넘침같이, 솟아오를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지진 전 2년"이라는 말은, 단순히, 지진이 일어나기 2년 전이라는, 시기를 설명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뒤덮으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해 왔다라고 하는, 사실을 표현하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선견자는, 그것을 미리 보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뒤집어지듯이, 이스라엘이 뒤집어지는 그 지각 변동이 일어나는 것을, 미리 경험합니다. 불의한 권력이 무너지고, 악한 자들의 동맹이 끊어지고, 그들이 의지했던 모든 것이 파괴되는 날, 그 엄청난 굉음을, 선지자는 미리 듣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1장 2절을 보면,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시온산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시며,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말씀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을 마치, 포효하는 사자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세밀한 음성으로 조용히 다가가, 다정다감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아모스의 하나님은, 사자처럼 쩌렁쩌렁 포효하는 하나님입니다. 목자와 양떼가 공포로 두려워 떨 만큼, 강력한 사자의 으르렁 소리를 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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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는, 불의한 현실 속에서, 지진의 굉음을 미리 듣는 사람들입니다. 정의를 뒤엎어버리는 권력자들을 뒤엎으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는, 사람들이며, 공의롭지 못한 판결을 뒤집으시는, 그리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추상 같은 음성을 듣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국민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권력자들을 향해, 국민의 안위보다,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여, 제 살길만 찾는, 정치꾼들을 향해, 하나님이 보내실 지진과 지각 변동을, 미리 보고, 선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교회에 주어진, 선지자적 사명이라, 저는 믿습니다.

대만 출신의 신학자 C. S. Song이 쓴 "맹부인의 눈물"이라는 민담이 있습니다. 진시황제가, 북쪽의 훈족을 막기 위해서, 만리장성을 쌓기 시작하는데, 이 성벽이 잘 쌓아지지 않고, 자꾸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현자가, 그때 진시황제를 찾아와서, "만리장성 축조를 완성하려면, 1km마다 사람을 죽여 매장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정말 1km마다 사람을 죽여서 매장하면서 성을 쌓아가기 시작합니다. 죽음의 공포가 온 나라를 뒤덮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피를 가지고 성이 완성되어져 갈 즈음에, 또 한 사람이 나타나서, "'만(萬)'은 '10000'을 뜻하므로, 만씨성을 가진 사람을, 마지막으로 죽여 매장하면, 성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이로 인해서 잡혀온 사람이, 이제 막 결혼식을 올렸던, 만씨성을 가진 신랑이었습니다. 그렇게 맹부인의 남편은 끌려가 매장당합니다. 맹부인은 남편의 시신을 찾기 위해, 산을 넘고 물, 강을 건너, 성에 도착했지만, 그 거대한 성벽 속에서, 남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은, 그 앞에서 처절한 피눈물을 흘리며, 울부짖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울음이 성벽을 감동시켰고, 만리장성, 장성이 무너져 내리며, 그 속에서, 만씨의 유골이, 맹씨 부인 앞으로 흩어져 내립니다. (편집자 주, C.S. 송, <맹부인의 눈물>, 도서출판 일과놀이, 1984, pp. 20-33 참조)

이 민담은, 나라를 강하게 한다는 목적으로, 무고한 백성들의 피를 흘리게 하는, 불의한 권력자를 고발합니다. 동시에, 그렇게 쌓은 성은, 결국 백성의 눈물과 부르짖음에 쓰러지고 만다는 것, 또한 보여줍니다. 아무리 견고한 성을 쌓고, 그 속에서 자신들만의 권력을 누리려고 해도, 힘없이 고통당하는 이들의 울음과 통곡 소리를,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성을 무너뜨릴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이집트 땅에서, 노예로 고통하는 이들의 신음을 들으시고, 히브리 민족을 구원해내신, 하나님이시니까요.

이제,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십니다. 불법과 불의로 가득한 사회에, 하나님의 지진 소리가 들려오게 하라. 누군가의 피로 세워진 저들의 성을 무너뜨리는 굉음이 들려오게 하라.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악을 행하는 저들에게 하나님의 쩌렁쩌렁 울리는 포효와 심판의 음성이 들려지게 하라.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하라. 내가 보고 싶은 것은, 일상의 실천이 없는 너희들의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삶의 예배이며, 내가 듣고 싶은 것은, 너희의 노래와 비파 소리가 아니라, 정의와 공의가 거센 강물이 되어, 모든 악한 것들을 씻겨 흘러가는 그 소리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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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먼저 불의의 동조자임을 고백합니다. 어느덧 사람의 눈치를 보며, 자기 검열에 익숙해지고, 편안한 자리에 안주하려 했으며, 보고도 못 본 척했습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과 역사 앞에, 옷을 찟고 참회해야 합니다. 선지자의 사명을 저버리고, 이웃의 아픔과 눈물과 고통에 외면하고, 교회 됨을 스스로 포기한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세상의 괴물은, 우리 안에 괴물이 겉으로 드러난 결과에 다름 아닙니다. 이제 저기 지진 소리가 들립니다. 그날이 옵니다. 예수께서 심판주로 오셔서, 마침내 이 땅에, 온전한 정의와 평화를 이루실 그날이 옵니다. 그날을 기다리며 미리 그날을 살아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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