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슨 선교사는 한국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서울대와 이화여대를 졸업한 지성인들이었으나, 결혼 후 이혼하며 아들을 고아원에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여섯 살 때 미국으로 입양된 윌슨 선교사는 뉴욕 롱아일랜드의 백인 가정에서 자랐다.
입양 가족은 그를 포함해 일곱 명의 아이를 입양했으나, 윌슨의 학창 시절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양어머니는 갱년기 우울증으로 극심한 감정 기복을 보였고, 어린 윌슨은 학대에 시달리며 공포 속에서 자랐다. 아버지마저 집에 머무르지 않아, 그는 집안일과 육아를 떠맡아야 했다. 이런 상황은 그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사춘기를 겪으면서 방황은 더욱 심해졌다.
13살 무렵, 윌슨은 자신이 백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피부색과 외모의 차이를 깨달으며 정체성의 혼란에 빠졌고, 학교에서 인종차별을 경험하며 분노와 반항심이 쌓였다. 그는 싸움에 휘말리고 문제아로 낙인찍혔다. 결국 15살에 집을 떠나 노숙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 시절은 그에게 인생의 밑바닥을 경험하게 했다.
고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윌슨은 자립을 위해 해병대에 입대했다. 군대는 그에게 규율을 심어주었지만, 내면의 상처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한국 훈련에 참여하며 생물학적 아버지를 만났지만, 예상과 달리 아버지는 미안함을 표현하지 않았다. 그는 그 만남에서 큰 실망감을 느꼈고,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절망했다.
삶의 전환점은 노스캐롤라이나에서 한 여성과의 만남이었다. 그녀는 기도와 사랑으로 그를 품었고, 두 사람은 결혼을 통해 가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결혼 초반, 그의 거친 성격과 과거의 상처는 부부에게 큰 도전이 되었다. 아내의 끊임없는 기도와 인내는 윌슨 선교사에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심어주었고, 그는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2009년, 윌슨 선교사와 그의 가족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멕시코로 떠났다. 초기 정착은 매우 힘들었다. 후원이 부족한 가운데 볶음밥을 팔아 생계를 이어갔고, 한 달에 50달러로 생활해야 하는 어려움도 겪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는 현지인들의 도움과 사랑을 받으며, 오히려 자신이 겸손해지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시간을 보냈다.
윌슨 선교사는 멕시코에서 고아와 소외된 아이들을 돌보는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집을 열어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단순히 교육과 먹거리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아이들에게 사랑과 희망을 심어주고 있다. 현재 그가 돌보는 아이들은 50명이 넘으며, 대학생 기숙사에서도 35명의 학생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딸 칼라도 그 사역의 열매다. 칼라는 13살에 위탁센터를 통해 윌슨 선교사의 가족에 합류했으며, 학창 시절 내내 상처와 반항으로 가족을 힘들게 했다. 그러나 윌슨 선교사 부부는 그녀를 딸로 받아들이고 끝없는 사랑으로 품었다. 성인이 된 칼라는 법대를 졸업하고 현재 아버지의 사역을 돕고 있다.
윌슨 선교사는 자신의 사역이 하나님의 은혜와 동역자들의 도움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가장 큰 사명은 버림받은 아이들을 품는 것입니다. 저도 고아로 자랐기에 그들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이해합니다.”라고 말했다.
현재 그는 멕시코에서 기독교 학교 설립과 중학교 개교를 준비 중이다. 그는 아이들이 교육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새로운 세대의 선교사로 성장하길 꿈꾼다.
윌슨 선교사의 이야기는 단순히 한 사람의 삶의 변화가 아니다. 그의 고난과 극복은 사랑과 섬김의 본질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기에,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어줄 수 있었다.
그의 마지막 메시지는 간결하지만 강렬하다. “하나님께서 저를 선택하셨듯, 여러분도 선택받은 자들입니다.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윌슨 선교사의 삶과 사역은 오늘날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과 헌신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그의 이야기는 세상의 소외된 이들에게 희망이 되는 동시에, 우리 모두가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함을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