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엔도 슈샤크의 <침묵>을 좋아한다. 소설가의 영성이 수도자의 영성보다 깊다. 물론 추체험만으로 그런 상상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그가 제시한 화두는 깊은 영성의 수도자에게도 유익하다. 그런데 작가가 <침묵>을 통해 말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이 옳은가를 생각한다. 꼭 막힌 사람은 성상을 밟고 지나간 로드리고 신부가 배교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꼭 막히지 않은 사람은 로드리고 신부의 선택에서 오히려 살아있는 신앙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을 부인함으로 시작하는 예수의 제자를 소환한다. 나는 로드리고 신부의 선택이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성서의 모든 인물이 걸었던 길이다.
모세의 경우에서도, 바울의 경우에서도 그것을 발견한다. 베드로의 경우는 그것의 일상화, 다시 말해 베드로의 아비투스가 된 그의 일상을 상상할 수 있다.
자기를 부인한 예수의 제자는 옳고 그름을 예리한 판단으로 가리지 않는다. 베드로의 경우를 생각하면 옳고 그름을 아예 따지지 않는다. 그는 성서의 특별한 인물이다. 특별히 자아가 강했던 그는 자신의 자아가 모든 것의 문제임을 깨닫고, 주님의 말씀대로 남이 이끄는 대로 따라 가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이 사실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의 성덕(saints' virtues)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가장 고매한 덕이라는 의미이다.
그 길에서 우리는 아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세상에서 가장 설득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목사들이라는 것을 나는 거듭 발견했다. 그들이 아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상은 조금 아는 것이고, 그 조금 아는 것으로 행세를 하려는 자들이기 때문에 설득이 불가능해진다.
얼마 전 나는 한 목사를 알게 되었다. 그는 내게 다가왔고, 자신의 멘토가 되어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 나는 이끌리는 사람으로서 다른 이들의 멘토 역할을 거절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무임목사였던 그가 한 교회의 목사로 청빙이 되었다. 처음에는 전과 마찬가지로 내게 많은 것을 물어왔고, 잘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내가 하는 말을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했고, 마침내 나와의 관계를 끊었다. 내가 자신을 모욕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를 모욕한 것이 아니라 그가 잘못하고 있는 것을 비추어주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대노하여 나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내게 늘 있을 일이라 그러려니 했지만 안타까움마저 전혀 없을 수는 없었다. 교회와 교회의 일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던 사람이 자신과 자신이 하는 일에 무의식적으로 절대성을 부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만 그런 것이 아니다. 한 교회의 목사가 된다는 것은 절대자가 된다는 사실과 동일하다. 그렇게 교회는 그 목사의 우상이 되고, 그렇게 된 목사는 자신이 하는 일에 중독되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상실한다. 그렇게 정체성을 상실한 사람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자신과 자신의 일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거의 대부분의 목사들은 그렇게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상실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부족신, 다시 말해 자기 교회의 신이 되고 만다. 그리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교회의 담임목사가 된 목사들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교회의 머리가 된다.
그런 그들은 권위 있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되어 자신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된다. 그런 곳에서는 자연스럽게 ‘자발적인 동의’가 사라지고 강요와 지배가 그것을 대치하게 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그러나 그들은 발견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의 교회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이방과 같아짐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목사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안내해주고 선택을 그들의 자율에 맡기는 하나님 나라의 방식을 거부하게 됨으로써 이방의 대인들, 다시 말해 지배하고 통치하고 군림하는 권력을 추구하는 자가 된다.
그런 목사들은 점점 더 획일성을 고집하고 자신이 인정한 것만을 고수하는 독재자가 된다. 결과적으로 그런 목사들에게 새로운 깨달음이 불가능해지고 더 이상 배울 수 없는 사람들이 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인정한 명확한 교리와 도덕률을 절대시하며 모든 세상사를 그것으로만 판단하는 획일적인 사람들이 된다. 거기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 그들은 대화할 수 없고, 각 사람이 가지는 특별한 상황 속에서 그들이 그들의 길을 잘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거해버린다. 한 마디로 획일적인 사람들을 만듦으로써 각 사람이 가지는 고유한 특성을 말살해버린다. 힘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사고할 수 없고 복음의 모험에 뛰어들 수 없는 장애인들을 만든다.
그런 교회의 교인들은 두려움을 지니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처벌의 두려움으로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을 신앙으로 아는 사람들이 된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사랑의 평안함과 긍휼이 사라지게 된다. 교회를 오래 다닐수록 교만하고 융통성이 없고 사나운 사람이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이 성령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독재자가 된 목사에게 이끌리는 사람들이 된 것이다.
그런 교인들은 자신들의 교회야말로 자랑스럽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은 결과적으로 개교회주의와 비교의식으로 다른 교회들을 적대적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나는 대부분의 대형교회 교인들에게 이러한 의식이 있다는 사실을 늘 보고 있다. 이들은 자기들의 교회의 멤버십을 특권으로 여기고 심지어 결혼까지 자기 교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된다. 그런 그들에게는 늘 혐오와 배제가 기재로 작동하게 된다. 외부의 적을 만듦으로써 자신들의 멤버십을 강화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교회가 열린 곳이 아니라 닫힌 곳이 된다.
그런 교인들은 자신들의 교회를 떠날 수 없고, 교회는 특정한 의식이나 프로그램을 운영함으로써 그것을 통해서만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의 무의식에 각인시킨다. 그들에게 자기 교회에서 하는 일만이 은총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은총에 이르는 다양한 길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다양한 길들을 확장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오로지 자기 교회와 목사만을 위해 모든 삶을 낭비하게 된다.
나는 은퇴 장로들이 자신들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예배에 참석하여 자기 교회를 지켰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듣게 된다. 우상이 된 교회의 목사들처럼 장로들 역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목사가 장로가 되지 않은 것이 은혜의 방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교회와 자기 교회 목사에게 충성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충성하고 헌신해야 하는 사람들임을 망각하게 된 것이다. 만일 하나님과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충성하고 헌신한다면 온 세상과 모든 교회가 자기 교회와 똑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고, 그래야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고통에 집중하고 그 사람들의 신음소리에 반응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들이 될 수 있다.
오늘날 교회는 우상이 되었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자기 교회 안에서 잘 하는 것을 더 잘 하려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라. 그것이 일상이 되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됨을 알게 될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일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그것은 자유의 길에서만 가능한 모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