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통에도양반들은 부를 축적했다 - 전쟁을 부르는 자들에게 속지 마라

보잘 없이 떠도는 자의 기록이라는 뜻의쇄미록(瑣尾錄)’ 이순신의 '난중일기', 류성룡의징비록 더불어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는 소중한 기록물이다. 본래 완역본은 6권으로 되어 있는데 내용을 축약한한권으로 읽는 쇄미록’ (사회평론아카데미, 2020) 봐도난중일기징비록에서 없는 당시 시대상을 파악할 있다.

쇄미록 남긴 해주 오씨 집안의 9품의 양반 오희문은 토목과 건축일을 관리하던 감역(監役)직의 양반이었다. 감역이란 한자에서 있듯이 요즘말로 하면 토목공사 현장의 감독 정도 되는 중급 관리였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6개월 전인 1591 11 27일 그는 충청도, 전라도에 있는 친척들을 방문하고 자신의 땅을 관리하던 외거노비들로 부터 일종의 소작료를 걷기 위해 지방행에 나섰다. ‘쇄미라는 의미는 소박하지만 임진왜란 중에도 그가 누린 생활을 보면 놀랄 밖에 없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자신의 직무를 하지 않아도 오희문은 괜찮았던 걸까?

임진왜란 중에 충청 호남지역은 영남지역에 비해 피해를 입은게 사실이다. 일단 왜군의 주력부대는 동래에 상륙하여 지금의 경부선 루트를 통해 한양에 입성했다. 반면 호남지역은 의병장들의 활약이 컸고 이순신의 수군이 일본의 접근을 막아내었다. 오희문은 한양을 떠나 임진왜란이 끝난(1598 11)뒤인 1601 226일이 되어서야 한양으로 돌아왔다.

피해를 입었다 해도 전쟁중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전쟁은 그에게 상관없었다. 그는 인맥을 쌓고, 자식들의 혼사를 치르고, 제사를 지내고, 전쟁통에 노비들이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단속해가며 부를 축적했다. 먹을거리가 없어 사람을 잡아 먹는다는 소문이 횡행할 때고 역시 그런 소문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양반의 삶을 누리는데는큰 지장이 없었고 나라가 망하는 것도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완역판 6권을 읽지 못하고 축약본의 내용만 가지고 말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오희문은 침략한 만행은 언급않고 지원군으로 명나라 군인들의 횡포를 기록한다. ‘ 명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거쳐가는 존재고, 명과 조선의 관계는 지속된다는 생각때문이 아니었을까? 다시 말해 오희문의 재산을 중심으로 판단하면 왜보다는 명이 재산상의 불이익을 있다는 우려가 있었을 것이다. 많은 민중들이 왜군에 의해 학살당하는 것은 그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일본 역사학자 요시쿠노는임진전쟁 세계에서 봐왔던 전쟁 가장 잔인하고 부당한 전재의 하나였다고 평가했다. 요수쿠노가 글을 것은 1937년이니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의 만행을 물타기 하는 것으로도 있으나 임진왜란이 잔혹했던 것만은 부인할 없다. 1592 5 조선에 들어온 왜군은 부산과 동래에서 거대한 살육을 저지르고 파죽지세로 한양에 도착했다. 한반도에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지만 임진왜란은 번도 경험못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오희문은 난리 중에도 딸의 혼사를 치렀으며계집종 명을 사기도 했다. 금구현에서는 현감 김복억에게 대접을 받은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현감 김복억을 만났다. 전에 서로 일면식은 없었지만 명망을 들은 오래라며 후하게 대우해주었고, 노자로 백미 1, 중미 1, 1, 조기 1, 절인 10마리, 감장 3, 간장 , 소금 1되를 주었다. 고마움을 금치 못하겠다.

그들은 일면식도 없었다. 게다가 오희문은 높은 직책의 양반도 아니다. 단지 한양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김복억에게는 관계를 터야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전쟁 중에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베푼 대접이 그것을 증명한다.

또한 연고가 없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관아에 들어가서 아침을 먹었다. 오늘 검사 같은 공무원들이 지방의 검찰지청에 들어가 서로 기수를 확인하며 특활비로 밥과 술을 얻어 먹는 것과 같다. 이렇게 형성된 네트웍은 나중에 어떤 형태로든지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1594 10 1일의 기록을 보자.

전라우도의 여러 고을을 차례로 순회하기 위해 출발하려는 때에, 신대흥, 김경, 이신성, 민우경,신용규와 내가 함께 관청에 앉아 작은 술자리를 마련하여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보니 이미 정오가 지났다. 이로 인해 현감이 출발을 멈추었다. 신대흥과 김경은 주량이 차지 않아서 마시기로 했다. 고을에 사는 생원 안근인의 집에 술이 있다는 말을 듣고 곧장 달려가서 크게 취하고 돌아왔다.

공식적인 순회를 앞두고 이들이 술판을 벌여 공식행사가 늦어진 따위의 일은 중요한게 아니다. 술이 모자라 하급 양반인 생원의 집에 가서 2차를 했다. 생원 안근인이 만약 이날의 술자리를 기록했다면오늘 높으신 양반들이 우리 집에 와서 2차를 했다. 영광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오늘의 일을 출세의 기회로 삼아야 겠다라는 내용이 분명히 들어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기록도 있다.

할아버지의 제삿날이다. 떡과 ,과일, , 식해 등을 차려 잔을 올렸다. 종손이 모두 죽어서 제사를 지낼 사람이 없고, 다음 항렬에도 지낼 사람이 없다. 그래서 아득한 끝자락 지손(支孫)이지만 차마 그냥 지나갈 수가 없어서 차린대로 정성을 올린 것이다. 지극한 슬픔을 견딜 없다.

오희문이 말하는 할아버지는 직계가 아니다. 직계는 모두 죽었고 오희문은 자신의 표현처럼 아득한 끝자락 지손(支孫)이지만 친척뻘 할아버지의 제사를 정성껏 지내주며 슬픔을 견딜수 없어 한다. 왜에게 유린당하고 있는 조선의 현실은 그의 사고 회로 속에 없다.

용안 현감이 내게 가을보리 4 5되와 말린 민어 1마리를 주고 잔을 마시게 했다. 덕노를 시켜 얻은 보리를 짊어 지게 하고 현감과 훗날 만나기로 기약한 뒤에 작별하고 왔다.

서울에서 9 양반에 대한 지방 관리들의 대접은 그치질 않는다.

통제사 원균이 왜선 2척을 포획하고 왜적 65명이 수급을 베었다고 한다. 참으로 기쁜 소식이다.

놀랍지 않은가? 오희문은 이순신에 대해 한번도 언급하지 않는다. 무능하고 불의한 장수의 대명사 원균을 칭송하는데서 오늘날의 현실과 흡사함을 본다. 오희문같은 양반의 인맥에는 이순신보다는 원균이 그의 욕망을 달성하는데 훨씬 도움이 되는 인물이다.  

백성을 학살하고 나라를 경제적 파탄으로 몰고간 우파 정권의 드물게잘한 대해서는 칭송을 아끼지 않으면서 국가 신뢰지수 향상과 경제 부흥, 복지의 확대. 남북갈등의 해소 등에 대한 진보정부의잘한 제쳐두고 그들의못한 침소봉대하는 아스팔트 우파들이 투사되지 않는가?

역사학자 이덕일이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에서 언급했듯이 송시열로 대표되는 노론들은 국가의 미래보다 그들 집단의 이익을 더욱 소중히 여겼다. 그래서 지금의 정부처럼그때는 옳고 지금은 틀린발언과 행위들을 하면서 아무런 부끄러움 조차 없는 것이다.

하마스 이스라엘 충돌 시국에서 대한민국의 정부는 ‘9.19선언의 파기 슬슬 흘리면서 오히려 전쟁을 부르는 해법을 내놓고 있다. 그들이 부르는 전쟁 혹은 남북의 국지적 충돌은 국가의 미래와 안보와는 상관없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록 그들의 기득권은 더욱 강화되어서 주머니는 두둑해진다.

그러므로 국난이 일어났을 의병을 일으킨 사람들은 양반의 세계관에서 혼란의 시국에 부를 축적하려는 그들의 계획을 가로 막는 세력이 된다. 그래서 조정은 임진왜란 당시 관군보다도 왜군을 물리친 의병 조직에 거부감을 가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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