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는 왜 가톨릭에게 야스쿠니신사 해법을 물었을까?

# 맥아더는 가톨릭에게 야스쿠니 신사 해법을 물었을까

#일본 우익은 야스쿠니 신사에 집착할까

윤석열의 친일적인 광복절 축사를 두고 어떤 사람이이러다가 윤석열 내년에는 야스쿠니 가는 아냐?”라는 SNS 올렸다. 일본의 과거사 반성을 촉구하는 내용은 없고 반공정신으로 가득찬 광복절 축사를 읽고 있으면 마치 대한민국이 소련이나 중공으로부터 독립한 것이 아닐까 하는 실소가 나온다. 게다가 여지 없이 올해도 일본의 정치인들은 야스쿠니를 찾았다. 기시다는 한미일 정상 회담을 고려했는지 야스쿠니에 공물을 바치는 것으로 참배를 대신했다. 한국 정부는 혹시라도 일본이 들을세라 아주 짧은 유감을 표명했다.

1945 8 일본이 패망하고 맥아더는 최고 사령관으로 일본을 통치하면서 야스쿠니 신사에 주목했다. 야스쿠니는 일본의 국가 종교 시설로 가미카제 특공대를 비롯한 일본 군국주의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가미카제 자살 특공대는 출전에 앞서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는 구호로 그들의 결의를 다졌다.

이를 알고 있던 맥아더는 종교와 국가주의가 뒤섞여 있는 신사를 어떻게 처리할 고민했다. 장로교인이었던 그는 일본의 개신교가 ‘일본기독교단’으로 대부분 통합된 상태여서인지 모르겠지만, 일본기독교단을 군국주의 일본의 하수인 정도로 생각했는지 개신교를 제쳐두고 가톨릭을 자문 상대로 삼았다. 둘 다 한 줌도 안되는 작은 세력이지만 일본에서 가톨릭이 더 많기는 하다. 

사령부에 호출된 독일 예수회 소속의 브루노 비테르(Bruno Bitter) 미국 메리놀회 소속의 패트릭 (Patrick J Byrne) “야스쿠니 신사를 파괴하면 일본인의 감정을 해칠 있다. 가톨릭은 야스쿠니 파괴에 반대한다”고 대답했다. 맥아더는 이런 답변에 놀랐다고 전해지는데 결국 정교 분리를 일본 헌법에 포함시키는 수준에서 야스쿠니 문제를 정리했다. 일본의 전통적 신앙이라는 점만 고려했지 그것이 전범을 찬양하는 도구가 된다는 점까지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브루노 비데르는 나치에 협력한 독일 가톨릭출신이고, 패트릭 번은 미국출신이기는 하지만 바티칸을 최고의 상위 조직으로 삼는 조직 특성상 바티칸을 인식할 밖에 없었다. 바티칸은 2 대전 전범국인 이탈리아의 영토 내에 있기 때문에 2 대전 내내 침묵했던 것은 그들의 최대 흑역사었다.

일본이 중국을 침공한 1937 10 교황청은 전세계 가톨릭 교회는 일본에 접극협력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10 17일자 아사히 신문은 '방공(防共) 정신의 입장에서 일본과 완전협력, 로마 법황청의 지령’이라고 타이틀을 뽑았다. 당시 마오저뚱의 중국공산당이 활동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전쟁 상대는 장재스의 국민당 정부였다. 공산주의를 막는다는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과거를 맥아더는 너무나 간과했다.

일본 신도(神道) 사당인 신사는 전통 종교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서 일본의 군국주의 시대를 미화하는데 앞장 서는 기관이다. 그곳이 2차대전 전사자들의 무덤인 국립묘지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2 대전 추모시설은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이라고 별도로 있다. 신사에는 오직 유교식 제사의 신주 같은 것만 진열되어 있다.

19세기 중엽까지 크고 작은 신사는 일본 전역에 있었지만 (정부) 관리를 받는 신사(大社) 모두 16개였다. 이들은 관폐대사(官幣大社) 불렸다. 일본의 내전인 1868보신 전쟁이후 세워진 야스쿠니 신사는 관페대사와 달리 별격관폐사(別格官幣社)였다. 별도로 관리되는(別格) 신사였다는 의미다. 1945 이후 다른 신사들과 격이 같아진 것은 2 대전 전범들의 격을 높여 준다는 노골적인 의미를 담은 결정이었다. 어쨌든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면서 신사는 신도의 종교 기관으로 자리잡아가는 했다.

1979 일본의 동북지방 이와태(岩手)현의 의회가천황과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 추진 결의 하고 그것을 정부에 진정했다. 비유하자면 보수 기독교인들이 많은 어떤 지방 의회가 대통령이 예배에 참석할 것을 공식화하자는 추진 결의를 중앙정부에 올린 것과 같다. 국교가 없는 나라에서 이런 결의안 자체가 불법이다. 지역의 일본 교회는 특정 종교에 세금을 쓰는 것은 불법이라고 위헌 소송을 냈다. 기독교인의 숫자가 지극히 적은 일본에서 교회가 대단한 용기를 것이다.

재판은 비용이 경미하다는 이유로 각하되었고 추진 결의 진정도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건을 계기로 국가 신도에 대한 향수가 일본인의 호전 의식 속에 꿈틀대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의 보수는 야스쿠니 신사에 집착하는가?

정치인들의 공식적인 참배가 없다가 일본 우경화를 본격화시킨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일본 우익들의 참배가 줄을 이었다. 준이치로 이후 겨우 20년만에 반성없이 참배하는 전통은 당연한 것이 되어 버렸다. 한국의 침묵 속에, 미국의 묵인 속에 야스쿠니에서 만나자 군국주의 향수를 일본 우익은 자양분으로 삼아 재무장으로 차츰 세력을 키워 나가고 있는 것이다.

1961년 박정희와 이케다 / 사진 출처 : 대한 뉴스 자료사진
1961년 박정희와 이케다 / 사진 출처 : 대한 뉴스 자료사진

현재 기시다는 일본 자민당 파벌 하나인 굉지회 소속이다. 굉지회(宏池) 일본어로는 코치카이( こうちかい )라고 하며 1957 창설된 중도 노선의 파벌이다. 일본 역사에서 비교적 높은 평가를 받는 총리 이케다 하야토(1960~1965 재임) 창설자다. 기시다는 이케다 하야토를 정치적 스승으로 삼고 있으며 일본 국회에서이케다 하야토 총리의 정치적 자세는 관용과 인내였다 아베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기도 했다.

기시다가 총리가 되었을 그를 중도 노선으로 분류한 언론이 많았던 것도  때문이다. 과연 굉지회는 중도 파벌일까? 일부에서는 중도파로 포장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창립자 이케다 하야토는 술만 마시면 핵무장을 주장한 핵무장론자였으며 과거사에 대해서도 후안무치한 것으로 유명하다. 1963년에 일본 공산당 국회의원이 조선 인민에 대한 비도덕적인 행위에 대해 총리는 진정으로 반성하고 있는가라고 묻자조선을 병합한 이후 일본의 비행에 대해서는 나는 견문이 적어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합니다"라고 답변해서 논란을 일으켰다.

그를 정치적 사부로 삼고 있는 기시다의 화법과 매우 흡사하다

이케다는 취임 이듬해인 1961년 일본을 방문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국교정상화에 합의했다.  ‘명예롭지 못한’ 식민·피식민의 과거사는 일절 따지지 않기로 한 것도 포함되었다. 일본 정치인들의 의식 속에는한국을 주면 과거를 잊어주는 우리의 옛 식민지라고 깊이 각인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이케다에서 사토 총리로 이어지는 1960년대 일본은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할 때였다. 당시 일본의 지도자들에게 한국은 겨우 광복 20년만에 자존심을 팔아 넘긴 나라라는 생각이 가득 있었을 것이다. 윤석열의 아버지 윤기중 교수는 바로 시기인 1966년부터 1968년까지 일본에서 공부했다.  윤석열은 당시 일본을 아름다웠다고 회상했다.

한국에서는 한일국교 정상화 반대 시위가 한창일 때였다. 목소리를 이어온 민주화 운동 전통은 이번 광복절 경축사에서 일본의 아름다움을 추억하는 사람에 의해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는세력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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