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문이 다시 듣고 싶은, 읽는 설교

오늘 주현 두 번째 주일을 맞이하여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하기를 빕니다. 얼마 전 사과 한 박스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굉장히 좋은 사과였는데요. 박스를 열어보니 글쎄 사과 한 알 한 알에 큰 글자로 복 이렇게 써져 있더라고요. 걸 보고 리나라 사람들은 정말 복을 좋아하는구나! 숟가락 젓가락 베개에도 다 복자 써져 있더니,이제는 과일에도 복자를 써서 이렇게 파는구나싶었습니다.

시카고 기쁨의교회 유튜브 영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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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교인들에게 예배 중에 어떤 시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 물어보면 설교다 찬양이다. 기도다 하는데요. 예전에 제가 어릴 때 저희 교회 어른들을 보면,축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예배 시간에 여성 교회분들이 예배는 안 드리고 밑에서 예배 후에 먹을 그 음식 준비를 계속해요. 그러다가 축도 시간 되면 축도 받으러 가야된다고 올라와서 축도 받고 내려가는 분들을 제가 여러 번 봤거든요. 그래서 복받는 게 저렇게 중요한가 보다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오늘 봉독한 민수기 622절에서 26절은 흔히 아론의 축복 혹은 제사장의 축복이라고 불리우는 축복 기도 즉 축도입니다. 기독교 예배는 보통 축도로 끝이 나지 그런데 대부분은 이 축도의 내용과 형식이 사도 바울이 서신서의 맨 마지막에 한 그 축도의 내용을 따릅니다. 예를 들어 고린도 후서 1313절을 보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 합니다. 여러분에게도 익숙한 축도이지요. 그런데 한국교회 이 축도의 마지막 문장 때문에 논란이 조금 있습니다. ”있을지어다파가 있고, ”축원하옵나이다파가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있을지어다이렇게 끝나고 어떤 목사님들은 축원하옵나이다이렇게 끝나죠. “있을지어다는 복을 선언하는 것이고, “축원하옵나이다는 복을 비는 기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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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게 맞을까요? “있을지어다가 맞다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은, “성경에 있는 대로 해야 되지 않느냐? 성경에 있을지어다 이렇게 끝나니까 그게 맞다라고 이야기를 하는데요. 사실 안타깝게도, 헬라어 언어에는 있을지어다가 아예 없습니다. 그냥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이렇게 끝납니다. 왜냐하면, 이게 편지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끝나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은데, 이걸 예배 형식으로 가지고 오면서, 또 번역을 하면서, “있을지어다가붙은 거죠. 축도가 복을 선언하는 것일 수도 있고, 기원일 수도 있고 둘 다 일리가 있습니다.

어느 게 맞느냐 굳이 따진다면, 저는 저는 복을 기원하는 쪽이 더 맞다,라고 생각하는데, “축원하옵나이다가 너무 옛날 말이고, 어법에도 맞지 않아서, 저는 우리 말 어법에 맞는 방식으로 있어지이다로 합니다.

주기도문 봐도, “뜻이 하늘에서 이른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다그리고 마리아가, 천사가 와서 (전해 준) 예수님의 잉태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지요. 우리 말에 지다”, 이것이 기원하는 종결 어미로 사용되거든요. 하지만 있을지어다파와 축원하옵나이다파에 비하면 있어지이다파는 소수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왜 제가 그렇게 하는가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 말씀을 드렸는데요. 축도에 관해서 생각해 볼 게 굉장히 많아요. 사실은 여러분 축복은, 거기서 빌 축자를 쓰고 그래서 하나님이 축복해달라고 한다는 것이 어법에 안 맞는다는 거는 이제 많이들 아실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거지,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건 아니죠. 왜냐하면 축복은 우리가 복을 비는 것이니까요.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축도는, “누가 할 수 있는가?”입니다. 전통적으로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서는 오직 안수받은 목사만이 축도를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져 왔죠. 제가 특별 새벽 예배 때 말씀드렸지만, 제가 미국에서 담임 목회를 안수 받기 전에 전도사 시절의 담임 목회를 시작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 교인들은 2년 동안 축도를 못 받았어요. 왜냐하면 제가 목사가 아니어서 축도권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축도를 못하고 항상 주기도문으로 끝났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가 축도보다 이렇게 한 단계 밑에 있는 것처럼 돼버린 거죠. 제가 축도할 수 있게 되니까, 교인들이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이제 드디어 축도를 받는다고. 그런데 미국 교회에 가보니까, 꼭 목사만 하는 게 아니더라고요. 교단마다 다르지만, 장로님들도 축도 하더라고요.

그럼 성경은 뭐라고 할까요? 사실 사도 바울의 축도는 우리가 그것을 예식의 마지막 어떤 형태로 가져온 것이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론의 축복 제사장의 축복은, 하나님이 아예 이렇게 축복하라고 다 알려주신 직접 알려주신 내용이죠. 23절에 보면,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라고 말합니다. 이 축복 기도를 즉 축도를 누가 해야 되는지 아예 지명하여 알려주셨습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축복하라!” 이 사람들이 누굽니까 제사장들이죠. 즉 백성들을 위해서 복을 비는 행위, 축복 기도, 축복은 제사장이 해야 할 고유한 책임이고 의무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그럼 이제 누군가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거 봐! 죽도는 제사장이 하라고 하셨네. 그러니까 목사님이 하셔야지. 우리 제사장 손 목사님그러면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목사가 왜 제사장이야? 만인제사장 몰라? 우리가 다 제사장이지. 그러니까 우리도 축도할 수 있는 거지!”.

어느 게 맞을까요? 제가 계속 할까요? 여러분도 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왜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즉 제사장들에게 백성들을 위하여 축복하라고 하셨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론과 그 아들들 즉 제사장의 아들들에게 제사장 직을 맡기셨는데, 이들은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어느 지파에 속한 사람들이었죠. 레위 지파 속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제사장을 비롯한 레위 지파들은 주로 하는 일이 뭐였냐면, 성막 그리고 성막에서 드리는 예배와 관련된 일을 했지요. 그래서 성막 기구를 돌보거나 운반하는 일들도 다 레위지파 사람들의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지파가 이제 민수기는 광야를 이동하는 이야기잖아요. 근데 광야를 이동하다가 진을 치면, 성막을 가운데 놓고 모든 지파가 뺑 둘러서 동서남북으로 진을 쳐요. 그런데 지도를 보면 지금 그림을 보면 아실 수 있는데, 성막이 가운데 있고, 지파들이 쫙 동서남북으로 진을 치면, 성막과 각 지파들 그 중간에 저 별표로 한 것이 뭐냐면, 레위지파가 나누어서 거기에 진을 친 거예요. 그러니까 성막과 지파들 백성들 사이에 레위지파 사람들이 진을 친 거죠. 왜 이렇게 했을까요? 이들에게 중요한 임무가 있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외부인이 성막에 함부로 들어오려고 하면 그걸 막는 겁니다. 그래서 민수기 1장에 보면 외부인이 성막으로 들어오려고 하면 그를 죽이라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함부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그를 죽이라는 거였어요.

그런데 반대 역할도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성막 안에 있는 하나님의 그 거룩한 임재와 영광에 의해서 백성들이 죽지 않도록 그것을 막아서는 거예요.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진노할 때, 그 진노가 직접 백성들에게 가지 않도록, 그 중간에 누가 있냐면 레위인이 있는 거죠. 그렇다면 레위인은 뭐냐면,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일종의 *법서 역할을, 완충지대 역할을 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게 제사장의 역할과 책임이었어요.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백성들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함부로 훼손하지 못하게 하고, 반대로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로에 의해서 직접 백성들이 당하는 일이 없도록 막아서는 일을 제사장이 했습니다.

모세를 생각해 보죠. 하나님이 시내산으로 백성들을 불러 모아서 십계명을 주실 때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직접 못 가니까, 누가 갑니까? 모세가 가는 거예요. 그다음에 백성들이 십계명 기다리는 동안에, 금송아지 만들어서 우상숭배를 하고 하나님이 진노하시니까, 모세가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을 막아서죠. “하나님! 하나님의 책에서 제 이름을 차라리 지워주십시오이게이런 게, 제사장적인 역할이었던 거죠. 즉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의 중간자적인 역할을 제사장이 했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함부로 하나님 앞에 함부로 다가가는 것을 막아주고 반대로 하나님이 백성들을 직접 심판하시는 것을 막아주는 중간 역할을 했는데, 그런데 여러분, 제사장은 이렇게 서로 하나님과 백성이 헤치지 못하게 Buffer 역할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예배하고 제사하고 찬양하려고 할 때 백성들은 제사장을 통해서 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축복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복 주시려고 할 때 제사장을 통해서 했어요. 즉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론의 축복 제사장의 축복이 그 얘기인 거죠. 하나님의 백성들을 제사장의 기도를 통해서 복 주시겠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제사장은, 백성을 위해 복을 빌어야 할 책임과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심판당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만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도록 빌어주는 존재로 거기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제사장이 거기 있는 존재 이유였습니다.

그러면 이 제사장의 축복, 축도문은, 그 문장도 그렇고 내용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저는 이 축복 기도문에 대해서, 송민원 교수님의 성서학당에서, 지혜란 무엇인가, 책 읽었는데 그 책의 저자인 송 교수님의 해석을 통해서 많이 배웠는데요. 두 개를 소개하면, 24절에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고 할 때 그 복을 주시다’, ‘복주다’, ‘축복하다라는 의미의 히브리어인 바라크무릎을 꿇다라는 뜻의 어근을 가지고 있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는 게 복이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는 거죠. 여러분은 어떤 복을 원하십니까?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것이 복입니다. 또 한 가지 26절에 보면, “여호와는 그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드사라는 표현인데, 여기서 얼굴을 들다라는 히브리어 동사는 기본적으로 위로 들어올리다라는 뜻이라는 거죠. 그러면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복 주신다이럴 때는 하나님이 저 위에 계시고 우리가 밑에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내려다보시면서 복 주시는 것 같은데, 오늘 성경은 뭐라 그랬냐면, “그 얼굴을 너를 향하여든대요. 물론 고개를 들어 앞을 본다는 수사적 표현일 수 있지만, 문자 그대로는 하나님이 고개를 들어서 우리를 본다는 거예요.

그래서 송 교수님은, 더 이상 내려갈 바닥이 없을 것 같은 그런 순간이 있었대요. 좌우를 돌아봐도 아무도 나를 도와줄 리 없고, 하늘을 쳐다봐도 하나님도 안 계신 것 같은 그 순간에, 이 기도문을 읽는데, 하나님이 오히려 나보다도 더 밑으로 내려가셔서 고개를 들어 나를 보시고, 나를 떠받고 계시는 그것이구나, 라고 생각하며 큰 위로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사장이 여러분 이런 축복들을 하는 거예요. 세상의 부귀 영화가 복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것이 복이니, 이런 복을 저들이 받게 해달라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내려갈 바닥이 없는 이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그들 밑에서 그들을 향하여 얼굴을 드사 그들에게 평강 주시기를 원한다고 그들을 위하여 복을 비는 것입니다. 이 축도를 날마다 하는 것이, 제사장의 사명이고 제사장이 거기 있는 이유인 것이죠.

그렇다면 여러분, 이 역할을 이 제사장의 역할을 이제 누가 해야 하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해야죠. 누가 이 제사장에 축도를 해야겠습니까? 우리가 서로에게 이런 복을 빌어주는 존재가 되어야죠. 여러분 축도는 누군가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를 축복하는 존재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복 주시고 그대를 지켜주시기를 원한다고 빌고, “그분의 얼굴을 비추사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원한다고 빌고, “그 얼굴을 그대를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한다고 빌어주는 관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 혼자 복받기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나로 인하여 복받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 시카고 기쁨의 교회 성도들이, 서로에게 이렇게 축복하고 복을 빌어주는 관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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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여러분,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제부터가 진짜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신의 산으로 부르셨을 때 출애굽기 19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여러분,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게 무슨 뜻이겠어요? 나라 전체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제사장이 되어서, 하나님이 세상을 복 주시도록 한 그 일을,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거예요. 이 세상이 멸망하지 못하도록 막아서는 그 일을,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하시겠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통해 온 세상이 구원받는 그리고 복받는 그 일을 하시겠다라는 선언인 거죠. 그게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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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흔히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는 말 이 표현에는 좀 문제가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9절을 잠깐 볼까요. 우리가 잘 아는 구절이잖아요.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이 말이 무슨 뜻이겠어요? 여기서 너희는 누구일까요.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고 거룩한 백성이라고 말할 때 너희가 누구일까요? 우리죠!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이죠! 교회죠! 근데 너희가 제사장이라는 거잖아요. 근데, 여러분, 이 말은 목사만 제사장이야, 우리 다 제사장이야, 만인 제사장이야, 라고 하기 위해서 주장하기 위한 그런 구절이 아닙니다. 이 말은, 아까 출애굽()에서 얘기한 제사장 나라를 가리키는 표현이에요. 그래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번역한 건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공동체가 교회가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이에서 제사장 나라로 부름받았다는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시카고 기쁨의 교회가 이 Glenview에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복 받기 위해서 여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제사장 공동체가 되어서 우리 때문에 이 지역이 복받게 하는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는 그 얘기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왜 그 직장을 다니고 있습니까? 그 직장에서 돈 많이 벌고 성공하는 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통하여서, 그 직장과 그 직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 주시기 위하여, 즉 제사장으로 여러분을 거기에다가 세우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지역에서, Town에 살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조금 더 편하게 사는 복을 받고 우리 아이들 잘 키워서 성공하게 만들기 위하여, 그런 복 받기 위하여, Town에 사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거기 있어 여러분이 제사장이 되어서 하나님이 여러분 지역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하기 위하여, 여러분을 그곳에 살게 하신 것입니다.

복음 성가 중에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라는 곡이 있죠. “내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너를 위해 기도하네정말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근데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한다는 거예요. 저는 저를 위해서 누군가 기도한다는 걸 알고 있어요. 생각해보면, 그분들이 그렇게 기도해 줘서 받는 복도 있지만 조금 더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요. 그분들이 제게 복이더라고요. 그냥 그분이 제게 복이더라고요. 여러분, 누가 생각나시나요? 룻을 위해서 보아스가 축복 기도를 하잖아요. “하나님이 이 여인을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하여 주시고 온전한 상주시기를 원합니다라고 축복 기도를 해요. 근데 여러분 보아스가 놀라운 게 뭔지 아십니까? 그 축복한 다음에 보아스가 룻에게 그렇게 합니다. 보호해 주고요, 상을 줘요. 자기가 이 여인을 위해서 복 빌어준 그 내용대로, 자기가 하는 거예요.

그랬더니 보아스가 룻에게 복이 됩니다. 룻에게 복은 보아스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가는 곳마다 누군가의 복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정말 제가 뉴저지()에서 시카고() 와서 시카고 기쁨의 교회에서 목회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제게 복이세요. 저는 정말 우리 기쁨의 교회가 이 지역의 복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우리가 이 지역 생태계와 환경에 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대로 놔두면 지금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 사회와 이 세상의 멸망을 Buffer가 되어서 가로막는 역할을 우리 교회가 했으면 좋겠습니다. 절망과 아픔 속에서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나타내고 보여주는 존재로 우리가 여기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저와 여러분이 여기 있는 이유요, 여러분이 그 직장에 있는 이유요, 여러분이 그 Town에 살고 있는 이유와 목적인 것입니다.

지난주 한국의 온라인 상을 뜨겁게 달구었던 다큐멘터리가 있었습니다. 유튜브와 소셜미디어에서 너무 화제가 되었는데, 혹시 보신 분들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어른 김장하>라는 제목으로 2부작의 다큐멘터리가 방영이 되었는데, 혹시 못 보신 분들은 오늘 집에 가셔서 2부작 다 보시기를, 꼭 추천을 드립니다. 보신 분들 모두가 다 그랬겠지만, 저도 너무 감동을 했고요, “우리 사회에 이런 어른이 있었구나!“ 싶어서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진주에서 60년 동안 <남성당 한약방>을 운영해온 김장하 선생은 한약방 하나로 큰 돈을 벌었지만, 그 돈의 거의 전부를,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늘 베풀었고, 시민사회단체와 지역 언론들을 위한 후원금으로 다 했습니다. 본인은 다 헤어진 양복을 입고, 평생 차 한 대도 가지지 않고 걸어 다니면서 말이죠.

똥은 쌓아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어버리면 거름이 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 돈도 이와 같아서 주변에 나누어야 사회에 꽃이 핀다. - 김장하

이분이 그런 말을 해요. ”나는 누군가 아픈 사람 때문에 돈을 벌었는데 그걸 가지고 날 위해 쓸 수 없다.“ 생각하고 그걸 다 나눠줍니다. 1984년 진주 명신고등학교를 이분이 돈을 들여서 설립해요. 30대 후반인가 40대 초반이에요. 근데 그거를 1991년 국가에 헌납을 하는데, 그때 학교 법인 자산 가치가 그때 가치가 백억 원인데 그걸 그냥 넘깁니다. 이분을 통해 장학금을 받은 사람들이 계속 쏟아져 나오는데, 도대체 몇 명을 장학금을 준 건지 수천 명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분들이 다 나와서 꼭 간증 같이 얘기를 해요. 자기가 이 선생한테 얼마나 도움을 받았는지, 평생 살면서 이분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애를 썼다는 그런 고백들을 막 해요. 그동안 김장하 선생을 통해서 전국에 수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소문처럼 돌았는데, 이게 실체가 안 드러나고 있었던 거예요. 왜 그랬냐면, 이분이 극도로 자기가 알려지는 걸 싫어해서, 언론에 한 번도 알려진 적이 없었던 분인데, 이분이 이번에 알려지게 됐어요. 이분이 한 말씀 중에 몇 마디가, 말씀도 몇 마디 안 하시는 분의 몇 마디가, 마음에 남았습니다. ”똥은 쌓아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어버리면 거름이 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 돈도 이와 같아서 주변에 나누어야 사회에 꽃이 핀다.“

저는 이 다큐멘터리 보면서 어른은 저런 것이구나!“ 배웠습니다. ”나이는 저렇게 들어가야 되는 것이구나!“ 깨달았습니다. 이 선생의 삶이 복되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그 장학금과 후원금이 복이 아니라 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선생을 아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이었나 싶어서 평생 살면서 어른다운 어른 선생다운 선생을 잘 직접 만나본 적이 없는 저로서는 너무 부럽고 또 아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그분만큼은 아니어도, 이만큼은 아니어도, 누군가에게 복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거기 있어 여러분 옆에 있는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이 복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서 오늘 이 본문의 내용처럼 그들을 위하여 축복의 기도를 드리고, 할 수만 있다면 그 기도의 내용대로 내가 그에게 하는 겁니다. 어둠뿐인 누군가의 삶에 하나님의 그 얼굴빛이 임하는 그 일에 내가 헌신하는 것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고 그 이름으로 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제사장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복을 비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그분이 우리의 복이십니다. 자주 말하지만, 예수 믿어 복 받는 게 아니고, 예수 믿는 게 복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복 받은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누군가의 복이 되어 이 땅에 복이 되어, 힘없고 약한 이들에게 주님의 빛을 비추는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교회 되기를, 우리의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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