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선교비와 구제비로, 얼마나 많은 교인들을 모았는가로 당신의 몸인 교회를 평가하지 않으신다. 주님의 몸인 교회는 평가 자체를 받지 않는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세상의 그 무엇으로 평가할 수 있는가. 평가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것은 비교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누구도 그 사랑을 평가할 수 없다.

그 사랑에 참여한 이들은 오직 자신의 사랑이 부족하다는 사실과 그 부족한 사랑만으로도 이미 기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랑이 주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됨으로써 자랑할 수 없게 된다.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볼 수 있고, 그 사랑을 흠모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랑을 판단할 수는 없다. 그들은 그 사랑으로 이끌리거나 그 사랑을 무모하거나 어리석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 경우에 따라서 그 사랑은 불의해보이기까지 한다. 그래서 그 사랑은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교회가 이 사랑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교회는 이 사랑을 알지 못한다. 그것을 나는 단순히 비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본질의 상실이며 본질을 상실한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공동체에 천착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사랑은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동체 자체는 단순히 필요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먼저 필요조건을 충족해야 충분조건에 이를 수 있고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 있다.

오늘날 교회는 그런 사랑을 목표로 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랑을 말하는 이들을 교회 안에 두지도 못한다. 그들은 서로 싸우고, 상대방의 것을 빼앗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 모습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져야 했던 바로 그 이유이다. 오늘날 교회는 ‘강도들의 소굴’이 되었다.

나는 사실 그다지 사랑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예전에는 더더욱 그랬다. 그런데도 나는 우리 교회 교인 몇몇에게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는 말 대신 십일조를 드리지 말라는 이야기를 해야 했다. 받은 월급 가운데 절반 이상을 집 월세로 내야 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십일조를 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십일조를 내야 믿음이 성장하고, 십일조를 내면 더 많은 돈을 벌게 된다는 말을 나는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집의 보증금이 올라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형편이 나아지면 갚아도 되는 돈이라며 우리가 가진 모든 돈을 그에게 주었다. 이런 내가 믿음이 없는 것인가. 그렇다고 해도 나는 어쩔 수 없다. 돈이 없어 절절매는 교인에게 돈 놓고 돈 먹기 식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라는 이야기를 나는 할 수 없었다.

나는 누구에게 도움을 받기 원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돈 문제에 철저하다. 내게 돈을 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내가 여간해서는 돈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나와 오래 사귄 사람은 이 사실을 알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사람들은 가난한 내가 불안하다. 사람들은 늘 의심의 눈초리를 가지고 나를 바라본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가난의 길을 가는 사람의 숙명이다. 다만 내가 어쩔 수 없이 돈을 받은 경우 나는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내가 받은 돈을 주님이 대신 갚아주실 것을 믿는다.

내가 돈을 받은 경우는 대부분 완전히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내게 연락을 해오고 내게 돈을 보내겠다고 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셨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움직이셨다는 말에 나는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한 분은 돈을 보낸 후에 나그네에게 물 한 그릇을 대접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일들이 내게 아쉬움을 남기는 이유는 이렇게 기껏 돈의 흐름(나는 이것을 더 많은 이들에게서 더 적게 가진 사람에게 흘러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연스런 나눔이라고 생각한다)이 이루어진 후에 그것이 관계로 이어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돈이 흐르는 그리스도인들의 관계를 나누고 싶다. 내가 가난하기 때문에 내가 받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상황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고, 함께 힘을 모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나는 공동체가 없이 나누는 돈의 흐름은 결코 관계로 이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단지 일회적인 사건으로 끝날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동하게 하신 마음을 더럽히지 않을 수 있는 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공동체 없이 흐르는 돈은 결코 관계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것 역시 내겐 감사한 일이다. 그래서 나 역시 돈을 드린 사람을 기억하지 않는다. 다행히 내가 돈을 드리는 분들은 노숙자 선생님들이 폐지 수거하시는 분들로 처음부터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런 돈의 사용은 내게 공동체에 대한 갈증을 더해준다. 나는 내게 돈을 보낸 사람들도, 내가 돈을 드린 분들도 공동체라는 ‘하나님의 불 성곽’ 안에서 만나고 싶다. 그리고 우리의 나눔에 더해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샬롬’을 맛보고 싶다. 성령의 보호하심 속에 있는 공동체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모두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지난 이십여 년 간 가난을 지나오면서 나는 이 말씀을 내 몸으로 확인했다. 나는 걱정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나는 가난 속에서 풍요를 누렸고, 오히려 내가 누리는 풍요를 내가 그대로 누려도 되는 것인지 의심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에게 온전히 하나님께 의탁해보라는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나만 안다는 것은 불의한 일이다. 좋은 것을 발견한 후에 그것을 감추어두고 자신만 누리려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불의한 일일 수밖에 없다. 나는 내가 발견한 것을 다른 사람들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아가 공동체 속에서 그 모든 일들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원한다.

하나님께는 파산도 신용불량자라는 낙인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내 개인의 일이었다는 사실이 나는 아쉽고 불편하다. 그리고 이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좋으신 하나님’을 보고 느끼고 찬양하고 싶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내 삶 동안 나는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그것이 내가 지금도 여전히 공동체를 희구하는 이유이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공동체를 향한 주님의 간절한 마음을 이제 나는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주님의 이 기도가 내 기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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