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 목사님을 만나 저녁 식사를 하고 근처 카페엘 갔다. 아주 작은 카페였고, 나이 드신 여성이 사장이었다.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다.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는 그분에게 모두 들렸다. 그분이 옆 테이블에 차 한 잔을 들고 와 앉아서 책을 읽다 우리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그분의 딸도 우리 딸이 나온 대학을 나왔다. 나와 대화를 나누던 목사님의 아내와 그 여사장님과 내게 공통점이 등장한 것이다. 그렇게 얼마 동안 그분과 대화가 이어졌다. 카페에 책들이 많이 있었는데 꽂혀있는 책들은 그분과 그분의 딸이 본 책들이라고 했다. 그분은 자유로워 보였다. 그분은 행복하기만 하다면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상황에 처해도 괜찮다는 말을 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가게를 여덟시에 닫는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그곳을 나왔다. 그렇게 우리가 나와 주는 것이 그분의 행복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나 역시 행복을 위해 살고 있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행복은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람들이 다른 것은 행복을 느끼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것은 그것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행복을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우리말로 ‘복이 있다’로 번역된 말은 ‘행복하여라’로 번역되는 것이 더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행복을 선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그것은 곧 예수의 제자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하다.

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이 인생을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은 내 지난 이십여 년의 삶으로 실증적인 내 경험이 되었다. 실증적(verifiable)이라는 단어는 매우 중요한 단어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에게 “와서 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실증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그렇게 와서 당신과 동행하며 그것을 보라고 말씀하신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 사라진 것이 바로 이 단어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실증적이지 않고 피상적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교리중심적인 형식적인 종교 행위가 되고 말았다. 아무리 그리스도인들이 열심히 교회에 가서 예배(미사)를 드리고 기도를 열심히 해도 세상 사람들은 그런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매료되지 않는다.

삶의 행복이란 본능이나 욕구의 충족과 관련된 것이거나, '보람'과 관련된 것이거나, 존재 자체로부터 오는 느낌이다. 이런 행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행복을 돈과 연관 지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나는 이것이 강렬한 대조라고 생각한다. 돈과 사랑이 그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둘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지 않는다. 돈이 있어야 사랑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국민들을 노예 상태로 만들어 복종시키기 위해서 기관총이나 네이팜탄, 탱크 따위는 필요 없다. 부채가 그 모든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기 때문이다"(장 지글러, <<탐욕의 시대>>, 갈라파고스, p.79-80

장 지글러가 하고 있는 말이 우리 시대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이 주인이 된 세상에서 돈이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돈을 마구 찍어내고 있는 미국은 부채를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부채를 무한정 만들어냄으로써 미국은 국민들을 노예상태로 만들었다. 그것이 성공으로 보이지만 미국이라는 국가 역시 돈의 노예가 되었다. 다만 그들은 그것을 볼 수 없을 뿐이다.

우리나라 역시 다르지 않다. 국가부채라는 말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국민들은 대부분 그 부채의 일부를 나누어 가짐으로써 기꺼이 노예상태를 받아드린다.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말이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이다. 그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부채를 생각하라. 자신의 부채가 하나도 없는 경우도, 이미 국가부채라는 사슬에 묶여 있다는 현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모라토리엄 상태가 되면 부채가 하나도 없는 사람도 부채를 가진 사람과 똑같이 어려움 속으로 던져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우리는 돈의 노예가 되어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다. 끊임없이 경쟁하고, 끊임없이 돈을 벌지만 돈은 부채와 더불어 끊임없이 불만족을 생산해낸다. 사람들은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확행’을 주장하기도 하고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행복을 추구해보지만 그러나 행복은 근본적으로 자유인이 되지 않고는 누릴 수 없는 ‘파랑새’와 같은 것이다.

역설적으로 파산한 나는 오래도록 신용불량자로 살면서 돈의 노예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돈을 벌 수 없고, 돈이 없어 가난한 삶을 살면서 자연스럽게 돈이 주는 행복과 멀어진 것이다. 그렇다. 나는 돈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고, 급기야 돈이 없어야 행복할 수 있다는 역설에 도달하게 되었다. 나는 가난을 통해 비로소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산상수훈을 통해 선포되는 행복이 단순한 역설이 아니라 진정한 행복임을 깨닫게 되었다.

돈의 노예가 된 사람들은 '행복을 위해서'라고 외치며 질주를 계속한다. 하지만 삶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주변 세계와 친밀하게 접촉할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든다. 외로움은 깊어가고, 숨은 가빠지고, 행복은 분주함의 파도에 떠밀려 점점 더 멀어져간다. 그리고 사람들은 행복이 ‘파랑새’라고 말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행복을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으로 만든다.

나는 돈이 행복과 관계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돈의 순기능이 있다. 그러나 돈의 노예 상태가 되지 않으려면 돈을 미워해야 한다. 돈을 업신여길 수 있어야 한다. 성서는 돈을 미워하고 업신여기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돈을 미워하고 업신여기는 것은 동전의 양면이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사람들의 생각과 반대로 기쁜 마음으로 돈의 노예가 된 후 그것을 신앙으로 착각하게 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참으로 장엄한 선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말씀에 담겨 있는 참된 행복을 보지 못한다. 돈의 노예가 된 사람은 이 사실을 받아드릴 수 없다. 죽은 후 천국 간다는 말이 얼마나 허황된 바람인가를 깨달을 수 없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이미 이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고 예수님처럼 '몸소 하나님 나라'가 된다. 그런 사람들은 “복의 근원”이 되어 본인뿐만 아니라 함께 하는 주변 사람들까지 행복하게 만든다. 복음이 말 그래도 복음이 된다.

하지만 부유함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말하는 세상에서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드리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복음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세상 속에 존재하는 한, 우리가 예수의 제자가 되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어도 복음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여기서 데리의 말, “종교란 불가능성에의 열정이다.”라는 말은 빛을 발한다.

나는 바로 이 불가능한 예수의 행복에 도전한다. 내가 아무리 가난의 유익에 대해 이야기하고, 마음까지 가난해지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다고 이야기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하지만 내가 끊임없이 가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불가능성에 도전하는 열정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생각해보니 그런 내가 참 소중하다. 그것은 내가 복음의 실증적인 증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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