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고, 장차 자기 몫으로 받을 땅을 향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했지만, 떠난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는, 약속하신 땅에서 타국에 몸 붙여 사는 나그네처럼 거류하였으며, 같은 약속을 함께 물려받을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도시를 바랐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1:8-10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다. 믿음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전환이자 참 신앙으로의 회복을나타내는 단어다.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성경에서 가장 처음 믿음을 언급한 구절은 창세기 15장이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의는 올바른 상태를 뜻한다. 믿음 있는 인간을 올바른 인간, 곧 의인이라고 성경은 수천 년의 간격을 두고서 일관되이 가르친다. 오늘날, 믿음이라는 단어는 혼탁해졌다. 단어의 의미를 파악할 때는 그 단어가 발생한 정황을 살펴봄으로써 그 단어의 뉘앙스와 개념을 알아차려야 한다. 동일한 단어라고 해서 동일한 개념을 가진 것은 아니다. ‘의사가 칼을 들었다.’ ‘살인자가 칼을 들었다.’ 칼은 문장 구조 속에서 변함없지만 정황이 달라짐에 따라서 칼의 본질이 달라진다. 이처럼 믿음이라는 단어가 혼탁해진 탓은 믿음을 말하고 사용하는 수많은 기독교인의 드러나는 삶의 정황 때문이다. 믿음은 무지성과 뻔뻔함의 대체어가 되었다. 그렇다면 믿음의 참뜻은 무엇인가. 아브라함의 정황을 살펴보는 것이 가장 적확하다.

어느 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살아 있는 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한다. 아브라함은 그 요구에 응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바쳤”다고 기록한다(히 11:17). 아브라함이 말도 안 되는 일을 실행할 수 있었던 동기는 믿음이었다. 아브라함이 믿음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두 가지의 딜레마가 있었는데, 먼저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아들에 관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고대 주변 국가의 신들처럼 인신제사를 받는 신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들 이삭은 하나님이 체결하신 언약의 주인공이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믿음을 선택하는 일은 기존의 질서와 체계의 붕괴였다. 끝내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을 바쳤다. 그 믿음은 과연 무엇이길래, 이토록 불연속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무모할 수 있을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거라고 생각했다(히 11:17). 아브라함은 무리하게 앞을 내다보았다.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그 신뢰는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왔다. 우르, 이집트,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가족과 동행해 온 하나님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삭을 통해 민족을 이루겠다는 그분의 언약 사건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믿음을 가진 인간이 되길 기대한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딜레마를 연출했다. 아브라함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에 관한 이해를 축적했고 그 이해들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다. 그리고 자신의 세계 안에서 일상을 만들었고 연속적이고 자연스러운 미래를 내다보았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형성한 안정적 질서 안에서 하나님이 머물고 활동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따금 인간은 금송아지라는 질서를 만들고 그것을 우리를 구원한 하나님이라고 칭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작위적으로 만든 질서에 속박당하지 않는 분이다. 비록 하나님은 인간과 소통하며 세계와 관계하지만, 그렇다고 세계에 발이 묶이거나, 어떠한 질서 아래에 놓이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을 사로잡을 수 있는 피조물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불편하고 지극히 낯선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쳐라”(창 22:2).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받아들인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라기보다는 하나님 자체에 대한 순종이다. 그분의 말씀이 이해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존재를 신뢰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순종이다.

그러니까 기독교를 믿음의 종교라고 했을 때,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신뢰’다. 인간은 각자가 처한 현실 상황에 따라서 하나님을 이렇게도 말하고 저렇게도 말한다. 믿음이 흔들린다는 건 하나님에 대한 불안과 의심을 느끼는 것인데,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며 불안과 의심을 느끼는 상태와 흡사하다. 나의 현실로 상대방의 현실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불신은 망상을 낳고, 망상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소외를 발생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불신이 자신을 이웃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소외시키듯, 하나님에 대한 불신은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소외시킨다. 죄를 진 아담이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었던 것처럼.

근원적 신뢰, 곧 믿음은 현실에 기반하지 않는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믿음의 기반은 나도 아니고 여기도 아니다. 나의 현실에 기반한 믿음은 모래 위에 지어진 집과 같아서 곧잘 무너지기 마련이다. 믿음의 기반은 자비롭고 사랑이 충만하신 하나님의 존재에 있다. 믿음은 여기서 눈에 보이는 조각들로 퍼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저기에 완성된 그림을 이곳으로 끌어당겨오는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히 11:1). 현실 너머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숱하게 흔들리고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를 숨쉬게 하고 살게 하며 나아가게 한다. 그래서 믿음 없는 자들은 믿음 있는 자들을 줄곧 무모한 사람들로 여긴다. 이미 놓인 재료들을 가지고 삶을 살지 않고 아직 보이지 않는, 아직 만져 본 적 없는 재료들을 가지고 삶을 사는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보일 리 만무하다. 믿음의 행위는 합리적이지 않고 정당하지 않고 증명할 수 없는 부조리한 선택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의 기반을 결코 이곳에서는 찾을 수 없다. 키르케고르는 말했다.

“하나님이 절벽 아래에 있는지 없는지 확신할 수 없다 해도 우리는 그분의 품으로 믿음의 도약을 해야 한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키르케고르의 문장이 믿음의 본질을 잘 보여 준다. 믿음은 이곳 너머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근원적 신뢰다.

 정확히 일 년 전, 또 한 번의 참사가 한국 사회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청년들이 좁은 골목에서 압사당했다. 숨이 안 쉬어진다고 소리치던 울부짖음들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무한 경쟁 사회로 내던져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팬데믹으로 인해 모든 경제, 문화 활동이 봉쇄되었다. 지난한 3년 동안 청년들은 자본주의가 들려주는 막연한 신화들에서 큰 상흔을 입었다. 주식, 비트코인, 부동산 갭투자. 삶이 나아질 것이라고, 삶이 나아진 사람이 있다고 하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가열하게 들렸다. 하지만 바람처럼 떠도는 소문은 무성했지만 실체는 없었다. 역병의 종결이 공식적으로 선언되고 숨 한번 제대로 쉬고 싶어 바깥으로 나섰을 뿐인데 수많은 젊은이가 숨을 쉬지 못해 세상을 떠났다. 아무도 이런 사태가 발생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근래 들어 우리가 그 무엇도 믿을 수 없는 가혹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사무치게 경험하고 있다. 가까운 곳에서, 그리고 먼 곳에서. 의심 없이 그저 믿고 살아 온 거대한 빙산이 서서히 조각나고 있음을 본다.

올해 초 인천의 어느 30대 남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팬데믹을 극복하며 차곡차곡 모은 전세 보증금 칠천만 원을 임대사업자에게 사기를 당한 것이다. 남성의 휴대폰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전세 사기 관련 대책이 실망스럽고, 더는 버티기 힘들다.” 혹자는 고작 칠천만 원 때문에 삶을 정리한 것이 안타깝다고 말하지만, 그 청년이 잃은 건 단순히 돈이 아니라 희망이었다. 그가 홀로 느꼈을 이 사회에 대한 아득한 공포감을 조심스럽게 가늠해 본다. 그는 누구도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물론 호소할 대상도 없었을 테다. 고개를 돌려 넓은 세상을 바라보아도 마찬가지다. 세계는 전쟁 중이다.

나는 자라면서 적어도 인간이 이성적이며 도덕적이라고 믿어 왔다. 더 나은 존재로 진화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흔들리고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유튜브 라이브를 통해 실시간 전쟁 영상을 관전할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이토록 노골적이고 잔혹한 시대가 또 있었을까. 역사가 흐르면서 흔적이 생기고 그것을 발판 삼을 뿐이지 인간 자체가 나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 그 어느 의로운 사람일지라도 그는 인류 전체를 책임질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또 다른 백지 상태의 인간이 태어나서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무엇도 자연스럽게 믿을 수가 없는 노릇이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한국 사회에 대한 믿음을 말할 수 없고, 세계에 대한 믿음 또한 말할 수 없다.

한 세기 전, 지금 우리의 감정과 처지를 매우 닮은 채로 강단에 올라선 설교자가 있다. 디트리히 본회퍼다. 그는 1932년 2월 21일, 국민애도일 저녁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다. “교우 여러분, 자신의 믿음이 파괴되었음을 분명히 느끼는 것이야말로 이미 참된 믿음에 속합니다.” 결코 극단적 표현이 아니다. 우리의 믿음 또한 기반을 상실한 채 흔들리고 있고 이미 파괴되고 있다. 믿음을 상실한 개인과 사회는 서서히 서로를 밀어낼 것이며 적극성을 포기한 채 밀실로 후퇴할 것이다. 믿음을 도무지 말할 수 없는 시대에서 그리스도인은, 교회는 세상 속에서 무엇을 드러내야 하는가. 아브라함이 얻게 된 그 믿음이 우리를 살게 할 것이다.

현실 너머에서 올곧게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그것이 바로 흔들릴 수 없는 믿음이다. 현실 질서 너머에서 일하고 계신 평화의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끌어 가실 것이라는 믿음은 우리 삶에 깃든 불안과 의심의 악령들을 거두어 낼 것이다. 모두가 믿지 못할 때, 심지어 믿을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그 파괴된 믿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참되게 믿어야만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이웃들의 삶에 깃든 불안과 의심의 악령까지도 내쫓는 복의 통로가 될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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