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무라 간조 관동 대지진때 자경단으로 활동

#우치무라 간조 관동 대지진때 자경단으로 활동#

한국 교회에서 과대평가 받고 있는 일본주의자 우치무라 간조, 그를 비판하는 글에는 그래도 훌륭하지 않냐는 댓글들이 많이 달린다. 한국교회의 현주소에 비추어서 과거의 그를 소환하는 것인데 이제 그만 그를 놓아 때다. 본보에서 일본에서 열린 관동대지진 100주년 학회에서 우치무라 간조가 조선인 학살에 대해 침묵했다는 발표가 있었다고 보도했는데 때 맞추어 그가 관동대지진 학살을 자행하던 자경단 활동을 했다는 논문 발표가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은 우치무라 간조가 남긴 일기를 통해 알려졌으며 직접 학살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자경단 활동의 핵심인 야간 순찰(야경·夜警)에 적극 참여하면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등의 유언비어도 믿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홍이표 일본 야마나시에이와대 교수가 지난 9월 2일 새문안 교회에서 열린 한국기독교 역사학회에서 발표한 논문 중에서).

우치무라 간조, 가가와 도요히코가 한국 교회에서 인기가 높은 이유는 서구 신학이 한국 일본 등에 자리잡을 때 그것을 아시아적 가치로 소화해낸 최초의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그들이 필요했던 것이라면 이제 가타야먀 센(片山潛)에 눈을 돌려보는 것은 어떨까?

 

앞 줄 일본인이 가타야마 센이고 그 오른 쪽이 플레하노프다. 1904년 제 2인터내셔날 대회, 암스테르담
앞 줄 일본인이 가타야마 센이고 그 오른 쪽이 플레하노프다. 1904년 제 2인터내셔널 6차 대회, 암스테르담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여운형은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여 김규식, 김단야와 함께 대회운영 의장단에 뽑혀 개회식에서 연설했다. 이때 여운형은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났는데 일본 공산주의운동의 지도자 가타야마 센도 만났다.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이지만 여운형이 만났다는 사실이 기록에 남을 정도로 유명한 가타야마 센은 누구인가? 그는 1904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2 인터내셔널(국제 사회당) 6 대회의 부의장을 맡았다. 관례대로 의장은 주최국인 네덜란드의 콜이 맡았지만 실무진인 부의장에는 러시아의 플레하노프와 가타야마센이 맡았다. 플레하노프가 지주 출신이면서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라면 가타야마 센은 기독교 박애주의자라는 점에서 사람의 이력이 눈길을 끌었다. 박노자는 가타야마 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다.

가타야마는 플레하노프와는 완전히 판이한 길을 걸어온 일본 사회주의운동의 1세대 대표자이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과 미국에서 고학한 가타야마는 이상주의적인 박애주의적 기독교 신앙을 출발점으로 삼고, 엥겔스로부터 ‘마르크스주의의 최고 이론가’라는 찬사를 얻은 플레하노프와는 달리 이론보다 고통과 투쟁의 현장에서 조직·계몽 활동을 했다.

혁명을 위해서는 폭력도 불가피하다는 이론을 갖고 있었던 플레하노프와 달리 가타야마는 1901년에 조직한 일본 사회민주당의 목표로 ‘당장의 감군과 궁극적 군대 해산’을 내세울 정도로 철저한 비폭력주의자였다. 그의 사상은 사무라이를 칭송하던 우치무라 간조와도 다르고 태평양 전쟁을 지지하던 가가와 도요히코와도 달랐다.

 

또한 한국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에 씻을 없는 상처를 주었던 1921 6월의 자유시 참변 이후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서로에게 책임을 묻고 있을 상해파의 장도정(1920년 무렵 러시아 공산당 치타 극동국 한인부 위원)은 참변의 책임이 이르구츠크파에 있었음을 알리는 손편지를 코민테른 집행위원에게 보냈다. 그 수신인이 가타야마였다. 자유시 참변의 직접적 원인이 일본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독립운동과 관계있던 공산당 조직의 싸움을 두고 보낸 편지가 일본사람 가타야마를 향했다. 그만큼 한국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의 신뢰를 받던 인물이 가타야마였다. 이 점도 조선 독립에 무관심했던 우치무라 간조와 가가와 도요히코와 다르다.

가타야마 1859 하테키에서 태어났다. 인쇄소 활판공으로 일하면서 공부하다가 1892년부터 1894년사이에 미국 앤도버신학교, 예일대학교 신학부에서 공부하던 중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읽고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1896년 일본으로 돌아와 노동세계(로도세카이,勞動世界) 발간했고 1912 도쿄 철도노동자 파업을 지도하다 체포되어 미국으로 망명했다. 1901 사회민주당을 창설하며 내건이상강령'에서 '만국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먼저 군비를 전폐할 ' 주요 과제로 제기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행동강령'에서 "전쟁은 원래 야만의 유풍이어서 명백히 문명주의와 반대되는 "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군비철폐·전쟁 폐지를 호소한 최초의 정당 강령으로 알려져 있다.

1917 볼셰비키 혁명을 지지한 1920 코민테른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2년에는 일본 공산당을 창당하고 미국 공산당 창립에도 이름을 얹었다. 가타야마는 1933 소련 모스크바에서 사망한 그의 장례식은 소련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붉은 광장에 안장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지식인들이 대동아 공영권을 주장하며 서구와 맞서려고 다시말해 일본 고유의 계몽주의와 근대화를 고민하고 있을 가타야마도 다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기뻐했었다. 그는 중국(청나라)으로부터 조선이 독립하는 '조선문제(그가 직접 쓴 용어)'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일본의 계몽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영향을 받은 조선의 개화파들이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독립문으로 고쳐 부른 것도 구한말 독립은 일본으로부터 독립이 아니라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의미했다. 가타야마도 중국 제국을 무너뜨리고 조선을 독립시키는 것을 근대적 가치로 알았다. 그는 은둔의 왕국(Hermit Kingdom)’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정도로 조선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그러나 청일 전쟁 승리의 기쁨도 잠시 그는 전쟁이 가져온 비극을 목도하면서 평화주의자로 변신하고 이후 반전 평화주의자로 방향을 바꾼다.  그밖에 협동조합운동, 공동거주지 확보 운동 등을 통해 실질적인 사회 운동을 이끌었다. 이 변신에는 기독교 신앙이 큰 몫을 했다. 

조선독립운동시기에도 사회주의와 기독교의 공존을 주장하던 인물들이 많이 있었다. 조선 최초의 공산주의자로 알려진 알렉산드라는 극동인민위원회의 외교관이자 러시아 볼셰비키의 극동 방면 지도자 명이었다. 그의 남편은 러시아 정교회 사제였다. 김알렉산드라로부터 도움을 받아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에 뛰어든 상해파 고려공산당 창설 주역 이동휘 '전도사'도 있다. 박헌영은 승동교회 출신이고 여운형은 평양신학교 출신이다. 하와이 이민 1세대 목회를 하던 현순 목사도 있다.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마저 공산주의 전체 주의 세력으로 매도되는 시국에 진보적 기독교인이라면 우치무라, 가가와와 결별하고 가타야마 센에게 눈을 볼려 봄이 어떤가?

<가타야마 센의 삶에 대한 부분은 Hyman Kublin “Asian Revolutionary- The Life of Sen Katayama"(프린스턴 대학 출판부, 1964) 참고했습니다>

저작권자 © 미주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