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 대지진 100년, 일본 교회는 ‘반일(反日)'을 걱정한다

관동 대지진 100, 일본 교회는 ‘반일(反日)' 걱정한다#

# 반일은 불령선인의 또 다른 말#

도쿄를 동서남북에서 둘러싸듯 있는 관동(표기법상 간토가 맞지만 글에서는 관동으로 통일한다)지방에 진도 7.9 지진이 발생한 것은 1923 9 1일(토) 오전 11 58. 지진으로 10만명 이상이 사망 실종됐다.  조선인 피해자는 6천명이 넘는데 지진으로 인한 사망도 있지만 일본 자경단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이 많았다.

참으로 빨랐다. 같은 오후 3시부터 조선인이 방화하고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가 돌았고 그날 밤부터 조선인에 대한 학살이 시작되었다. 다음 오전 5시에 시체더미를 봤다는 목격증언이 남아 있다. 지진의 폐허에서 정상적인 치안이 확보되지 않자 스스로를 지키겠다는 자경단이 곳곳에 생겨났다. 그들은 조선 사람을 구분하다며 15 50(주고엔 고짓센) 말해 보게 했다. 조선인들에게 발음이 어렵기 때문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이유였다.  '발음 검증과정'에서 학살당한 일본인들도 많았다.

자경단들은 조선인을 향한 일본인들의 호명인 불령선인(不逞鮮人) 일본 통치에 한을 품고 소요를 일으키는 사람을 찾아 학살을 감행했다. 초기에는 자경단을 피해 경찰서로 피신하기도 했지만 자경단의 위세에 조선인을 내어 주는 경우도 흔했다. 

9 3일에 혐의가 없는 조선인은 보호하고 수상한 조선인은 알아서 처리하라는 지시가 경찰과 헌병에게 내려 왔다. 본래 지진은 조선인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혐의’를 묻는 자체가 모순이었다. 같은 날에는 중국인들이 군인들에 의해 300 이상 학살당했다. 4일에는 나라시노 수용소에 조선인을 수용하기로 결정했으나 일본 공권력을 신뢰하지 못하는 조선인들은 섣불리 수용소를 향하지 못했다. 오히려 이날부터 대량 학살이 일어난 것도 같은 이유에서 였다. 조선인 학살이 시작된지 5일이 지나서야 내각에서 조선인에 대한 폭행을 금지하라는 발표를 했지만 자경단의 폭력을 막지는 못했다. 7(금요일) 긴급칙령이 내려지고서야 수습국면에 들어갔다. 이미 6,000여명 이상의 조선인이 학살당한 뒤였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모든 일본인들이 광분한 자경단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경단을 꾸린 동네에 다른 마을 자경단이 처들어와 조선인을 내어 놓으라고 했을 조선인을 지킨 자경단도 있었다.

마루야마에는 지진 2 전부터 명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 . 일본 이름은 '후쿠다' '기노시타' 사람은 모두 키가 편이었지만 후쿠다는 듬직한 체격이고 기노시타는 날씬했다. 호쿠소 철도 건설공사 들어왔지만 사가 끝난 후에도 마루야마에 있는 당집을 빌려 살고 있었다. 사람은 마을 사람들과 친근하게 지냈다. 주민인 무토 요시 둥근 얼굴의 후쿠다가 매일 자신의 집에 와서 오랫동안 수다를 떨다가 가곤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마루야마에서 죽는 자를 만들지 말자." " 사람은 들한테 넘기지 않겠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고 단결시 것은 도쿠다 야스조이다. 당시 40 전후였던 도쿠다 야스조는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이장에게까지 호통을 정도로 정의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가토 나오키 지음 “구월, 도쿄의 거리에서’)

사례 말고도 ‘구월, 도쿄의 거리에서’에는 평범한( 정신을 가진) 일본인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러면 당시 일본 교회는 무엇을 했을까?

지난 8 17 일본에서는 2023 신쥬하기 선교 강좌(信州夏期宣講座) 열렸다. 이날의 주제는 1923 ‘관동대지진 당시 교회는’ 이었다발표에서는 불령선인이라는 호칭이 결국 '일본은 조선에 대해 정당한 일을 하고 있는데 폭동을 일으키느냐' 조선인에 대한 몰이해와 경멸의 의식이 담겨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편견 때문에 조선인에게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라는 마음에서 학살을 자행했다는 것이다.

이날 강좌에는 일본 교회의 태도에 대한 반성이 있었다. 당시 일본의 대표적인 교회 지도자인 우에무라 마사히사(植村正久) 우치무라 간조(村鑑三) 침묵으로 일관했다고 지적했다. 개별 교회가 조선인들을 숨겨주거나 학살을 막핬다는 기록은 있으나 교회조직으로서의 발언은 없었다는 것이다. 우에무라 마사히사는 메이지 대학 신학부 교수로 무교회주의자인 우치무라와 달리 개혁주의 신학자였기 때문에 일본 기독교 안에서는 우치무라보다 유명한 인물이었다.

이날 학술회의에서 언급된 인물은 아니지만 가가와 토요히코도 침묵하기는 마찬가지 였다토요히코가 관동 대지진의 소식을 들은 것은 9 3일, 그는 도쿄 YMCA강당에서 회의를 소집해 활발한 구호활동을 논의했다. 이미 1921년부터 ‘예수의 친구회’라는 조직을 시작한 터라 체계적인 구호활동을 벌일 있었다.

야마자키 하코네( ハコネ) 논문관동 대지진 구호 운동에서의 가가와 토요히코와 본소기독교산업청년회의 성립 과정에 관한 고찰(東大震災救護運動における 賀川豊彦と本所基督産業の成立過程にする一考察)' 따르면 가가와는 13일과 14 도쿄 YMCA에서 교회와 교파를 초월한 '기독기독교 지진 구호단'을 결성했다. 이것이 나중에 기독교 산업청년회의 모태가 된다. 구호활동을 하기 위해 조직과 강령 등을 매우 세세하기 준비했지만 논문 어디에도 토요히코가 조선인 학살을 언급했다는 이야기가 없다.

명성과 달리 가가와 토요히코는 일본의 천민계층인 부라쿠민들을 멸시했다. 일본 빈민 대부분은 부라쿠 출신인데, 이들이 가난한 이유는 유전적인 요인이 강하다는 것이다. . 히틀러가 선호하던 사회 진화론적인 주장이다. 때문에 부라쿠민들은 순수 일본인이 아니라, 중국인, 한국인, 니그로 흑인의 피를 가진 열등하고 오염된 인종들의 후손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나아가서 그는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본의 침략전쟁을 옹호한다.

우치무라 간조, 가가와 토요히코 사람은 분명 시대를 풍미한 사상가였음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의 뚜렷한 한계를 두사람이 과대 평가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교회의 비논리적인 성격 때문에 우치무라와 김교신으로 이어지는 무교회 운동은 분명 신선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한국의 제도 교회 내에서도 얼마든지 이상의 일을 해내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처럼 기독교 서적이 많지 않던 시절 가가와 토요히코의 ‘사선을 넘어서’는 바른 신앙을 고민하는 기독청년의 필독서였다. 그의 공헌은 그까지다. 우리에게는 문익환도 있고, 서남동도 있고, 안병무도 있는데 일제하의 두사람이 이른바 개혁적인 기독교인들에게 자꾸 소환되는 이유를 모르겠다. 일제 강점기에 버티고 버티다가 신사참배를 한국교회 목사들은 야박할 정도로 비판하면서 명의 일본 사람에 대해서는 평가가 후한 것도 기이하다. 어릴 가본 일본은 깨끗하고 아름다웠다는 윤석열의 기억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은 아닐까?

다시 관동대지진과 일본교회 이야기 돌아가면 일본의 기독교 인사들이 걱정하는 것은 반일(反日)이다. 우리에게는 단순히 일본에 반대한다는 말이지만 일본사람들은 불령선인과 같은 의미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신쥬 하기선교 강좌’의 강사 호시데 목사(일본 장로교단) (지금의 한일관계가) “당시 뿌려진 휘발유에 언제 불이 붙을지 모르는 상태”라고 우려했다. 오늘날 자주 듣는 '반일'이라는 단어가 당시 '불령선인'만큼은 아니더라도 '일본에 적개심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고, 그것이 일반인들에게도 퍼져나가고 있다고 경종을 울렸다.

도쿄에 있는 오오이(大井) 침례교회 홈페이지의 목회서신에서는 관동대지진을 다루면서 이렇게 언급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가? 인터넷과 헤이트 스피치에 넘쳐나는 '반일'이라는 단어는 식민지 지배를 돌아보지 않고 '일본에 적개심을 가진 자들'이라는 느낌으로 사용되어 편견과 두려움을 퍼뜨리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성경에서 무엇을 '복음'으로 듣고 있는 것일까?

일본에 거주하면 재일(在日)미국인, 재일 프랑스인이 되지만 그냥 '재일(자이니치)'하면 한국인을 경멸하는 말로 쓰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반일은 불령선인의 의미로 일본인들이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일본의 양심적인 기독교인들의 가장 큰 고민이다. 

과거를 청산하고 한일관계가 개선되는데 반대하는 양쪽 나라 국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 지금 한일 관계 회복을 막고 있는가? 윤석열은 미래로 함게 나갈 파트너라고 일본을 지칭했지만 그의 행보는 파트너가 아니라 '상하'에 가깝다. 기시다는 ‘하’인 윤석열의 재임 동안에 동해 호칭 문제, 독도 문제 모든 것을 일본에 유리하게 가져 가려고 한다. 사람이 권좌에 있는 결코 한일관계는 개선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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