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굥이 대통령이 된 후에 그에 대한 글을 쓰지 않았다. 그를 대통령으로 뽑은 것이 국민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말이 통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것을 공자의 일화에서 배웠다.

공자가 제자들과 시장의 번잡한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한 남자가 시장 구석에서 소변을 보았다. 공자는 그 사람을 불러 꾸짖었다.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에서 변을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계속 시장거리를 지나고 있는 중, 이번에는 한 사람이 길 한 가운데를 소변을 보면서 걷고 있었다. 제자들은 그 사람이 공자로부터 야단을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자는 말없이 그 사람을 지나쳤다. 제자들은 왜 이 사람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느냐고 물었다. 공자는 담담하게 “저런 사람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대답했다.

내가 굥에 대해 글을 쓰지 않았던 이유도 공자의 경우와 같다. 그러나 이번 광복절 경축사를 듣고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아연실색이란 말밖에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거들먹거리며 광복절 경축사를 말하고 있는 그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독립운동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건국운동이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그에게서 이미 여러 하고 싶은 말이 생각났다. 그런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은 “그러면 독도는 일본 땅인가?”였다. 만약 정말 독립운동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가 위한 건국운동이었다면 사라진 조선을 소유했던 일본이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대한제국도 독립운동도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이 목표였다. 자주국가로 세계의 인정을 받으려는 노력이었다.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라는 독립선언서의 기개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그러나 이보다 더한 문제는 현실과 관련된 그의 사고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전체주의가 대결하는 분단의 현실에서 이러한 반국가세력들의 준동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전체주의 세력은 자유사회가 보장하는 법적 권리를 충분히 활용해 자유사회를 교란시키고 공격해 왔습니다. 이것이 전체주의 세력의 생존 방식입니다.”

이게 도대체 오늘의 한국을 사는 국민이 할 수 있는 말인가? 정말 사돈 남 말을 하고 있다. 대통령이 된 이후의 그의 행보를 보면 그의 모든 행동이나 통치방식이야말로 법과 정의를 내세운 전체주의 방식이었다. 자유를 내세우면서도 그는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는 다만 한국의 트럼프가 되어 국민들을 나누고 극우주의자들을 자극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고 있다.

그는 극우주의자들을 끌어 모아 세계 역사에서 유일무이하게 후진국에서 선진국이 된 한국을 단번에 무너뜨렸고, 거기에 머물지 않고 잔해마저 산산조각을 내고 있다. 그런 결과들이 여러 곳에서 드러나고 있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모든 것이 전 정부의 잘못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대형교회의 목사들이 자신들을 반대하는 모든 세력들을 사탄의 자식이라고 매도하는 것과 똑같이 자신을 반대하는 모든 세력들을 주사파 공산주의로 몰아간다. 설사 그렇다 한들 그것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꼭 언급해야 할 내용인가.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공산전체주의 세력은 늘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 왔습니다.”

정말 기가 막히는 언사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분의 밑에서 그가 뱉은 말들을 주워 모으고 정당화하느라 여념이 없는 여당의 국회의원들이 정말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들의 말을 듣기 전의 그들의 얼굴과 표정이 생각난다. 어떻게 사람이 그런 말들을 하고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가.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끈 떨어진 갓 신세가 된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 이런 그들의 모습에서 북한의 고위관리들이 오버 랩 된다. 그들이 비난하는 전체주의자들의 모습이 바로 자신들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자신들만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런 그를 탄핵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탄핵을 주도했던 굥이 절대로 탄핵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또 깊이 생각해보면 탄핵은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시대에 정말 필요한 것은 허언이 아닌 화합이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엠마뉴엘 레비나스다.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타자라는 주체를 형성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이론을 편다. 언어라고 하는 그물망 속에 그 타자가 나에게 들어와 있고 내가 무언가를 갖고 싶어 욕망하는 것은 내 안의 타자들이 욕망하는 것이라는 게 라캉의 타자욕망이다. 이와 달리 레비나스의 타자욕망은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의 타자가 아니라 나의 의식 바깥에 있는 내가 마주하는 사람들이 바로 타자라는 것이다. 라캉의 타자는 무의식속에 있고, 레비나스의 타자는 주체 바깥에 있다.

레비나스에게 타자의 얼굴은 신의 얼굴이 비춰진 것이다. 내 옆의 타자가 바로 신의 출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타자가 곧 신이라는 것은 아니다. 신의 빛, 말씀이 타인의 얼굴을 통해 나에게 제시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오는 획일화된 계시가 아니다. 레비나스의 윤리학이 현대 윤리학에 새로운 전환을 주고 있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인간으로서 해야 할 보편적인 명령이 아니라 내가 타인의 얼굴을 한 사람 한 사람 맞이하면서 윤리의 원천을 새롭게 배운다는 것이다. 그는 타인의 얼굴이 윤리의 기원이라고 얘기한다.

그렇다. 타인을 어떻게 보느냐가 우리 시대의 관건이다. 나는 폭력은 폭력을 제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정신은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에 관한 이해이자 그의 ‘타자윤리학’이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타자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 사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피조세계의 구원을 담당해야 할 하나님의 자녀들의 의무이자 사명이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과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을 연관시킨다.

타자의 얼굴을 보고 신의 빛을 보지 못하는 자들은 타자들의 편을 갈라 자기편이 된 타자들을 지배하거나 지배가 불가능할 때 죽이거나 제거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전체주의의 진면목이다. 전체주의는 타자를 아랑곳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제거하고 말살한다. 잘 생각해보라. 굥과 굥의 방식을 추종하는 이들이야말로 타자를 아랑곳하지 않는 전체주의자들이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윤리적 주체란 타자의 다름을 받아들이고, 타자 중심적으로 사유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최고의 덕목은 선이다. 선이란 타자에게 나쁜 것을 하지 않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만 생각하고, 나의 욕심에 따라 나 밖의 것을 내 것으로 자기화하지 말고, 타자에로의 초월로 타자가 보내는 호소에 응답하는 것이 선이다(은률). 나쁜 사람은 나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굥은 스스로 나쁜 사람이 되었으면서도 그것을 반성하지 않고, 다른 모든 사람들을 나쁜 사람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트럼프가 한 일이고 그는 그것을 답습하고 있다. 최근 들어 무차별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묻지마 범죄를 포함한 각종 사건들은 우리 사회가 자유를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타자를 아랑곳하지 않는 전체주의를 치닫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전 정부의 탓이 아니라 현 정부의 탓이다.

레비나스 철학이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남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받아드리고 행동으로 나서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그런 긍휼을 환대의 기반으로 보았다. 긍휼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넘어져 피 흘리고 있는 타자의 얼굴을 통해서 우리를 자극한다. 전체주의의 가면을 벗고 타자의 고통에 반응하라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궁극적인 원수사랑과 동일하다고 믿는다.

이런 말을 하는 나 역시 답답하다. 그러나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다. 멀더라도 우리가 가야할 길이다. 그래야 굥으로 인해 무너진 나라도 다시 세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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