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몰랐던 때가 있다. 누군가를 애착하게 되면 나는 어김없이 당황하고 불안했다. 나의 마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가 외부에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그 외부자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고 그에 따라 나는 수동적이어야 하니까. 그래서 그 외부에 있는 존재를 언제나 포획하려고 했다.

나의 할머니 집은 충청북도 제천시 월악산의 어느 휘어진 골짜기에 있다. 어린 시절 여름 방학이 되면 시골에 가서 곤충 채집과 낚시를 했다. 자유로이 날던 나비와 힘차게 헤엄치던 물고기를 잡아 잠자리통과 플라스틱통에 가두면 그 생명들은 어김없이 얼마 지나지 않아 말라 버렸다.

그 모습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쓸쓸하다. 나는 곁에 두었다고 생각했지만 생명들은 금세 숨을 잃었다. 붙잡을수록 혼자가 되었다. 이것이 사랑에 대한 나의 어렴풋한 첫 기억이다.

그 이후로도 사랑의 실수는 다양했다. 아내와 연애를 할 때도, 사제 간에도, 친구 간에도 마찬가지로 올바른 사랑을 실천하기란 매우 힘들었다. 사랑이란 필연 상처를 동반하는 게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사랑이 버거웠다. 나는 사랑을 명목으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지만, 상처를 받기도 했다. 어느순간 나에게 사랑에 대한 차가운 냉소가 뿌리내렸는데, 그건 나를 가스라이팅한 사람 때문이었다.

그는 나를 자신의 잠자리통에 가두려고 했고, 나는 결국 저항하며 그를 물어 버렸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 뒤로 나는 사랑을 하지 않기로 했다. 타인과의 공존을 믿지 않았다. 끝내 인간은 결정적 순간에 서로를 흡입하려는 청소기일 뿐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나는 나의 존재를 지지해 줄 대상을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찾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알베르 카뮈, 니코스 카잔차키스, 헤르만 헤세를 만났다. 문학으로 체득한 실존주의는 실제로 일정 부분 나를 자유롭게 했다.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존재 기반을 형성하지 않아도 삶이 가능하다는 뉘앙스는 나의 현실로 보건대 일리가 있었다.

의식적으로 외부에 영향을 받지 않으려다 보니 실제로 그런 사람이 되어 갔다. 누군가 나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도 그다지 반갑지 않았고 누군가 나에 대한 험담을 해도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물론 관계에 있어서도 애쓰지 않는 사람이 되어 갔다. 누군가 나에게 다가와도 적극적으로 환대하지 않았고, 누군가 나를 떠나가도 적극적으로 붙잡지 않았다.

진정 나는 외부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그것을 진정한 자유라고 믿었다. 타인에게 뛰어들지 않는 삶, 온도를 지나치게 높이거나 낮추지 않는 삶을 여러 계절 보내다 보니 어느덧 나는 이 삶에서도 결여된 무언가를 발견했다. 삶이 버겁고 무겁게 느껴졌다. 자유의 망망대해에서 홀로 방향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 누군가의 손길을 의존해선 안 된다는 것. 이러한 신념으로 나는 자발적으로 자신을 소외시켰다.

팬데믹이 세계를 더욱더 파편화한 뒤 나의 몸과 정신은 더없이 무너졌다. 어느 날, 서가를 뒤적이다가 카를 바르트의 ⟪하나님의 인간성The Humanity of God⟫을 꺼내 읽게 되었는데 이런 문장이 담겨 있었다. “하나님의 자유는 본질적으로 ‘~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고 ‘~을 향한 그리고 ~을 위한 자유’인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향해 자유로우시다.” 무언가 쿵 하고 부딪혔고 쫙 하고 쪼개졌다. 이 문장은 도끼였다. 잠시 아득해졌지만 곧이어 갈라진 틈으로 빛이 들어왔다. 동시에 예수의 말씀이 겹쳐 들렸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냉소, 책임, 소외로 표출되는 자유는 창조주의 자유가 아니었다.

나는 수고롭고 무거운 자유를 지고 있었다. 나는 다시 ‘~을 향한 자유’를 위해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전 삶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컸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시절을 미화한 것처럼, 나 또한 자유를 버리고 다시 노예가 되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가나안을 떠올렸다. 내가 본 빛은 이집트도, 광야도 아닌 가나안에서 비친 빛이었다. 나는 새로운 삶을 발견해야 했다. 자유롭게 사랑하는 삶. 훼손당하지 않으면서 훼손하지 않는 삶. 나와 너를 함께 살리는 삶. 가장 먼저 소극적 삶의 방식을 내버려야 했다. 내려놓은 사역을 다시 시작했다. 나를 넘어서 너를 돌보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우선 할 일이었다.

하나님께 간곡히 기도했고 그분은 나를 지금의 공동체로 보내셨다. 나는 차츰 나로부터 해방되어 바깥을 지향하게 되었다. 공동체의 환대, 사랑, 봉사, 헌신. 어느덧 케케묵은 단어처럼 여겨지던 단어들이 새로운 의미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나는 결코 이전으로 돌아간 것이 아닌 새로운 국면에 이르렀다.

두 해 동안 사랑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얼마 전 나의 사랑 여정에 중간 매듭을 짓게 된 일이 있었다. 청소년부 수련회 마지막 날, 한 아이와 새벽까지 대화를 나누었다. 관계적인 아이는 생각보다 나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의 성향에 관한 주제로 이야기가 흘러갔는데, 그 아이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그 아이는 전도사인 나를 다양한 방식으로 부른다.) “처음 쌤을 봤을 때, 우리에 대한 마음이 순수하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는 그런 것만 같지는 않다는 생각을 했어요.

뭔가 의무 같은 게 섞여 있는 것 같아요. 오해하지 마세요. 부정적인 말은 아니에요!” 며칠 동안 귓가에 맴돌았다. 서운하기도 했고 사실 일정 부분 맞는 말이기도 했다. 곰곰 생각하고 여러 결론을 내렸다. 사람에게 의무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의무가 관계의 본질보다 앞설 수는 없다. 아이의 말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걸 보면 실제로는 이 사랑과 의무의 관계를 제대로 성찰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또한 아이의 말을 들은 나에게 서운함이 밀려온 것은 나의 존재가 아이들의 존재에 닿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해명하고 싶은 욕구를 저 멀리 흘려 보냈다. 사랑과 관계의 역학을 어느 정도 경험으로 익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나는 더 배워야 했다.

성경에서 신적 사랑의 극치를 보여 주는 장면을 꼽으라면, 나는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던 새벽을 떠올린다. 그분은 고독한 죽음을 당하기 전 사랑하는 제자 몇몇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신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있으라”(마 26:38)며 제자들이 자신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기를 원했지만, 제자들은 피로하여 잠에 들고 만다. 끝내 예수는 차가운 밤을 홀로 보내신다.

나는 예수께서 이 쓸쓸함과 거절감을 어떻게 견뎌 내셨을지 감히 상상할 수 없다. 이어 부활하신 뒤 디베랴 호수에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6) 라며 끝까지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신 그분의 신적 사랑은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며칠 전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리스도 교양⟫을 독서하던 중,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사랑에 대한 큰 깨달음을 얻었다. 하나님은 교부의 글을 통해 다시 헤매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떠한 사물 혹은 대상과 관계 맺는 일을 설명하면서 ‘향유frui’와 ‘사용uti’이라는 대비되는 두 개념을 말한다.

대상 자체를 사랑하는 태도를 향유라고 부르고, 다른 목적을 위해 대상을 이용하는 태도를 사용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이용이란 부정적 개념은 아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무언가를 사랑할 때, 그 대상이 향유의 대상인지, 사용의 대상인지를 분별해야 하는데 이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향유의 대상은 향유자보다 더 온전한 존재여야만 그 향유의 수혜가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유일한 향유 대상을 창조자이신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동등한 피조물을 향유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사랑의 원리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필연 착취 내지는 숭배가 발생한다. 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론에서 적극적이면서도 상처 받지 않는 사랑의 원리를 흐릿하게나마 발견했다. 사르트르는 타인을 지옥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줄곧 타인에게 천진난만하게 존재를 내주다가 상처를 입고 후퇴한다. 사랑의 실패는 굳은살이 되어서 우리를 끝내 사랑에 무감하게 만든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사랑에는 신적 질서가 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차가운 밤을 홀로 보내셨던 예수도 아마 그 질서 속에 머물렀던 것 같다.

“우리와 더불어 하느님을 향유할 수 있는 모든 이 가운데서 일부는 우리가 돕는 사람이고, 일부는 우리가 도움을 받는 사람이고, 일부는 그들의 원조를 우리가 필요로 하거나 그들의 곤궁을 우리가 덜어 주는 사람이고, 일부는 그들에게 우리가 이로움이 되어 주지도 못하고 그들에게서 우리가 기대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전부가 우리와 함께 하느님을 사랑하기를 바라야 하며, 우리가 돕는 것이든 우리가 도움을 받는 것이든 일체가 그 하나의 목적이신 분께로 귀결되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 교양⟫, 제1권, 2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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