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제물이 될 뻔 했던 이삭과 광복절 경축사

사티

인도에는 근세까지 ‘사티’라는 순장 풍습이 있었다. 남편이 죽으면 혼자 남은 아내도 남편과 함께 장작더미에 올라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풍습이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화하면서 악습은 없어졌다. 그래서 영국인들은 우리가 인도 여성들을 폭력에서 구했다고 자화자찬하면서 그들이 저지른 여타의 식민지 폭력을 덮으려고 한다. 반면 인도인들은 여성들의 사티 선택은 그들의 자발성에서 나온 것이지 결코 폭력으로 강제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인도출신의 철학자 가야트리 스피박은 영국이나 인도의 주장 모두에서 사티의 제물이 여성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며 서발턴( Subaltern·하위주체)이라는 개념에 주목한다. 그와 다른 학자들이 공저한 ‘서발턴은 말할 있는가’(태혜숙 옮김, 그린비) 분야 최고의 연구서다. 서발턴은 그들의 목소리조차 없는 하위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다.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비슷한 개념이다. 백인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에 흑인 여성은 보이지 않고 흑인 우머니스트의 눈에 흑인 레즈비언은 보이지 않는다. 하위 계층들을 대상화하면서 교언(巧言)들이 담긴 주장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하위 계층들을 주체화하는 주장은 없다. 스피박 역시 서발턴은 말할 있는가라고 물으면서 그들은 ‘왜’라고 물을 없을 만큼 소외되어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아무리 그들을 대변하려 해도 소외된 계층이 여전히 존재하는게 현대사회의 슬픈 모습이다.

 

해병대 상병

지난 7 19 폭우로 인한 실종자를 수색하던 해병대 청년이 급류에 내려가 목숨을 잃었다. 상부지시사항은 해병대가 부각되도록 구명조끼도 입히지 않은 붉은 옷으로 통일했고 군화도 신지 못하게 했다. 장화를 신어야 그림이 나오기 때문이다. 청년의 죽음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해병대의 영광을 위해서, 실종자 수색이라는 숭고한 사명을 위해서? 어디에서도 사티의 희생자들 처럼 젊은이와 가족의 질문은 들리지 않는다. 자발성이 아니라 라캉이 상징계라고 부르는 거대 이데올로기가 그를 사지로 몰아 놓았다. 그런 점에서 그의 죽음은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제의이자 희생제의이다.

이에 박정훈 대령( 해병대 수사단 단장) “채수근 상병의 시신 앞에서 너의 죽음에 억울함이 남아 있지 않도록 철저히 조사하고 재발장지가 되도록 하겠다고 약속하고 다짐했”다가 졸지에 ‘수괴’가 되어 버렸다. 군대의 계급적 특징에서 나오기 어려운 놀라운 발언이다. 박대령은 상병의 죽음에 ‘숭고함’, ‘희생’을 집어 넣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원치 않는 ‘억울한 죽음이었다. 그는 재발방지를 약속했다. 누군가를 희생제물 삼아 미화하는 풍토 속에서 이런 사건은 계속 재발하면서 거짓 의미를 재생산한다.

KBS 사사건건 화면 갈무리
KBS 사사건건 화면 갈무리

 

번제물이  했던 이삭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했던 것은 일종의 인신제의다. 구약에서는 인신제의를 언급할 주로 4개의 단어를 사용했다.  1) 알라 2) 싸라프, 3) 나탄 4) 아바르가 4개인데 전통 야훼종교 계통에서는 ‘여호와 이레’ (이삭의 번제에는 ‘알라’를 사용했다) 이후 인신 제의가 그친 것으로 본다. 나머지 3개의 단어는 주로 이방종교에서 사용되는 인신제의를 설명할 사용되었다. 사사 입다의 딸에는 이삭과 마찬가지로 '알라'를 썼다. 이삭은 하나님이 중지한 것과 달리 입다의 딸은 번제물로 바쳐진 대해 여성신학에서는 남녀차별로 비판하지만 반대로도 생각할 있다. 인도의 사티, 조선의 열녀문, 아버지를 위해 제물이 심청의 이야기를 사회적으로 숭상하는 야만을 저지르는 대신에 성경은 입다의 딸의 희생제의의 상세한 묘사를 자제한 것이 아닐까? 후대의 여성독자들의 불편함을 고려해서 말이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정식 혈통으로 야훼의 족보이다. 서발턴도 아닌 조차도 자신이 산에 올라가야 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자기를 태울 장작을 매고 산에 오른다. 서발턴이 아니기에 그는 번제에 쓰일 희생양이 어디있냐고 물을 있었다. 신의 혈통인 이삭이 자신의 동의 없이 당할 뻔한 희생을 보며, 입다의 딸이 자신의 동의없이 당했던 희생을 보며 성서의 독자들은 ‘서발턴은 하물며’라고 물어야 한다. 그것이 이 시대 성서의 바른 독법(讀法)이다.

‘여호와 이레’는 결국 폭력의 끊어냄이다. 이삭이 번제물이 되지 않음으로써 종교적 희생은 거짓 명분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다시말해 종교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모든 폭력 가짜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 나오는 ‘후미에(ふみえ, 초상화 밟기)’처럼 배교 행위를 할지언정 목숨은 희생시키지 말라는게 모든 종교의 진정한 가르침이다.

신자유주의, 국가주의라는 거대한 종교가 모든 것을 포식해버린 현대사회에서 기성 종교에서도 중지된 인신제사가 이 거대 종교에 남아 있다. ‘해병대 정신’이라는 종교는 젊은이의 죽음을 희생양 삼으려고 하고, ‘자본주의’라는 종교는 산업현장에서의 죽음을 희생양 삼아 거대한 부를 축적한다. 서발턴의 목소리를 대변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말하지 못하는 이들의 소리를 미약하나마 전달하려는 여러 시민 단체들이 거짓 종교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폭력을 제어해 왔다. 그런데 2023 광복절 경축사에서 그들은 공산전체주의 세력의 하수인이 되고 말았다. 역대급(?) 광복절 경축사이다.

“공산전체주의 세력은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 왔습니다. 우리는 결코 이러한 공산전체주의 세력, 맹종 세력, 추종 세력들에게 속거나 굴복해서는 됩니다. (2023 광복절 경축사 중에서) "나아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의 연대와 협력”하면서 “우리는 이제 세계시민의 자유, 평화, 번영에 책임있게 기여해야 하는 역사적 숙명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단다. 보편의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계속 희생제의의 제물(강제징용, 종군위안부,오염수 방류, 산재 피해자) 되어 달라는 부탁이다. 왜냐하면 그의 ‘보편’은 미국와 일본이 기준이고 기업이 우선이라는 말이며 그것은 받아들여야 할 숙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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