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가 이중직을 하려는 동기가 어떠냐 하는 것이 찬반을 가르는 관건이 될 것입니다: 자비량(自備糧)을 해서라도 주님의 복음과 주님의 교회를 위해 부름받은 소명을 이루겠다고 하는 동기로 불가불 이중직을 선택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어떤 동기나 목적으로 [그것이 물질적인 유여함을 추구하는 것이든 정서적인 만족감이나 사회적인 인지도를 고양하는 것이든] 이중직을 붙들고 놓지 않으려는 것인가?

만일 후자에 속하는 목회자라면 세간의 비판 이전에 이미 자신이 스스로 “온전한”(holistic) 헌신을 하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 자책감이나 자격지심을 지닐 수밖에 없을 터, 그런 [정신]상태로 하는 목양이 제대로 된 소명을 이루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은퇴 후에 그에게 남는 자부심이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의 복음이 확장되고 주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이 높아지고 자신의 노후가 보장되는 것이 더 우선적인 관심사였다면 이는 소명에 충실한 목회자였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소명을 좇아 주님의 교회를 돌보고 목양의 길로 들어섰지만, 교회의 재정상황이 열악하여 사례만 가지고는 생계가 해결이 안 되어서 불가피하게 이중직을 해서라도 생활비와 더 나아가서는 교회의 운영 경비를 충당하려는 목회자를 두고, 이중직은 소명과 배치된다거나 소명을 약화시키는 지름길이라고 뭉뚱그려 버리면 이는 어불성설을 넘어서 이중직 내지 자비량 목사들을 엿먹이고 폄하하는 중상모략의 결과가 되고 말 것입니다.

안 그래도 모자란 시간을 쪼개어서 천막 깁는(tent-making) 일을 해야했던 사도 바울을 두고 그의 소명감에 의문을 제기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이 일로 사도 바울이 스스로 갈등을 느꼈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였다고 하는 흔적은 찾아볼 수 없지 않습니까? 그의 ‘이중직’은 오히려 그의 회심의 진정성과 이방인 사도의 소명을 더더욱 확인할 수 있는 증표로 보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목사의 이중직 자체를 마치 믿음의 부족이나 순전하지 못한 동기를 지닌 것으로 의심하거나 매도하는 것은, 그것도 동일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의 입으로 그리한다면, 있어서는 안 될 말입니다.

물론 이런 의심과 폄훼에도 불구하고 순전한 동기와 헌신으로 목회의 부르심을 감당하려는 목회자들은 전혀 흔들림이 없을 것이며, 제대로 된 교인들이라면 목회자의 처지를 더욱 헤아리고 보살피려 할 것입니다만, 이들을 질책하거나 비난하는 것으로 비치기 쉬운 발언은 힘겨운 이중직 목회자의 길로 들어선 이들과 그들이 섬기는 교회에게는 도움은커녕 위로조차 못 될 것입니다. 만시지탄이나마 심심한 사과를 해서라도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재정적인 지원까지는 아니어도 이중직을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도록, 교단 차원에서 개입해서라도, 소속 목회자들을 격려하고 교회의 ‘하나됨’을 확보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안 그래도 주님의 교회를 두고 마치 기업 경쟁하듯이 “성장”을 운운하거나, 목회자의 소명을 “성공”한 경영자의 잣대로 평가하는 등 대형 교회들이 앞다투어 개교회주의적 반복음적인 행태를 지향하는 바람에 세습을 위시하여 각종 비리와 편법의 온상을 만들어 놓은 한국 기독교, 더 이상 개독교로 매도하는 것조차 싫증의 대상이 되어버린 이 땅의 교회에 이중직 목회자상(像)은, 어쩌면 순전한 동기와 온전한 헌신의 한 모델로서 순전치 못한 동기와 온전하지 못한 헌신의 구정물을 맑히는 반환점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해서 주님의 복음과 몸된 교회를 위해 적어도 결자해지의 책임이 있는 목사님의 공식적인 사과와 해명이 우선적으로 요구된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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