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염수로 물이(에) 다 죽게 되었나이다

요즘 AI 놀아보는 유행이다. AI 어디까지 갈지 몰라 불안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현재 수준은 놀이터(playground) 단계다. 텍스트를 그림으로 바꾸어주는 여러 AI중에 Stable Diffusion AI(SDAI)에게 “하나님, 창조, 물고기, (너무 만화처럼은 말고)”을 명령어로 줬더니 그들의 ‘놀이터’에서 이런 그림이 만들어졌다. 사람에 대해 어떤 명령어를 주면 SDAI에서는 손가락이 6개거나 잘못 처리되는 단점이 있다. 그것과 관련이 있는지 물고기에는 꼬리가 없다. AI 창조하는 세계는 어떤 세계일지 놀이터에서 놀면서도 솔직히 조금 불안하기는 하다.

Stable Diffusion AI에서 추출한 그림
Stable Diffusion AI에서 추출한 그림

창조, 뒤에 과학만 안붙는다면야 가슴 설레는 단어다. 진화론이 주지 못하는 생명력이 있다. 진화론이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세계관이라면 창조는 자체로 향유할 있는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태초에 빛이 있었다고도 하고, 말씀이 있었다고도 하고,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라고도 했다. 그러나 창조 전에 물이 있었다.  창세기 1:2 이미 하나님의 영이 물위에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에 대해서 탁월한 해석을 사람은 ‘길 위의 신학-하나님의 지혜를 신비 가운데 분별하기’(동연출판사)를 캐서린 켈러다. 창세기 1: 20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물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고, 새들은 하늘 창공으로 날아다녀라’ 하셨다”처럼 물고기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시원이다. 진화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초대교회의 물고기 상징도 이런 맥락에 있다. 물론 물고기(ΙΧΘΥΣ익투스) 표시가 예수(Ιησου) 그리스도(Χριστο) 하나님의(Θεου) 아들(Υιο) 구세주(Σωτηρ)라는 말의 앞글자만 따온 것이라는 것은 아는 사실이지만 물고기 상징을 처음 채택한 초대교회 교인은 창세기의 물고기를 연상하며 전율했을 것이다.

물고기가 비록 먹이 사슬의 최상위에 존재하지 않지만 물고기를 혼돈의 복판에서 벌이는 우리의 모든 투쟁의 은유로 삼았다. 파도가 거칠어도 물고기는 물을 탓하지 않고 속에서 폭풍우를 헤쳐나간다. 그래서 캐서린 켈러는 창세기 1:20 “물고기를 흉내 내라”라는 말로 해석했다.

폭풍우에 무서워하는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는 예수의 말씀도 그러한 의미다. 바람이 일고 배가 흔들리는데 두려워 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있는가? 예수의 두려워하지 말라는 의미는 “바다(호수) 본래 이런 곳인줄 몰랐어?”라고 제자들에게 되묻는 뉘앙스다.

이처럼 물은 생명의 근원인 동시에 삶의 은유다, 초대 교부 암브로시우스는 세례용 물을 담는 주발을 자궁모양으로 만들었다. 자궁의 양수에서 꿈틀대던 생명체는 세상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돌아갈 때까지 ‘되어가는’ 과정에 있다.  물의 흐름(currency)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흐름이며 현재(current). 그런 점에서 물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되어감(becoming)이다. 창세(genesis)라는 말도 되어감이다.

창조와 물의 신비를 모르고, 삶이라는 항상 미심쩍을(fishy에는 생선비린내같은 뜻 이외에도 수상하다 미심쩍다라는 뜻이 있다) 밖에 없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은 ‘되어감’을 훌쩍 뛰어 넘어 곧바로 안정된 지점에 도달하려 한다. 젊을 때의 혼돈을 빨리 정리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JMS 빠져들고, 과학이 세상을 평정했다고 믿는 공학자들(창조과학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의외로 생물학이나 천체 물리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드물다) 창조과학에서 해답을 찾는다.

창조이야기를 주자학으로 풀어보면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된다. 원리, 근본으로서의 ‘리()’는 하나님이 되고, 흐름, 에너지로서의 ‘기()’는 물이다. 물이 닿은 습기는 오래가서 선조들은 그것을 물기(물氣)라고 불렀다.

이것이 성령으로 이어져서 요한복음 3장에서 성령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과정에 있는 존재가 된다. 기독교 신학은 이것을 삼위일체로 정리했다. 원리와 기운이 예수를 통하여 하나가 되었다. 

플라톤이 이데아로 ‘리’를 강조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기가 ‘리’를  존재하는데 갖추어야 터전으로 ‘이해했던 이기일원론과 같은 입장을 가졌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기초로 중세가톨릭 신학을 완성했다.

노자의 ‘도덕경’도 도와 덕을 나눈다. () 만물의 원리()라면 () () 마찬가지로 도를 기초로한 만물의 발전원리다. 그래서 () 도의 결과로 얻어지는 좋은 결과다. 그래서 덕에는 () 개념도 있다. 도덕경 8장은 가장 좋은 선은 물과 같다는 상선약수(上善若水) 소개한다. 가장 좋은 , 도와 덕과 하나님과 이데아가 모두 물과 같다는 의미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고도 공을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있다.

따라서 거의 도에 가깝다.

몸은 낮은 곳에 두고, 마음은 깊은 곳에 두며,

베풂은 () 맞게 하고,

말은 신의가 있게 한다.

정사(政事) 자연스러운 다스림에 맞게 하고,

일은 능률적으로 하며,

행동은 때에 맞게 한다.

대저 오직 공을 다투지 않으므로 허물이 없느니라

 

특히 물의 속성 중에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處衆人之所惡) 있는 것'이라고 했는데 예수와 창조 때의 물고기가 보여주고 싶었던 가르침도 이와 같다.

AI의 시대다. AI가 창조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일각에서 우려하는 것처럼 파멸을 향할까? 아니면 새로운 미래를 보장할까? 

AI가 만들 세상은 불투명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실제 세상에서 물의 아름답고 신비한 이야기는 수명을 다한 것 같다는 두려움을 떨칠 수가 없다. 물이 죽고 물때문에 죽음으로써 물은 이제 어떤 은유도 적용될 없는 죽음의 장소가 될 것이다.  일본의 오염수 방류를 앞장 서서 권장하고 홍보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윤석열의 정신상태 때문에 하는 말이다.

그는 도덕경 8장의 ‘도에 가까운 물’의 고귀한 속성을 고스란히 거스르고 있다. 도덕경 8장을 다시 한번 읽어보라! 반대로 하면 윤석열이 떠오르지 않는가?

 

몸은 낮은 곳에 두고, 마음은 깊은 곳에 두며,

베풂은 () 맞게 하고,

말은 신의가 있게 한다.

정사(政事) 자연스러운 다스림에 맞게 하고,

일은 능률적으로 하며,

행동은 때에 맞게 한다.

대저 오직 공을 다투지 않으므로 허물이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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