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벗의 몰래 읽은 책 6] 반대자의 초상

공동번역  누가복음 12:53의  “아버지가 아들을 반대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반대할 것이며 어머니가 딸을 반대하고 딸이 어머니를 반대할 것이며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반대하고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반대하여 갈라질 것이다"라는 말씀에 나오는 ‘반대’는 개역에서는 ‘분쟁’으로, 새번역에서는 ‘맞서는’ 으로 번역되어 있다.  순종을 미덕으로 삼아야 할 신앙인들에게 반대는 불경스러운 죄이다.  신앙과 상관없이  나이가 어린 사람들, 지위가 낮은 사람들에게도 반대는 불리한 덕목이다. 아이들은 어른의 말을 들어야 하고, 직장내 을(부목사로 대치해도 좋다)은 갑인 직장 상사(담임 목사로 대치해도 좋다)에게 어떤 문제도 제기할 수 없는 독한 사회(교회로 대치해도 좋다)가 오늘의 현실이다. “가만 있으라!”는 말에 반대를 하지 못했던 아이들은 돌아올 수 없는 멀고 슬픈 길을 떠났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마지막 날의 모습을 맞서는 것으로, 반대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반대는 순종의 반의어인데 마지막 그날에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의견이 달라 갈라선다. 부모간에도 모녀간에도 고부간에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다. 가족은 동의가 가장 손쉽게 일어나는 기초 공동체인데 마지막 날에 여기서부터 파열음이 생긴다면 그날은 도대체 어떤 날일까?  어쩌면 분쟁과 반대는 역사가 끝날 때까지 인간들이 안고 살아가야 할 숙명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예수는 항상 순종했을까?

성서는 순종을 강조하지만 예수라고 항상 순종만했을까? 그분은 바리새파에 반대했고, 성전 장사치들에게 반대했고, 더러는 제자들과도 반대 입장에 서기도 했다. 종교개혁자 루터도 반대자였고,  노론에 맞서던 실학자들도 반대자였다. 역사 자체가  반대자들에 의해 이끌려 왔다고 말해도 무리는 아니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반대자들이 부당한 힘에 맞섰다.  반대는 항상 힘든 것이지만  상대방이 나쁘다고 모두가 동의하는 상황에서 반대는 좀 쉬운 편이다. 반면 모두가 옳다고 느끼는 경우에 반대할 때는 위험성이 뒤따른다.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실험에 의혹을 제기하던   MBC PD수첩팀이 곤혹을 치르었고, 축구해설위원으로 주가를 올리던 신문선씨는 2006년 월드컵 한국 스위스전 중계시 우리에게 불리한 심판의 오프사이드 판정이 옳은 판정이었다고 대중의 염원과 반대되는 해설을 함으로써 방송에서 퇴출당했다. 반대자는 ‘삐딱이’로 취급받는 외로운 길을 걸어야 한다.

사회든지 교회든지 순종으로만 이루어졌다고 해서 좋은 공동체라고는 할 수 없다. 순종이라는 그럴듯한 포장 뒤에서 온갖 강요와 희생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여지는 공동체는 건강하지 않다.

지젝부터 베컴까지 삐딱하게 읽는 서구 지성사

맑시스트이면서 가톨릭 신자임을  공공연히 밝히는, ‘나는 반대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영국의 학자 테리 이글턴은  <신을 옹호하다> (모멘토, 2010)에서 포스트 모던 시대에서 하나님의 의미를 진지하게 성찰했다. 뛰어난 생물학자라는 사실이 성에 안차는지 기독교를 몰아치는데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소진하는 리처드 도킨스도 테리 이글턴의 글 앞에서는 작아진다.  그가 쓴 '지젝부터 베컴까지 삐딱하게 읽는 서구 지성사'라는 부제가 붙은 <반대자의 초상> (이매진, 2010)은 서평전문지인 <런던 리뷰 오브 북스>에 기고한 41편의 글을 모든 평론집이다.

여기서 ‘반대자’는 주류이면서 비주류의 시각을 가진 사람이거나, 남들이 옳다고 혹은 좋다고 여기는 글들을 한번 뒤집어 읽는 사람들일게다.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낯선 사상가들을 분석하는 그의 식견은 탁월하다. 우스개 소리처럼 쓰지만 내용에 담긴 그의 지적 함량은 독자들을 유쾌하게 짓누른다. 분야도 다양해서 철학과 문학 뿐 아니라 축구 선수 베컴의 저작도 테리 이글턴의 삐딱한 눈에 걸려 든다.

월드컵 시즌이므로 (이제는 아내 빅토리아가 더 유명해 졌지만) 한 축구 선수 베컴의 이야기를 보자. 베컴이 <나의 축구, 나의 인생>이란 책을 썼다. 인터넷 서점을 검색해 보니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있다. (그 유명한 책이 번역된 것도 몰랐느냐고 질책할 축구 팬 독자들도 계실지 모르겠다.) 테리 이글턴은 이 책을 평하면서 ‘그 매끄러운, 포스트 모던한 육체’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쓴다.

데이비드 베컴이 과연 이 책을 직접 썼을지 궁금하다고? 차라리 파라오가 피라미드를 직접 지었을지를 궁금해하시라. ‘내가 몇 년 전에 입고 다닌 옷들은 좀 끔찍했는데, 이제 와서 말이지만, 그때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담?’같은 문장들은(중략) 당구대 건너편에 앉은 대필 작가에게 늘어놓는 넋두리에 더 가깝게 들린다. (중략) 문장력이 없다 못해 독자를 공격하는 것 같은 이 책을 읽어 나가노라면 마치 모슬린(편직물)을 한 야드씩 억지로 씹어 먹는 기분이 든다.

   
 

이렇게만 평한다면 이글턴이 아니다. 머리로 사는 지식인이 몸으로 사는 축구선수를 깔보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테리 이글턴은 이렇게도 평한다.

이 책의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의 분절은 데이비드 베컴이라는 인물 자체가 가진 분절을 드러낸다. 앞부분에서는 엄마를 사랑하고 연예계의 파티보다 혼자 이불을 뒤집서 쓰고 포장 음식을 먹는 것을 좋아하는 수줍은 사내아이, 뒷부분에서는 타인의 감탄어린 시선을 갈망하며 관능적으로 자신을 과시하는 나르시스트, 이 책의 정신은 너그럽게 그 모든 것을 포용한다.

비아냥 같기도 하지만 예외없이 다중인격을 갖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그냥 스쳐갈 수 없는 대목이다.

조너선 돌리모어의 <서구 문화의 죽음과 욕망의 상실> (우리 말로 번역되어 있지 않다)을 ‘제대로 살아야 제대로 죽을 수 있다’라고 평하면서 다음과 같이 쓴다.

성 바오로가 우리는 매순간 죽는다고 말할 때 그 뜻은 삶이 곧 죽음이라는 순교자의 의미였다. 삶에서 자아를 없앤다는 것은 자아가 해체된 상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어떤 특정한 양식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지를 잃지 않고 자아를 적절히 쾌활한 상태로 유지할 것을 요구한다. 진정한  자기 포기는 정치적 순종이나 격렬한 성적 쾌락 같은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삶을 살면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다. (중략) 돌리모어는 현명하게 한마디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면 우선 어떻게 죽을지 알아야 한다.’ 우리 대다수에게 일어나는 가장 극적인 사건인 죽음은 견뎌 내야 하는 사건이 아니라 공연해야 하는 사건이다.

테리 이글턴의 반대에는 따뜻한 공감도 있고, 비평 대상이 된 책이 보여주지 못했던  혜안도 있다. 이게 바로 그의 반대가 가진 긍정의 면이다.

순종의 삶, 긍정의 힘 모두 좋다. 그러나 반대의 묘미를 알아야 순종을 알 수 있다. 오랫동안 강요된 순종에 길들여진 기독교인들은 우리를 자유케 하는 반대의 묘미에 빠져들면 헤어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다만 순종과 반대 다음에 변증법적으로 오는 따뜻한 공감, 새로운 시각을 얻는 일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과 나 자신을 위해 반대해야 할 일들이 수두룩한데, 이웃 종교의 공간에 가서 말도 안되는 반대를 일삼는 사람들은 이 글을 읽고도 이해를 못할 터이니 그것도 문제다.

길벗 / 뉴스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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