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좋은 책, 유명한 책, 영향력이 있는 책을 뒤집어 읽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저자 따라하기(저자의 말투, 글투, 생각 등)가 아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저자를 멀리하거나 반대를 위해 꼬투리 잡는 수고도 아니다. 저자의 고민(문제제기)을 듣고, 저자와 생각을 주고받으며, 그 문제제기에 나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돌아보는 수고이다. 최근 한 권의 책을 접했다. 바로 이 책이다. 성기문, 기독교 역사 속 술, 시커뮤니케이션, 2017.술에 관련한
서론 어릴 때부터 유명 강사나 연예인이 강단에서 하는 말이 자녀들을 성공적으로 키우고 싶으면 총 31장으로 구성된 잠언을 하루에 한 장씩 읽게 하라는 것이었다. 잠언을 읽는 목적이 인생성공과 지혜로운 삶을 위해서이니 아주 좁고 제한적인 범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잠언이 결국 그 정도의 목적일까? 그런데 실제 우리는 잠언을 대할 때 삶에서 마주치는 모든 순간들에 잘 대처할 수 있는 비결을 알고 싶어서 읽는다.그러나 잠언이 인생의 도약을 위한 보석이 숨겨져 있는 책일까? 읽지 않고 찾지 않으면 인륜의 뜻을 거스르고 어리석게 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살아가면서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우리가 스스로에게 하는 가장 흔한 질문 중 하나일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질문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를 향한 신뢰, 그리고 지금 자신이 처한 어려운 상황 사이에서 혼란을 일으킬 수 있으며, 자칫하다간 자신의 신앙까지도 잃어버릴 수 있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무소부재하심이 자신의 고난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느껴지고, 자신만 숨 막히는 어둠 속에 홀로 덩그러니 버려진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고난과 훈련의 유익함을 배울 수 있는 훌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L. Sayers, 1893~1957). 그녀는 1~2차 세계대전 어간에 탐정소설 “피터 윔지 경(Lord Peter Wimsey) 시리즈“의 작가이자 기독교 극작가와 변증가로 영,미권에서 널리 알려진 여류 작가다. 우리나라에도 그녀의 추리소설들이 이미 번역되어 있지만, 한국 기독교 출판계나 문학계에 그녀의 작품들이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때문에 아직도 그녀는 우리에게 조금은 낯설다.내가 도로시 세이어즈를 만난 건 그녀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창조자의
며칠 전에 나온 따끈따끈한 신간이다. 그런데 이 책은 사실 많은 우리 한국인 크리스천들을 불편하게 하는 책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잘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사실을 손가락으로 꼭꼭 짚어가면서 알려주면서 '너, 틀렸어... 잘못 알았어...'라고 지적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무슬림? 이슬람? 조금 궁금하기는 해도 깊이 알고 싶어 하는 주제도 아니고, 알고 싶어 할 대상의 사람들도 아니다. 많은 한국인 대부분에게 무슬림들은 자주 부닥치게 되는 사람들이 아니다.과거 CNN 뉴스에서 나오는 중동문제에서 이스라엘과 반목하거
지난 주에 남편과 제대로(?) 싸웠다. 둘째가 '자기 평생 처음 보는 모습'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애들 앞에서 큰소리를 냈다. 게다가 울기까지 했다. 우는 건 시나리오에 없었는데, 조곤조곤 논리적으로 내 뜻을 전달하다가 남편이 보이는 태도에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목이 메었다. 하지만 최근 2~3년간 사소한 승리(?)를 많이 거두어서 자신감이 붙은 상태였다. 이번에 문제의 발단이 된 사건에도 나는 자신만만했다.내가 결혼생활 내내 이랬던 건 아니다. 결혼관계 안에서 내 행동, 태도, 실수 등에 대한 남편의 사소한 지적을 나
2014년에 읽은 책인데, 인용하고 싶은 구절이 생각나서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세상에나 이게 웬일, 내가 그때 이 책을 어떻게 읽었나 싶을 정도로 보석 같은 구절을 새로 많이 발견했다. 몇 년 전에는 이 책이 이 정도로 좋은 책인지 왜 몰랐을까 곰곰 생각해 보니 그때,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해였다. 당시 내게는 어떤 책도 현실만큼 절박하지 않았던 거다. 그때는 사실 저자인 도널드 밀러가 남성이기 때문에, 남성 작가 중에 자기 이야기를 이렇게 섬세하게 표현해내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가산점을 받은 게 아닌가 싶었다. 좀 과대평가
살아가면서 언젠가는 존재의 심연을 맞닥뜨리는 순간이 찾아온다. 익숙하지만 낯선 자신의 벌거벗은 실체를 대면하는 시기다. 우리가 고난이라고도, 환란이라고도 부르는 순간이다. 소스라쳐 뒤로 물러서거나, 없는 것처럼 무시해버리지 않고, 이를 정면으로 맞설 용기만 있다면, 반드시 그 심연으로부터 우리는 귀중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네 삶을 편리하게 만든 문명의 발달과 사회에 팽만한 구조적 악은 불행히도 우리가 그 순간으로부터 비겁하게 도망가 숨을 수 있는 여유까지도 충만하게 제공해 주었다. 그래서 우린 좀처럼 그런 순간을 기
부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배우는 자비 사역’이다. 무심코 읽어 내려가는 동안 강해 설교나 성경 해설집을 생각했던 나의 짐작이 틀렸음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그것은 책의 절반 이상을 읽은 뒤였다. 왜냐하면 모두 2부로 나누어진 책의 제1부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무엇인지 교회적 관점에서 해석하는데 투자하기 때문이다. 제2부는 ‘우리는 어떻게 선한 이웃이 될 수 있는가’를 질문한다. 1부가 자비 사역에 대한 성경적 원리라면, 2부는 ‘자비 사역의 실천’ 방법을 구체적으로 다룬다. 즉 이 책은 교회가 실천해야 할 자비 사
교회의 타락과 성도의 방탕의 원인은 술이 아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근본주의에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는 술을 죄악시 했고 술 마시는 것은 성도의 정체성과 어긋나는 일로 규정하였다. 그야말로 술은 금기였고 넘어서는 안되는 선이였다. 마치 동성애를 인류의 타락과 사회의 부패를 만들어내는 주범으로 공격하는 것처럼 이 술이 성도의 영혼을 마비시키고 교회를 부정하게 만든다는 인식이 팽배하였다. 그러면 성경은 정말 술을 죄악으로 규정하고 술은 입에도 대지 말라고 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성경은 술에 취하는 정신 상태와 그것에 중독되어 장악당한
기독교 신앙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일주일간의 행적이 약 1/3을 차지하는데 그만큼 중요하고 기독교와 복음의 핵심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가 서고 넘어지는 근본조항입니다. 이것을 부인하면 예수를 부인하는 것이고 교회가 교회될 수도 없습니다.그래서 기독교는 예수라는 인물에 대해서 집중합니다. 그가 한 말과 행동과 그의 인격에 대해서 초점을 맞춥니다. 그중에서 그의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 영혼의 각성과 교회의 생명과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은 두 가지 사상이 대비되고 있다. 바로 바벨론정신과 예루살렘정신이다. 전자는 이땅을 지배하는 강력한 힘으로 제시되고 국가를 세우고 정부를 운영할 때도 나타나는 어두운 힘의 세력이다. 이 정신이 국가와 정부에 개입되면 제국주의와 독제체제를 지지하고 국가의 폭력과 강제력을 뒷받침한다. 또한 황제중심적인 통치를 위해 모든 것을 계급화 시켜서 약자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구조로 정부를 움직이게 된다.이에 반하여 후자는 모든 백성이 평등하고 서로에게 환대하고 신뢰하는 정신이다. 이곳에는 정직과 성실과 노력이라는 가
“불교는 인과론입니다.”1991년 뉴욕에서 있었던 달라이 라마의 강연의 한 부분이다. 한 시간 넘게 이어진 그의 강연에서 기억나는 단 하나의 문장이다. 그는 인과론을 통해 환생과 전생의 업 등을 설명해 나갔다. 그의 주장은 과학적으로 밝힐 수 없으나 종교적 상상력으로는 논리적 타당성을 갖는다. 불교도들이 이야기하는 ‘전생’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인과론에 근거한 불교는 철저하게 전생(과거)에 종속된 종교이다. 현재의 삶은 전쟁에 어떤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필연적 운명이 결정된다. 즉 전생에 어떠한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바울과 어거스틴, 마틴 루터와 존 칼빈과 조나단 에드워즈와 헤르만 바빙크 그리고 칼 바르트를 연결할 수 있을까? 기독교 역사에서 개혁주의 정통신학의 흐름을 칼 바르트는 계승할 수 없는 것일까? 현대신학의 교부로 칭송을 받는 자이기에 주류라 불리는 계보에 포함되는 것은 개혁신학을 벗어나는 것인가?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전쟁에 찬성하는 스승들에게 실망하고 반대하며 자유주의 신학을 거부하고 새로운 신학의 길을 걸어간 그에게 우리는 어떤 평가를 해야하는가?필자는 말로만 듣던 바르트를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했다. 그동안 보수교단에서 자란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는 내용이 서로 겹치고 때로는 어긋나는 것 같다. 이런 책이 어떻게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책이 되었는지 연구하는 것은 흥미로운 주제이다. 기원후 30년경에 예수는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는데, 180년경에 이레니우스는 ‘넷’ 이라는 수의 장엄함과 강력한 특성을 언급하면서 복음서는 사복음서 이상도 이하일 수 없다고 하였다.이 예수 전승에 대한 이야기가 어떻게 수집되어 전달되었으며 그 기준은 무엇일까? 예수 전승과 복음서 전승 사이에 연속성은 무엇이고 불연속성은 무엇일까?
이 책은 선교의 노하우(Knowhow)를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방법론과 전략(How)에 갇혀버린 한국 선교에 대해 ‘No’를 말하는 노하우(No, How)를 담고 있는 책이다.이 책은 그 동안 중동 지역에서 선교를 감당하고 또 이스라엘 지역 문화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왔던 김동문 목사의, '그 동안의 한국 해외 선교 행태, 특히 중동 이슬람 지역에 대한 선교 행태에 대한 의식적인 노우(No!)'다. 선교의 노하우(Knowhow)를 제시하는 책이기 보다, 방법론과 전략(How)에 갇혀버린 한국 선교에 대해 ‘No’를
보통 읽는 속도에 비해 3배 정도 느리게 읽었다. 그만큼 책을 꼭꼭 씹어가며 소화하려고 노력했다. 책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작은 꼭지는 평균 2-3페이지 정도로 짧고 쉽게 쓰여져 있고, 공감이 가는 글들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어 책을 읽는 내내 지루함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속도가 빨라져 페이지를 휙휙 넘기려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책을 가만히 덮고 묵상을 했다. 그리고 다시 쉼 호흡을 하고 책을 폈다. 저자의 삶에 녹아 있는 하나님나라를 충분히 느끼고 싶었고, 가능한 많은 것을
성경에서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관계는 목자와 양의 비유일 것이다. 예배의 회복을 아무리 외치고 교회의 회복을 간절히 원한다 할지라도 목자와 양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교회의 온전한 모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선명한 진리가 선포되고 그 진리로 인해 사람이 변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목자와 교회에 들어 온 양과의 어떠한 인격적인 만남과 교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성경적인 교회라고 할 수 있을까?물론 진리에 갈급하고 지친 영혼들이 말씀을 통해 심령의 변화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목자를 세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필자는 책장을 덮으며 기도에 대한 마음이 솟구쳤습니다. 내가 설교자로 살고 있는데 그 영광스런 직분에 비해 너무 초라하고 부족한 모습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준비하여 전하는 설교가 하늘의 언어가 되어 심령을 깨우고 적시고 살려야 하는데 세상의 노래와 영상보다 못한 것 같은 느낌에 한없이 죄스러웠습니다. 모두가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있어도 아무나 설교자가 될 수는 없는데 그 고귀한 소명 앞에 내 자신을 세워보았습니다.실제 설교자는 그 누구보다 하나님을 깊이 만난 흔적이 있어야하고 그 만남으로 인해 자신의
기고할 서평을 쓰려고 손가락에서 불이 나도록 글을 쓰고 있는데 신리교회 목사님께서 전화를 주셨습니다. 오늘 동지(冬至)날인데 팥죽 먹으로 가자고. 야호! 이런 횡재가 있나? 이런 시골에서 점심을 같이 먹을 수 있는 동지(?)가 있다니요. 감사드립니다. 커피는 제가 산다고 아무리 기를 써도 통하지가 않습니다. 팥죽 두 그릇까지 포장해 주셨습니다. 이걸 어찌해야하나? 자꾸 빚만 늘어갑니다. 그런데 말 나온김에 하나만 더 얻겠습니다. 20년 전에 부산에서 하숙할 때 권사님이 동지라며 팥죽을 해주며 악귀를 쫒는다며 먹으라 했